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격장 조교가 되다.
군 생활 한 사이클을 돌았다. 이등병과 일병 사이에서 최고참이 됐다. 여러 큰 훈련을 경험했다. 매 훈련마다 11사단 수색대대와 어울리게 시작과 끝은 행군이다. 밖에서도 걷기를 좋아했던 나다. 하지만 이곳은 불편한 군장을 어깨에 짋어지고, 쿠션과 공기배출이 전혀 없는 군화를 신고 먼 거리를 걷는다.
행군을 시작하면 부대 밖을 나간다. 주변이 산과 들밖에 보이지 않는다. 분명 사람도 사는 곳인데 눈에 띄지 않는다. 바깥공기를 맞으며 걷는 길은 산뜻하다. 발걸음이 가벼워 마음 같아서는 100km로도 순식간에 다녀올 거 같다.
하지만 강원도의 뜨겁고, 차가운 날씨가 행군을 쉽게 생각했던 기분을 되돌린다. 가도 가도 끝이 없는 길.
산뜻하게 시작했던 마음은 어리론가 사라져 버렸다. 앞사람의 발만 보고 무의식으로 걷는다. 아무 생각이 안 든다. 그러다 날이 저물고 야간행군을 한다. 여기서 놀라운 광경을 보게 된다.
나란히 줄지어서 가던 병사들이 점점 오합지졸이 된다. 졸려서다. 졸면서 가다가 차도로 점점 다가간다.
이때, 어디선가 배구선수의 스파이크만큼의 충격이 하이바로 전해온다.
"정신 안 차려! 이 xx가 죽으려고 환장했나."
오래 걷다 보면 발바닥이 붓고 심하면 발톱도 빠진다. 난 다른 것보다 허벅지가 쓸려서 고생을 했다. 이건 쉬지도 못하고 이상한 자세로 걸어야 했다. 이 고통이란... 그렇게 그렇게 시간은 갔다.
11사단 수색대대는 사단 유격장을 관리한다. 유격장 조교로 선정된 한 소대(30명)와 운전병, 취사병이 부대와 1년 동안 따로 떨어져 지낸다. 당연히 모든 훈련은 제외된다. 그래서 부대 안에서 가고 싶어 하고, 되고 싶어 하는 게 '유격장 조교'다.
올해는 우리 3중대에서 한 소대가 조교로 선정된다. 여기서 여러 소문이 돈다. 소대장 짬밥 순으로 선정된다든가. 또는 조교로써 자세가 잘 나오는 우수한 소대가 된다는 것이었다. 당시에 소문으로 따지면 우리 소대는 해당되지 않았다. 소대장 짬은 두 번째고, 선임 몇 명을 제외하고는 평범해 보였다.
전혀 기대가 없었다. 당연히 1, 2소대 중 하나가 뽑힐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어느 날 중대 선임하사가 우리 소대에 와서 3소대가 가능성이 가장 높다고 전했다. '이게 무슨 일인가.'
과정은 모른다. 중대장은 우리 소대를 유격장 조교로 보냈다. 다른 소대원들의 부러운 눈빛이 부담스러울 정도였다. 3소대 전원은 유격장으로 향했다. 그곳에서 전임 조교로부터 전체적인 교육을 받는다. PT 조교, 산악코스 (사수 부사수), 기초코스 (사수 부사수)로 나뉜다.
한 코스씩 실제 해보면서 작점 받는다. 난 어디 코스로 갔을까? 바로 기초 18단계 그네 넘기 코스다.
그네 넘기 코스는 막사와 가깝고(고공 사다리 코스와 산악코스는 올라가고 내려오는데도 매우 힘들다.)
관리도 편해서 주로 말년급에서 선정 됐었다. 나는 짬밥에 따라 사수를 부여받았다. 그런데 솔직히 다른 코스에서 자세가 나오지 않아 밀리고 밀려서 행운의 그네 넘기 코스에 낙점됐다.
유격장 조교 시절 멘트는 아직도 기억에서 지워지지 않는다.
"반갑습니다. 본 코스는 기초 18단계 그네 넘기 코스로써,
높이 4m, 폭 2.5m로 되어 있습니다. 알겠습니까?
전시에 오염된 강이나 늪지대를 건너는 데 목적 있습니다."
우리 소대원은 밥만 먹고 해당 코스에서 기구를 탔다. 당연히 누구보다 잘할 수밖에 없다. 이제 첫 부대를 맞이할 때가 됐다. 유격장에서 11사단 내 모든 부대를 만날 수 있었다. 난 신병교육대 동기들을 보고 싶었다. 흥분되고 기다려졌다.
그런데 며칠 후 사단본부에서 나를 찾는다는 전화가 왔다. 소대장은 헐레벌떡 다급하게 나를 찾았다.
영문도 모른 체 전화를 받았다.
"수색대대 유격장 조교 코와붕가 상병입니다."
"난 사단본부 누구누구인데, 차 보낼 테니 본부에서 보자고."
그는 내 대답도 듣지 않고 바로 끊어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