희망은 사랑에서 자란다
2026년의 키워드가 '불안'이라는 매체 보도를 보았다. 그 자체로 시대의 자화상 보는 듯하다. 편리함과 속도의 세상, 번쩍이는 기술과 화려한 소비의 이면에 감춰진 건 불안이다. 삶은 여전히 예측 불가능하고, 내일의 안전은 보장되지 않으며, 인간의 마음은 점점 더 피로해져 간다. 이토록 풍요로워 보이는 시대에 불안이 지배적인 정서가 되었다는 것은, 인간이 얼마나 외롭고 고단한지를 보여주는 역설이다. 세상은 각자의 생존을 위해 바쁘게 돌아가지만, 마음은 점점 움츠러든다.
이 사회의 불안 속에서 글을 쓴다는 것은, 어쩌면 무모한 일인지도 모른다. 알 수 없는 불안과 불황 앞에서 희망을 이야기한다는 것은 순진한 도전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나의 언어가 초라해 보이고, 그 어떤 믿음도 쉽지 않다. 그래도 나는 희망의 편에 서고 싶다. 깨지고, 실망하고, 상처 입더라도 끝내 희망을 포기하지 않으려는 마음은 단순한 낭만이 아니다. 그것은 삶을 향한 가장 원초적인 선택이고, 인간이 오래도록 이어온 생존의 본능이다.
희망은 사랑에서 자란다. 불안이 고립과 단절에서 생겨난다면, 사랑은 연결의 다른 이름이다. 사랑은 나의 고통이 타인의 고통과 다르지 않다는 자각에서 시작된다. 그 깨달음이 있을 때, 서로를 이해하고, 불안의 벽을 허물 수 있다. 불안의 시대에 사랑을 이야기하는 것은 낭만이 아니라 생존의 방식이다. 서로의 삶을 붙드는 일, 타인의 아픔에 귀 기울이는 일, 그리고 지친 하루 끝에 위로를 건네는 말 한마디가 누군가를 다시 살게 한다. 그것이 인간다움의 마지막 빛이기 때문이다.
사랑은 멀리 있지 않다. 사랑스러운 것은 언제나 작고 연약한 것들 속에 숨어 있다. 가늘게 떨리는 손끝, 눈빛 하나, 잠깐의 침묵 속에도 사랑은 존재한다. 그것은 보잘것없어 보이는 것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하려는 다정한 시선이다. 먼지처럼 흩날리는 희망을 손으로 붙잡을 수는 없지만, 햇살이 그 먼지를 비추는 순간을 포착할 수는 있다. 고통 속에서도 웃는 사람, 상실 이후에도 누군가를 품어주는 일, 차가운 세상 속에서도 따뜻한 말을 건네는 사람들의 이야기 속에 있다.
희망은 거대한 이상이 아닌, 매일의 의례다. 모두 각자의 방식으로 이 의례를 치른다. 커피 한 잔을 마시며 마음을 다독이고, 일몰을 바라보며 오늘을 정리하고, 내일의 나에게 조용히 괜찮다고 말하는 일. 비록 사소하지만, 무너지지 않기 위한 의지의 연습이다. 누구도 대단하지 않아도 좋다. 중요한 것은, 흔들리면서도 스스로를 붙잡는 그 작은 마음의 의식이다.
괜찮다는 말은 세상이 흔들려도 나의 가치는 흔들리지 않겠다는 다짐이다. 지금의 불완전함을 있는 그대로 포용하는 관용이다. 할 수 있어라는 말은 조용한 격려이자, 삶을 향한 의지의 속삭임이다.
긍정의 언어는 현실을 감당할 수 있는 내면의 근육을 기르는 훈련이다. 불안의 시대를 살아가는 모두에게 필요한 건 부서지지 않는 마음의 탄력성이다. 긍정은 현실의 무게를 견디는 또 하나의 지혜이고, 불안을 희망으로 번역하려는 개인의 철학이다. 이토록 불안한 세상 속에서도, 그래도 여전히 사랑을 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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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세상의 모든 균열을 메우는 가장 인간적인 따스함이다. 그것은 두려움을 이기는 용기이고, 불안을 건너는 연결이다. 모두가 서로에게 다정할 수 있다면, 세상은 조금 더 맑아진다. 불안이 내 안에서 파도처럼 일어도, 그 너머의 사랑을 잊지 않겠다고. 희망을 말하는 이 작은 글이, 누군가에게 잠시 머무를 쉼터가 되기를. 불안을 넘어, 사랑과 연결의 위에서 또 다른 내일을 엮어갈 수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