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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지개인간 Jun 01. 2023

비 오는 날은 머리를 감기 싫습니다.

숏컷 단발이지만

  한 동안은 긴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다녔습니다. 인생 최대의 길이였지만 가슴 선을 조금 넘는 정도였어요. 즉 거울을 보면서 '와우, 길다!'라며 입이 떡 벌어질 정도는 아니었어요. 상당히 객관적인 사람으로서 판단하자면 보기 좋은 정도였습니다. 긴 머리카락의 가장 큰 장점은 매일 머리를 감지 않아도 됩니다. 홀수 날에는 머리를 풀고, 짝수 날에는 머리를 묶고 다녀도 괜찮습니다. 만약 유분이 적은 두피를 가졌다면 이틀에 한 번이 적당히 건강한 모발 상태를 유지하는데 도움이 된다고 긴 생머리의 여자는 말했습니다. 저입니다.


  가장 큰 단점은 머리를 감을 때마다 아주, 그냥 머리카락이 아니라 빨래를 빨듯이 종일 거품을 내고, 두피까지 잘 씻어내야 한다는 거죠. 헹구는 시간 또한 오래 걸려요. 한 손으로는 샤워기를 들고, 한 손으로는 끝없이 헹구고 팔이 저립니다. 게다가 머리숱까지 많은 사람은 어깨가 빠질 것 같습니다. 이것도 저입니다.

  그래서 정확히 7주 5일 전, 긴 머리카락을 싹둑 자르고 단발로 변신을 했습니다. 단골 미용실 원장님께는 특별 주문도 드렸습니다.

  "머리숱도 팍팍 쳐주세요."


  턱 선까지 싹둑 자른 숏컷 단발은 참 매력적입니다. 우선 가볍습니다. 조선시대에 태어났으면 어마어마한 무게의 머리를 이고 살았을 텐데 19XX 년대에 태어나서 참말로 다행입니다. 이번에는 너무 짧게 잘라 머리가 묶이지 않지만 그래도 7주 5일 전에 비하면 좋은 점이 더 많습니다. 우선 머리를 감는 시간이 컵라면 조리시간보다 훨씬 짧습니다. 컵라면을 꺼내 포장지를 뜯고 스프 봉지도 뜯어 스프를 부은 다음 후다닥 머리를 감고 와도 맛있는 라면을 먹을 수 있다는 것이죠.


  숏컷 단발을 한 지 7주 5일이 흘렀습니다. 지난 7주 4일 동안 발견하지 못한 단점을 오늘에서야 찾게 되었어요. 부슬부슬 비가 내리니 머리를 감는 일이 참으로 귀찮습니다.

  '머리 감아야 되는데......'

  흥얼거리다 보니 오전 11시가 넘었더라고요. 하는 수 없이 11시 40분이 되어서야 겨우 욕실로 입장했습니다. 머리를 감아야 되는데, 생각만 하며 시간을 흘러 보낼 수 없으니까요. 출근해야 하거든요.


  온수로 두피와 모발을 촉촉하게 적시며 생각했습니다. '밖에 나가면 다시 수분을 머금겠지?'

  1회 펌핑으로 적당량의 샴푸를 바르면 생각했습니다. '밖에 나가서 비 맞으면 씻으나 마나겠지?'

  거품으로 머리카락 하나, 두피까지 골고루 발랐어요. '그래도 향기가 좋긴 하겠네.'

  다시 온수로 거품을 깨끗하게 씻어내면 생각했어요. '밖에 나가면 머리도 부슬부슬해지겠지?'

  물기를 짜고 수건을 두른 후 거울을 보았어요. '아, 정말 비 오는 날은 만사가 귀찮다.'


  제주의 하늘은 오후가 되면서 울고 있습니다. 아주 엉엉 울고 있습니다. 호우주의보도 내리고, 일기 예보에서는 내일도 비가 내릴 것이라고 합니다. 경보하듯 땀나게 걸어 일터에 도착하니 드라이기로 잘 말린 단발도 머리카락 끝이 꼬불꼬불 말리기 시작합니다. 그래도 감지 않은 것보다는 훨씬 나은 모습이죠.

  사실은 비가 와서 머리를 감기 싫었던 것은 핑계입니다. 전 오늘 머리를 감는 게 너무 귀찮았던 거죠. 내일은 미루지 않고 잘 감겠습니다. 비가 오더라도 말이죠.




  다정한 독자님, 편안한 6월의 첫날을 보내셨나요?

  독자님의 6월은 더 축복의 시간이길 진심으로 빌어봅니다.

  저만 머리 감는 게 자꾸 귀찮은 건 아니죠? 


  모발과 관련된 또 다른 이야기가 있어요. 

    ->  흰머리가 네잎클로버가 되는 순간 (brunch.co.kr)


  흰머리를 보니 이 글이 떠오르네요.

    ->  젊어지는 샘물보다 (brunch.co.kr)


  맑은 날의 제주의 가을을 담은 사진이 여기 있어요.

    ->  미치도록 아름다운 (brunch.co.kr)


  비처럼 슬픈 이야기지만 씩씩하게 적어낸 이야기도 있어요. 

    ->  부동산으로 3억을 날려 먹었다 (brunch.co.kr)


  무지개인(공)간의 브런치스토리를 찾아주시고, 글을 읽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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