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 내 최애 만화책은 단연코 '아기공룡 둘리' 시리즈였다. 많은 사람들이 둘리를 TV 만화로 기억하지만 사실 그건 아이들용으로 만든 것이고, 만화책은 에피소드에 나름 사회를 바라보는 시선도 담겨있고, 어떤 내용엔 진한 페이소스가 묻어 있어서 어른들이 보기에도 손색이 없었다.
'아기공룡 둘리' 만화책을 보면서 어린 마음에 고길동 아저씨가 둘리에게 골탕 먹는 모습이 그렇게도 통쾌할 수 없었다. 저 아저씨는 왜 자꾸 아이들에게 화를 낸담? 애들이 집에서 소란도 부릴 수 있고, 놀다 보면 집을 좀 망가뜨릴 수도 있는 거 아닌가? 늘 치켜뜬 매서운 눈으로 방망이를 들고 둘리와 친구들을 쫓아다니고 때리는 고길동 아저씨가 참 미웠다.
뭐... 이러고 놀 수도 있...지...('아기공룡 둘리' 中)
하지만 이제 와서 다시 보니 이 아재만큼 선량한 사람이 또 있나 싶다. 빤한 월급쟁이 봉급으로 온갖 군식구들을 다 거둬 먹이고, 둘리 패거리들의 온갖 행패와 재물 손괴마저도 감내하는 이런 천사가 또 있을까.화를 내고 때리긴 했지만(오죽하면ㅠ), 자기 식구도 아닌 그 불청객들을 끝내 쫓아내지도 않는 인내심까지 갖춘 착한 아저씨가 아이들에게 그토록 빌런 취급을 받았으니 얼마나 억울했을까.
속이 터질만도...('아기공룡 둘리' 中)
고길동 아저씨의 부릅뜬 눈과 이따금씩 터지는 분노 뒤에는 사실 그들을 건사하기 위해 회사에서 힘겨운 직장생활을 해야 하는 애잔한 사회인으로서의 비애가 숨어 있지 않았겠는가. 그래서 언제부턴가... 난 둘리보다 마이콜보다 고길동 아저씨에게 더 마음이 가기 시작했다.둘리보다 고길동이 불쌍해지면 어른이 되는 거라는, 인터넷에 돌던 웃픈 이미지가 딱 내 얘기였다.만화책 속에서 휴일에 늘 혼자 베개를 베고 방에 누워있던 길동 아저씨의 뒷모습은 지금 생각하니 참 많이 짠하다. 주 6일 근무였던 그 시절, 직장에서 시달리고 나서 얼마나 집에서 쉬고 싶었을까.
네... 저도 어른이 된거겠죠?
얼마 전 유튜브의백세주 광고에서 고길동 아저씨를정말 오랜만에 보았다. 그리고 평소와는 달리 그 광고를 끝까지 다 보았고, 보고 난 후에 정말... 정말 찐하게 술 한잔이 하고 싶어졌다. 그저 술 광고였을 뿐인데 왜 그리도 마음이 먹먹하고 미안했을까. 술잔을 든 길동 아저씨가 나한테 말을 건네는 것 같았다. 아직도 내가 밉냐고.
만화책 속 고길동 아저씨만큼의 나이를 먹어서야, 길동 아저씨의 분노와 슬픔의 원천을 가늠할 수 있게 되었다. 이제 철수와 영희는 물론 희동이도 결혼을 하고 남을 만큼의 시간이 지난 지금, 아저씨는 은퇴를 하고 평화롭게 산책을 다니며 어딘가에서 편한 생활을 하고 계실까. 이젠 길동 아저씨에게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아저씨가 전혀 밉지 않다고. 오히려 둘리와 친구들을 보살펴주셔서 감사하다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