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봉봉 Aug 06. 2020

내가 살던 집 나를 키운 집

고양이 CCTV 2

길고양이들에게 밥을 주지 않기로 했다. 고양이 배설물 때문이다. 손바닥만한 마당과 지하실로 내려가는 계단 한편에 자꾸 고양이들은 똥을 쌌다. 흙 한 줌 없는 돌바닥 위에 얘네들이 대체 왜 이러나. 고양이들은 흙을 찾아 배설하는 걸로 알고 있는데 이건 좀 이상했다. 고양이 밥을 챙기는 아내가 인터넷으로 찾아본 바로는 고양이들끼리의 영역다툼이었다. 여러 고양이가 사료를 나눠먹다 보니 배설물로 저마다 자신의 영역 표시를 하는 것이었다. 가뜩이나 고양이들이 들락거리는 터라, 옆집 통장님 눈치가 보였는데 그 집 텃밭에도 똥을 싸는 모양이었다. 아내는 고양이들이 싫어하는 식초를 뿌리면 안 그럴 거라고 했지만 그 후에도 이런 일은 반복됐다. 게다가 가끔 집 밖에서는 고양이들이 싸우는 소리가 들리곤 했는데, 밤에 한바탕 붙은 날에는 살기 돋은 그 소리 때문에 밖에 나가보기가 무서울 정도였다.


고양이에 대한 미안함과 아쉬움이 남았지만 나는 밥 주는 걸 그만두자고 아내에게 말했다. 나도 냄새 지독한 고양이 똥을 더 이상 치우기는 싫었다. 바닥에 깔아놓은 쇠석에 있는 똥은 돌까지 같이 버려야 해서 치우기가 더 지랄 맞았다. 하지만 그 후에도 고양이들은 우리 집을 찾았다. 아내는 고양이가 보이면 밥을 챙겨주기도 했는데, 꾸준히 주지 않으면 안 주는 것보다 못하다는 말을 듣고 이마저 그만두게 되었다. 고양이를 좋아하는 아내는 죄책감 때문에 괴로워했다.


나는 고양이보다 강아지를 좋아했다. 어릴 때부터 집에서 개를 키워서였을까. 살갑게 반기는 강아지가 좋지, '세상 인생 나 혼자야, 나 건들지 마. 그런데 밥은 잊지 말고 주라.'이런 고양이들은 '너무 싸가지가 없는 것 아니냐'로 나는 늘 아내에게 불평했다.

 

내가 태어난 집에는 개가 있었다. 그때 개는 그야말로 개였다. 밖에서 자고, 사람이 먹고 남은 걸 먹었다. 아무리 날이 추워도 '어딜 집안에 개가 들어와' 불호령이 떨어졌다. 그때 개는 반려동물이 아니라 정말 개 같은 삶을 살아야 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엄마와 누나 그리고 나는 용현동 주택으로 이사를 했다. 작은 마당과 지하실이 있는 양옥집이었다. 이사 갈 집을 보고 와서 동네에 대한 설명을 하던 엄마의 모습이 기억난다. 골목길 두 번째 집인데 집에는 은행나무도 있다고 해서 나는 속으로 근사한 걸 상상했었다.


이사를 해서도 엄마는 마당에서 개를 키웠다. 역시 반려동물이라기보다 남자 없는 집을 지키려는 목적이 컸던 것 같다. 한 마리만 키운 적도 있고 새끼를 낳으면 여러 마리를 같이 키우기도 있다. 우리 집 개들은 엄마가 기대한 역할보다는 말썽을 일으키는 걸 더 좋아했다. 신발을 물어뜯거나 오토바이를 씹어대다가 엄마한테 빗자루로 얻어터지는 일이 종종 있었다. 개들은 대문 밑구멍으로 기어나가서 다시 집에 돌아오지 않기도 했다. 저녁이면 도망간 개들을 찾으러 나는 동네를 헤매곤 했다. 그러다 집 나간 개가 나를 발견하면 더 빨리 도망가고 그 뒤를 쫓았던 기억이 아련하다. 줄줄이 여러 마리를 키웠는데 '덩치'란 녀석 이름만 기억이 난다. 내가 군대를 가기 전까지 우리는 그 집에서 거의 10년을 살았다.


그때도 개똥 처리는 내 몫이었다. 어렸을 때 살았던 집 마당은 시멘트였고 한편에 나무를 심은 흙이 있었다. 개들은 주로 연탄광 근처에 볼일을 봤는데 개똥을 치우는 날은 마당을 대청소하는 날이었다. 마당에는 지하 펌프가 있었다. 그때 단독주택에는 집집마다 그런 펌프가 있었던 것 같다. 그 물을 먹지는 않았지만 '다라'에 물을 받아놓고 허드렛일에 썼다. 여름에는 빨간 김장통에 물을 받아서 나 혼자 물놀이를 하기도 했다. 마당청소는 '다라'에 받은 물로 시멘트 마당을 씻는 일이었다. 개똥이 쌓여있는 연탄광 근처부터 대문이 있는 아래까지 물을 부어가며 빗자루로 마당을 씻었다. 일주일에 한 번은 청소를 했던 것 같다. 쏴악 쏴악. 시멘트 바닥을 쓸던 그 소리도 아련하다.


주택에 살던 기억 때문에 다시 주택을 선택한 걸까.


마당 한편에는 은행나무와 복숭아나무가 있었다. 가을이면 냄새나는 은행이 마당에 후드득 떨어졌다. 이 또한 내 일거리여서 은행 껍질을 으깨고 지하수로 씻어냈다. 그렇게 몇 차례를 하고 나면 하얗고 뽀얀 은행 알맹이가 드러났다. 은행은 펜치로 살짝 흠집을 내고 우유갑에 넣어 전자레인지에 돌려 먹었다. 나는 별로 맛이 없었지만 엄마는 은행을 좋아했다. 같은 은행나무인데 열매를 맺지 못하는 앞집에도 엄마는 은행을 돌렸다. 은행나무는 암그루에서만 열매를 맺는다는 걸 나중에 알았다. 앞 집 나무가 수나무였다.   


생각해보니 어려서부터 나는 집안일을 곧잘 했다. 남편 없이 홀로 생계를 책임져야 했던 엄마를 돕는 걸 당연하게 생각했다. 또 아빠가 없었기 때문에 남자인 내가 역할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엄마와 나는 집안 곳곳을 고치고 수리했다. 당시 우리 집은 고쳐야 할 곳이 한두 군데가 아니었다. 겨울에는 집이 추워서 창문마다 비닐을 덧대는 걸 했다. 대형 비닐을 거실 창문에 덧씌우고 장판을 길게 자른 띠를 압정으로 창틀에 박아 고정시키는 것이었다. 해마다 겨울이 오면 이 일을 반복했다. 이뿐만이 아니라 도배도 직접 하고 심지어 천장 공사도 엄마와 둘이 했다. 그때 내 나이가 12살이었다.


천장 공사는 차원이 높은 일이었다. 당시 양옥집들이 그랬듯 우리 집 거실 내부는 모두 나무였다. 문제는 천장이었는데 기와에 물이 새는지 천장 나무가 하얗게 일어났다. 엄마는 그게 보기 싫어서 도배지로 천장을 덮고자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런 아이디어가 어디서 나왔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영문도 모른 채 엄마를 도왔다. 엄마는 천장 바로 아래 벽 사방에 못을 박았다. 줄 간격을 맞춰 못을 박고 철사를 길게 묶어 연결했다. 철사로 촘촘히 연결된 천장은 마치 바둑판같았다. 그리고는 그 철사 위아래에 도배지를 넣고 서로 맞붙였다. 그러니까 철사를 뼈대로 해서 도배지를 맞붙여 일종의 종이막을 만든 것이었다. 그런데 그렇게 종이 천장을 만들고 나니 한가운데가 아래로 축 쳐지게 되었다. 이거 어떡하냐고 보기 싫다고 걱정하는 나에게 엄마가 했던 말이 기억난다. "물을 뿌려놓으면 쫙 펴지니까, 걱정하지 마라."


엄마 말대로 신기하게 도배지로 만든 천장은 팽팽해졌다. 종이 천장은 지저분하던 나무를 모두 가려 주었다. 그렇게 우리 집은 하나둘 고쳐지고 있었다. 내가 중학교에 진학할 때 대문이 새 것으로 바뀌었고 고등학교에 갈 때쯤 연탄보일러가 기름보일러로 바뀌었다. 하지만 대학에 갈 때쯤엔 마당에 있는 재래식 화장실을 수세식으로 바꾸겠다는 엄마의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집이 은행 담보로 넘어갔기 때문이었다.  




이전 10화 고양이 CCTV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