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대답해 보라. 양이 꽃을 먹었을까? 먹지 않았을까?
누군가의 글을 읽다가 ‘명치를 찌른다’는 말을 읽는 순간이었다. 쨍한 금속성이 들리면서 가슴이 날카롭게 뚫리고 숨이 턱 막히던 그 시간의 아픔이 떠올랐다. 비가 줄기차게 내리던 2009년 7월, 10년도 더 지난 이야기. 검은 한복에 작고 흰 리본 핀을 꼽고 서 있었다. 더웠겠지. 사람이 많았겠지. 성당이었으니 연도 소리가 구슬펐겠지. 울었던가? 기억이란 무엇 하나 확실한 법이 없다. 흰 상자, 그것이 닫혔다는 것밖에. 그렇게 가슴에 구멍이 뚫렸단 밖에.
말을 할 수 있을까? 아니, 하지 말까? 세상은 이미 아픔으로 가득하니 거기에 더한다고 티가 나겠나, 괜찮다 싶다가, 아무렇지도 않게 잘 살고들 있는 모양이 부럽기도 하고 한편 위태롭기도 해서, 입을 떼는 것이 미안해지기도 한다. 그래도 아프다고, 아팠다고 말하는 것이 무슨 죄인 것도 아니고 나이는 안 먹을 수가 없어서 모든 일들이 지금 보다 더 빠른 속도로 잊히겠기에 맴도는 말들을 주워 담으려 애를 써본다.
아빠는 초등학교 선생님이셨다. 많은 자기소개서의 서두에 달리는 표현처럼 ‘엄하신 아버지’였다. 집에는 저녁 6시까지 들어와야 하고(강의가 6시에 끝나는데), 아침은 8시, 점심은 12시, 저녁은 6시에 먹어야 하며(공휴일에도), 공부하는데 무슨 음악이냐며 무조건 음악 소리는 시끄러우니 끄라고 성화, 냉장고에 콜라가 들어 있으면 이 상한다고 절대 마셔서는 안 된다고 성화. 친구들이랑 놀다가 늦게 들어가면 무릎 꿇리고 밤이 새도록 잔소리. 가훈은 ‘정직’. 근검절약해야 한다고 비누는 늘 한쪽 면에 은박지를 붙여 사용했다. 사야 하는 물건값이 만 원이면 팔천 원을 줬다. 왜 그랬는지 모르지만, 식사 때면 꼭 한 숟가락씩 남겨서 누가 먹지도 못하고 엄마한테 핀잔 듣기 일쑤였고, 월급날엔 뭘 많이 사는 법 없이 고등어 꼭 한 손, 어쩌다 돼지고기 한 근. 늘 규칙적으로 운동하고 애먼 음식 드시는 법이 없던 아빠는 평생 감기로라도 앓아누운 모습을 보인 적이 없었다.
이 정도 성실한 사람이 장수하지 않으면 누가 할까 생각했다. 밖에 나가 운동을 너무 많이 해서 피부가 발갛게 타고 물집이 생기고 벗어지는 거라, 생각했다. 암 수술도 척척 해내는 대한민국에서 이까짓 피부병 말고도 못 고칠 병이 무어냐, 했다. 평균수명이 80세가 넘는 나라니 적어도 그 정도는 살 수 있겠지. 그렇게 생각하고선 나는, 시시하고 보잘것없는 몇 푼 벌겠다고 이리 뛰고 저리 뛰고 쓸데없이 왜 그리 바빴는지 모를 일이다. ‘우리 애, 애 때문에…’라는 말은 무슨 벼슬이나 된다고 그리 달고 살았는지. 자기 일은 스스로 알아서 해야 한다고 가르친 사람이 잘못이다. 처음 병원에 함께 가자고 부탁할 때도 속으로 나는 그것이 여간 성가신 게 아니었다.
“할아버지, 지난번 약은 제대로 드신 거예요? 아, 왜 그러실까?”
배울 만큼 배웠다는 서울대학 병원 의사 선생 말본새가 왜 이 모양이지? 잘 모른다는 얘긴데, 울 아빠를 완전 무지렁이 취급하면서 덮어씌운다. 당연하다고 생각한 미래가 모두 허상으로 돌변하는 순간이었다(의사들은 아빠가 돌아가시기 2주 전이 되어서야 정확한 병명을 알려주었다. 어떤 보험도 보장해 주지 못하는 희귀한 혈액암이라고 했다). 그때도 나는 내 바쁜 처지가 더 곤란했다. 사막 한가운데에서 죽느냐 사느냐 하는데 양 한 마리만 그려 달라는 어린 왕자가 그저 황당하기만 하듯이. 생택쥐페리가 묘사한 것처럼 나는 ‘벼락 맞은 사람처럼’ 펄쩍 뛸 지경이었고 ‘갑자기 나타난 유령을 보고’(그제야 노쇠한 모습의 아빠가 보였다) ‘깜짝 놀라서 눈알이 돌아가는 줄 알았다.’
총에 맞은 듯 가슴에 구멍이 난 후 나는 한동안 잠을 잘 수 없었다. 병실에서 밤을 새울 때처럼 안타깝고 숨이 막힐듯한 밤은 깜깜하고 길었다. 잠깐 잠이 들면 악몽을 꿨다. 과연 낮이 있었나 싶었다. 시간이 다시 흐를까, 싶은 하루하루가 이어지던 어느 날, 꿈을 꿨다. 깨고 나서 비로소 아침을 느꼈으니 악몽은 아니었다. 어느 집 집들이가 성대했다. 넓은 집에 사람들은 즐거웠고 손에는 크리스털 술잔이 들려 있었다. 그 집엔 드레스룸이 화려했다. 남편과 나는 그곳에서 어느 넥타이가 어울리는지 이것저것 만져보고 있었다. 따뜻한 손길이 무지개 빛 넥타이를 권하기에 고개를 들어 보니 집주인이었는데, 우윳빛이 화사하게 감도는 분홍색 저고리에 쪽빛 고름, 엷은 하늘색 비단으로 지어진 바지를 입고 얼굴에는 빛이 났다. 손에 와인 잔을 들고 나의 감사 인사에 눈웃음으로 답을 해준다. 그러고 보니, 아빠구나, 생각이 들면서 꿈에서 깼다.
아빠가 술을 좋아하셨지. 고통스러운 시간을 견디고 이젠 잔치를 즐기고 계실지도 모르겠구나. 하긴, 음악 소리는 하여간 시끄럽다고 하더니 언젠가 동생 방에서 ‘가도 가도 끝이 없는 외로운 이 나그네길…’하는 김현식의 노래를 틀어 놓고 따라 불렀어. 그 노래를 부르는 아빠를 생각하면 딱하고 애처롭지만, 바리톤의 목소리가 참 좋았어. 방문을 열어젖히며 겸연쩍으면서도 호탕하게 “위대한 우리 딸, 공부하는가?” 하던 그 목소리가 그땐 그렇게 싫었는데. 위대하다고 계속 말해주면 위대해질 줄 알았을 텐데 결국 위대(胃大)한 딸이 되었을 뿐이라 생각하니 웃프다. 끝까지 포기하지 않던 그 아재 유머는 어떡하고. 할머니에게 둘도 없는 효자였던 아빠는 늘 젓가락으로 반찬을 집어 입에 넣고서 “아이고 맛있네. 어머니가 하셨나 보네!” 했다. 그러면 엄마가 뾰로통해져서 “그거 내가 한 건데!” 하면 “그래? 어쩐지 맛있더라. 난 어머님이 하신 건 줄 알았지!” 했다. 아빠는 마지막까지 무슨 일인지 모르겠지만 누군가에게 자꾸 “아이구 미안해요.” “아이구, 아이구, 고마워요.”하다, 아침 출근 시간을 맞춰 떠나가셨다.
지난 시간을 돌이켜 생각하다 보니 문득 고등학교 여름 방학, 밤새 읽고 새벽녘 펑펑 울며 잠들었던 생택쥐페리의 『어린 왕자』가 생각났다. 노란 별이 반짝이고 그것을 바라보면서 ‘나무가 넘어가듯 서서히’ 쓰러지는 어린 왕자를 그린 그림을 보며 나는 꺽꺽 울었다. 그 영향이었는지 나는 프랑스 문학을 전공했다. 『어린 왕자』는 외우다시피 읽고 시험도 본 책이다. 하지만 지금까지도 나는 양을 그려달라는데 인내심에 한계를 느끼고 ‘옛다 받아라’ 하는 심정으로 구멍 세 개가 뚫린 블록 모양의 상자를 그려줬는데 ‘바로 이거야!’를 외치는 어린 왕자의 정신세계를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 왜 구멍 뚫린 상자지?
어딘지도 모르는 어딘가에서, 한 번도 본 적 없는 양 한 마리가, 한 번도 본 적 없는 꽃 한 송이를, 먹었느냐 안 먹었느냐에 따라 온 우주가 완전히 달라지는 셈이다.
그대 오늘 밤 창을 열고 별바다를 바라보라. 그리고 대답해 보라. 양이 꽃을 먹었을까? 먹지 않았을까? 그러면 당신은 모든 것을 변화시키는 방법을 깨닫게 될 것이다... 하지만 어른들은 이것이 중요한 문제라는 걸 이해하지 못한다.
(생텍쥐페리, 어린 왕자, 소와다리, 2016. 91쪽)
내 가슴속에 뚫린 구멍이 이 상자의 구멍으로 연결돼 있는 건 아닐까? 그 구멍으로 얼핏 친구들과 술 한 잔을 즐기고 있는 아빠를 보았는지도 모른다. 어딘지 모르는 어딘가에서 아빠도 예전처럼 문 활짝 열어젖히며 “위대한 우리 딸!” 할 수는 없어도 이 구멍을 통해 딸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요리조리 살펴보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가슴속의 구멍은 아물지 않겠지. 하지만 쓰임이 있구나. 바로 이거야. 구멍이 뚫린 상자 속 양 한 마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