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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abyell Jun 23. 2022

풍경을 기억하는 법 | 여름시금치 모닝빵

망종 - 쨍한 초록의 들판

시금치가 좋다니, 참으로 올곧고 변함없는 취향이다.


잡채에 시금치를 많이 넣어달라고 하더니 이제는 시금치로 빵을 만들겠단다. 김밥에 든 것도 비빔밥에 든 것도 가리지 않고 잘 먹었더랬다. 쓴맛 없이 달큰한, 이 먹기 좋은 채소를 다른 애들은 왜 싫다는 걸까? 항상 의문이었다.


다른 녹황색 채소에 비하면 맛도, 향도 적은 편이다. 데치면 식감은 부들부들해지고 맛은 달큰해지는, 참 곁들이기 좋은 채소이다. 된장국에 넣어도, 참기름으로 무쳐도 튀지 않게 사각사각 씹는 맛을 더해준다. 세상 무난한 재료지만 튼튼해진다는 명목 하에 '먹임 당해서' 싫어하는 이가 많은 걸지도 모르겠다.


시금치에는 겨울 해풍을 맞고 자라는 겨울 시금치와 조직이 부드러운 여름 시금치가 있다. 단맛이 많고 씹는 맛이 좋은 겨울 시금치를 으뜸으로 치지만, 색과 크기로 치자면 여름 시금치가 한 수 위다. 여름 시금치의 쨍한 색깔과 코 끝으로 옅게 느껴지는 너티(nutty)한 향은 빵으로 즐기기에 제격이 아닐까.




시금치를 데치지 않고 생으로 씹다 보면 - 생으로 너무 많이 먹는 것은 추천하지 않는다 - 잣이나 캐슈넛 같이 기름이 많은 견과류의 향이 느껴진다. 그렇다 해도 옅디 옅은 향인지라 다른 재료와 함께일 때는 느끼기 어렵다. 남몰래 숨어있는  시금치의 향을 즐기기 위해 특별한 재료를 추가해 부드러운 식감의 빵을 만들어 보자.



시금치는 깨끗이 씻어 뿌리 부분을 잘라내고 잎과 줄기만 준비한다. 신선한 초록잎을 보면 느껴지는 생명력은 손질의 지루함을 견딜 수 있게 해 준다. 시금치는 자체의 수분이 많아 약간의 물과 함께면 쉽게 갈린다. 믹서로 곱게 갈아내면 시금치 본연의 색보다 더 진해 보이는 초록색이 만들어진다.

간 시금치는 버터를 뺀 재료와 한데 섞어 뭉친다. 초록색의 큰 덩어리가 될 때까지 반죽하다가 말랑한 버터를 넣고 마저 치대준다. 버터를 넣으면 확실히 손에 들러붙는 정도가 적어진다. 이때 손을 보면 연두색의 반죽이 잔뜩 묻어서 외계에서 온 생명체의 손바닥이 연상된다.

계란과 설탕, 버터가 들어간 빵 반죽은 치대는 중에도 달큰한 냄새가 난다. 이렇게 반죽부터 단내가 나는 단과자빵은 다른 빵에 비해 훨씬 부드러운 식감으로 완성된다. 거기에 아몬드 가루의 고소함까지 더해지니 반죽의 향만으로도 완성된 빵의 부드러움이 연상된다. 버터나 아몬드 같은 원재료의 풍미는 오히려 굽기 전, 반죽하는 사람이 가장 많이 느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손에 들러붙으며 뚝뚝 끊어지던 반죽을 '빵 만드는 게 이렇게나 고된 과정이구나'싶을 정도로, 혹은 온몸이 후끈해질 정도로 열심히 치대다 보면 어느샌가 매끈한 표면의 반죽으로 바뀐다. 글루텐이 잘 만들어졌다는 뜻이다.

따뜻한 곳에 두면 반죽이 점점 커지는데, 이렇게 커진 반죽은 살살 만지면 보드랍고 말랑하다. 그리고 이 보드라움이 내가 제빵을 하게 된 이유이기도 하다.


주로 먹던 모닝빵 사이즈로 둥글리고 다시 팬에 올려 따뜻한 곳에 두면 반죽은 한번 더 부드럽게 크기를 키운다. 이때 팬을 살며시 흔들면 잘 만든 푸딩처럼 흔들리는 걸 볼 수 있다. 이렇게나 여린 반죽 위에 준비한 계란물을 살며시 바르고, 토핑을 올리면 오븐에 들어갈 준비가 끝난다.

계란물이 입혀진 부분은 오븐의 열기 아래에서 맛깔스러운 황금 갈색으로 바뀐다. 그리고 서로 맞닿은 아래쪽은 시금치의 진한 초록 그대로를 품은 채로 더더욱 부풀어 오른다. 서로 비좁은 듯 딱 붙어 구워진 모닝빵을 보고 있으면 내 마음도 함께 부풀어 오른다. 초록 들판을 아래에 두고 뜨거운 태양으로 두둥실 떠오른다.

모닝빵은 각자 가장 맛있게 먹는 비법이 있을 것이다. 잼을 발라도 좋고, 버터를 발라 한번 더 구워도 맛있다. 아몬드가루로 한층 더 고소해진 시금치 모닝빵에는 직접 만든 리코타 치즈를 잼과 함께 곁들였다.


하얀 구름이 떠다니는 여름의 초록 들판, 그 위로 내리쬐는 쨍한 햇빛이 느껴지는 시금치 모닝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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