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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abyell May 31. 2022

외갓집 옥상을 기억하는 법 | 라따뚜이 키쉬

소만 - 빨간 꽃이 피어나는 계절

2014년 겨울, 처음으로 가지가 맛있다고 생각했다.


가지는 악명 높다. 감히 악명이라는 단어를 써도 될만한 채소이다. 아마 초등학교 급식의 가지나물을 먹어본 사람이라면 공감할 것이다. 친구들과 갔던 중국 여행에서 그런 가지를 처음으로 맛있다고 느꼈다. 뜨거운 뚝배기에 맵고 기름진 양념과 함께 푹 익혀져 나온 가지였다.


생가지는 설핏 사과 같은 상큼한 향이 난다. 그리고 반으로 갈라 보면 하얀 속은 스펀지처럼 폭신하다. 익히거나 튀기면 상큼한 향은 휘발되고 양념과 기름을 양껏 흡수한 과육은 촉촉해진다. 그래서 양념이 적은 가지나물보단 기름이 흘러넘쳤던 중국의 뚝배기 가지가 맛있었던 게 아닐까? 때문에라도 가지는 푹 익혀 먹어야 하는 채소 중 하나이다. 사실 가지는 특유의 아린 맛 때문에 생으로 먹지 않는다. 입안과 목을 따끔거리게 만들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의 기억 속에서의 엄마는, 외할머니네 옥상의 가지를 뚝 따서 그냥 베어 먹었었다. 그야말로 '땡볕'이 내리쬐는 2층 옥상에서는 고추도 해가 뜨거워서 쪼그라들었지만 가지만큼은 튼실하게 컸었다. 태양 아래에서 검은 껍질을 빛내는 채소. 나의 뇌리에 박힌 가지의 모습이다.


제철의 살찐 가지는 탱글하고 반짝거리는 그 모습이 참으로 매력적이다. 다만 '악명 높은' 가지나물 대신 다른 여름 채소와 함께 거부감 없이 즐길 수 있는 방법을 소개해보려 한다.




키쉬는 계란물을 넣고 구운 파이로, 디저트보다는 식사에 가깝다. 프랑스식 피자라고 불리기도 하는데, 원하는 재료를 넣어 먹을 수 있다는 점이 특징이다. 이번에는 크림 베이스에 토마토소스를 킥으로 더하고 가지를 듬뿍 올린 라따뚜이 키쉬를 만들어 보자.


차갑게 준비한 버터를 먼저 밀가루에 넣고 잘게 잘라준다. 여기에 물기가 있는 재료를 넣고 섞어주면 강하게 퍼지는 밀의 향기가 느껴진다. 한 덩어리가 된 반죽은 냉장고에서 충분히 차갑게 해 주어야 안의 버터가 녹지 않게 성형할 수 있다. 이때 녹지 않고 살아남은 버터는 오븐 안에서 기화되어 파이의 생명이라 할 수 있는 결을 만들어 낸다. 때문에 파이를 만들 때는 재료의 냉기를 잃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완성된 파이 반죽은 오븐에 먼저 구워낸다. 수분기 많은 키쉬의 소스들이 반죽에 스며드는 것을 방지하기 위함이다. 파이 반죽을 소스와 함께 굽게 되면 바닥이 눅눅해져 기껏 만든 파이 결을 즐길 수 없게 된다.


반죽을 미리 굽는 동안 필링과 크림, 토핑을 준비하자. 양파는 얇게 썰어 볶고, 토핑은 크기와 두께를 맞춰가며 썰고, 토마토소스는 재료를 한데 넣어 뭉근하게 끓인다.

양파는 당이 캐러멜화 될 때의 달큰하고 매캐한 향을 느끼며 충분히 볶아 준다. 느긋함을 가지고 약불로 볶다 보면 투명했던 양파가 황금색으로 탈바꿈한다. 달짝이 토마토로 만든 소스는 다른 토마토보다 강렬한 빨강에 감탄하다 보면 금세 완성된다. 그렇게 모든 재료의 준비가 끝날 때쯤 구워둔 파이는 속을 채우기 좋은 상태가 된다.


충분히 식은 파이 반죽에 크림소스를 포함한 재료들을 켜켜이 쌓아 올린다. 방법은 정해진 것이 없다. 만들기 즐겁고 보기 즐거운 모양으로 쌓으면 그게 나만의 요리가 되는 법. 마음에 들게 토핑까지 마무리한 뒤 올리브유와 소금, 후추로 마지막 포인트를 준다.

이제 오븐에서 채소들이 충분히 익을 정도로 구워내면 된다. 가지는 설 익으면 참 맛이 없다. 애호박도 그렇다. 높은 온도에서 충분히 구워내면, 먹음직스러운 색으로 바뀌면서 맛도 한층 좋아진다. 그러니 배가 고파도 마지막까지 참을 수 있는 인내심이 필요하다.


라따뚜이 키쉬는 참 많은 시간을 투자해야 비로소 완성된다. 반죽의 냉장 휴지부터 양파의 카라멜라이징과 마지막 채소 토핑을 구워내기까지 시간이 들지 않는 과정이 없다.

하지만 머릿속에 그렸던 모습 그대로 완성된 파이를 오븐에서 꺼낼 때면, 힘들었던 시간마저도 견딜만한 과정이 된다. 그리고 그 파이가 내가 생각한 맛과 같을 때면, '내가 들인 시간은 헛된 것이 아니었구나'하며 오히려 보람을 느낀다. 여기에 내가 정성 들인 음식을 맛있게 즐겨줄 사람이 있고, 그와 함께일 수 있는 시간이 있다. 결국 그런 행복함이 모여 내가 베이킹을 계속하게끔 만들어준다.


라따뚜이 키쉬는 식었을 때 먹어도 맛있다. 신맛과 크리미함, 그리고 파이의 바삭함이 잘 어우러지면서 한 끼 식사로도 부족함이 없다. 부드럽게 잘 익은 가지와 호박 사이에 빼꼼히 고개를 내미는 빨간 토마토의 모습은 마치 이맘때에 피어나는 빨간 장미 같다.


가장 적당한 날씨에 보란 듯이 피어나는 빨간 꽃처럼 화려하게 피워낸 토핑이 시선을 사로잡는, 라따뚜이 키쉬 완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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