넓은 수돗가 마당 한켠에 흰 눈이 소복이 쌓여 있습니다. 장독대 뚜껑을 열고 살얼음 가득한 동치미를 꺼냅니다. 살을 에이듯 추운 겨울, 김치 꺼내려 나오시는 엄마의 치맛자락을 붙들고 쫄래쫄래 따라나섭니다. 양말도 없이 슬리퍼만 신은 발가락 사이로 찬바람이 훅 하며 생채기를 뽐내며 비웃듯 지나갑니다. 벌벌 떨어도 구경하고 싶어 나오고 껌딱지처럼 엄마품을 떨어지기 싫어도 나옵니다. 눈을 털어 내지 않고 그대로 뚜껑만 열어 누르스름한 동치미 국물과 잎이 달려 있는 무를 꺼내니 살짝 침이 고입니다. 하늘 위로 사르락 사르락 진눈깨비가 날리기 시작합니다. 장독대 위로 사뿐히 걸 터 앉은 눈이 장독대 주인도 알아보지 못하게 쌓이기 시작합니다. 그 넓은 수돗가 장독대들은 집집마다 담근 된장이며 고추장, 김치를 한가득 안고 한겨울 그렇게 오도카니 주인을 기다립니다.
방 안 따뜻한 아랫목에 언 발을 녹이며 엄마가 썰어 주신 시원한 동치미와 고구마를 먹으니 살 것 같습니다. 엄마는 다시 김치를 꺼내러 장독대에 가십니다. 어떤 김치를 꺼내실지 사뭇 궁금하지만 너무 추워 따라나서지는 않습니다. 그 시절 한겨울은 유독 춥고 길었습니다. 시간이 멈춘 듯 심심하고 심심해 어쩔 줄 몰라했던 그 시절 그때가 그립습니다.
김장을 담아 보니 어릴 적 100포기씩 하시던 엄마가 생각납니다. 이웃집, 옆집 김장한다고 하면 삼삼오오 몰려가 품앗이를 하고 얻어 온 김치 맛보는 재미도 쏠쏠했습니다. 이 집 김치는 너무 싱거워 올해 김장은 망했네 만득이네 김치는 너무 짜서 어찌 먹어 등등 김장 김치에 대한 품평도 놓치지 않고 해댑니다. 뭐니 뭐니 해도 수육과 함께 먹는 김치는 아주 일품입니다. 밖에서 놀다 배춧속 넣을 때 들어와 절인 배추에 속을 넣어 돌돌 말아 입안에 넣어 주신 김치가 짠지도 모르고 먹습니다. 먹어도 먹어도 맛있어 물 신지도 모르고 먹습니다. 그러다 자다 일어나 물을 벌컥벌컥 시원하게 들이킨 게 한두 번이 아닌데도 말입니다.
매년 하는 김장이지만 역시 배추를 시집보내는 일은 만만치 않습니다. 허리도 끊어질 것 같고 간 맞추기도 어지간히 힘든 게 아닙니다. 그래도 정성스레 담갔으니 가족들은 맛있게 먹습니다. 내년부터는 이제 배추 혼자 시집 장가갔으면 좋겠습니다. 하지만 저는 또 배추를 사겠지요? 노오랗게 잘 익은 배추는 너무 고소하고 맛있으니 안 살 수가 없습니다. 가족들이 엄지 척을 날리니 배추 시집보내는 일은 늙어 죽을 때까지 해야 할 제 몫인가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