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톡에서는 하루가 멀다 하고 이야기를 주고받지만 정작 전화는 일 년에 네댓 번, 만나는 건 일 년에 한두 번인 친구들. 그나마 외국에 사는 친구가 일 년에 한 번은 오는 바람에 반강제적으로 만나고 있다.
그중 한 명에게 전화가 왔다. 딱히 행사도 없는데 웬일이지 싶었다.
"야 진짜 해주 만나기 힘드네?"
"응?"
"자기가 갈 것 같이 얘기 다 해놓고 이게 무슨 경우야?"
"응?"
"야 너 뭐 해?"
아아. 순간 잊고 있었다.
우리는 얼마 전부터 아이들을 데리고 피크닉을 가려고 날짜를 맞춰보고 있었다. 세 가족이 모두 가능한 날을 잡기가 쉽지 않았다. 겨우 날짜 하나가 남았는데 그마저도 해주가 선약이 있었다며 퇴짜 아닌 퇴짜를 놓는 바람에 성질이 나서 나에게 전화를 한 것이다.
일하다가 전화를 받은 내가 로봇같이 반응하자 더 답답해진 친구는 사자후를 토했다.
얘를 좀 진정시켜야겠다는 생각에 그럴 수밖에 없는 해주의 상황을 설명했다.
"해주가 올해 좀 정신없고 바쁜 것 같더라고."
"야 나는 뭐 괜찮냐? 다 그런 거지."
"너는 진짜 잘 지내는 거지. 하고 싶은 거 하면서 살잖아."
"아오~ 나 승질나는데 계속 그럴래? 이래서 내가 너한테 전화하면 안 되는 거였어!"
이런 말을 들으려고 나에게 전화한 게 아니구나 싶어 순간 미안해졌다.
"미안해. 내가 TJ(mbti) 라서. 일할 땐 이러더라고."
내 말을 듣고 난 친구는 난데없이 대학교 때 남자 친구 얘기를 꺼낸다.
"석우도 그랬어."
"응?"
"걔도 TJ야. 데이트 약속하면 미리 답사하는 스타일이었어."
주제가 급하게 바뀌면서 친구가 사귀었던 예전 남자 친구의 얘기가 시작된다.
"그건 TJ성향이라기보다 걔가 모쏠이었던 영향이 크지 않을까?"
"뭐 여하튼. 걔가 나 만나면서 진짜 힘들었겠지?"
갑자기 자기반성까지.
약속이 깨지자 속상해서 전화를 했던 친구와 널뛰는 듯한 주제로 대화를 하다가 자세한 얘기는 연말에 만나서 하자며 전화를 끊었다. 남들이 보면 고개를 갸웃거릴 터지만 30년 가까운 역사를 주고받다 보니 우리는 갑자기 어떤 얘기를 꺼내도 모르는 게 없는 사이가 되어 있었다.
물론 우리도 마음이 맞지 않아 싸우고 한두해 서먹하게 지내는 시절도 있었다. 한 친구는 삼수, 사수를 하느라고 몇 년간 소식을 듣지 못했고 다른 녀석은 여러 나라를 연이어 돌아다니는 통에 엽서로만 간간이 소식을 들었던 적도 있었다. 나 역시 취업하고 회사일로 바빠지자 친구들과 연락이 소홀했던 적이 있었다. 그런 세월을 한참 지내고 나니 서로에게 크게 화가 나거나 이해 못 할 것이 없는 사이가 되어 있었다.
어색하게 카톡 대화가 끊긴 날 저녁, 해주는 단톡방에 사진을 하나 올렸다. 바이올린 발표회를 한다는 해주 아들의 포스터 사진과 연습 영상이었다. 우리는 급 바뀐 주제에 응답하면서 자연스레 대화를 이어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