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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지개인간 Jun 27. 2023

저는 수박이 싫어요

  괜히 크고 무거워서.




  

  여름철 대표 과일은 수박이지만 저에게는 쇼핑 카트에 담기 어려운 수박입니다. 수박 앞에서 되도록이면 많은 고민을 하고, 몇 번을 더 고민하고 또 고민을 하고 카트에 담다 보니 우리 집 식구들은 수박을 1년에 한 번 먹을까 말까입니다. 다행히 아이들은 학교 급식이나 여름 방학에 사촌을 만나러 가면 수박 맛을 볼 수 있어 수박 먹는 즐거움을 모르는 것은 아니지요. 아무튼 우리 집에서는 삼겹살이 밖에서 먹는 음식이 아니라 수박이 밖에서 먹는 과일입니다.


  제 손으로 수박을 산 것은 몇 년 전이었어요. 제주에 온 첫 해, 그러니까 (사)춘기가 4학년 때 하나로마트에서 애월 신엄리 수박을 샀는데, 정말 설탕물이 흘러나오는 듯 달더라고요. 그때 그 수박은 너무 크면 들고 나르기가 불편한데 크기도 적당했습니다. 수박이 아니라 '곰돌이 인형이다' 생각하고 안으면 폭 안기는 사이즈였죠. 부지런히 먹었어요. 저녁 후식으로만 먹었더니 수박 한 통을 해치우는데 2박 3일이 걸리더라고요. 평소 수박에 대한 편견을 바꿔주는 멋진 친구(?)였네요.


  이번 주말에는 맛있었던 '그 수박'이 생각나 그의 후손 하나를 골라 집으로 데려 왔어요.  


충북 음성에서 제주 여행 온 수박 @무지개인간


  롯데마트에서 샀더니 다른 집안 수박이군요. 그래도 25년 경력의 대표선별사가 엄선한 수박이라고 합니다. 맛있다는 말이겠죠.

  계산을 하고 주차장까지 가는데, 이 수박이 너무 무겁습니다. 쇼핑 카트에 담겨 있지만 30구짜리 계란도 옆에 있어 아주 살금살금, 조심조심 긴장이 넘칩니다. 결국 계산을 하고 나온 지 5분도 되지 않아 저는 이 수박이 너무 싫어졌습니다. 수박을 나눠 먹은 즐거웠던 시간을 생각하며 산 수박은 갑자기 골칫덩어리가 됩니다.


  '장마 시작인데 이 무거운 수박을 들고 비 맞으며 가야겠네.'

  '이놈의 수박, 껍질을 자르고 먹기 좋게 잘라 보관하려면 금세 싱크대가 가득 차겠네.'

  '아, 방금 음식물 쓰레기 버리고 나왔는데 또 가야겠지?'

  '모르겠다. 우선 냉장고로!'


  수박은 꾸깃꾸깃 마음이 상한 채(확실하지 않음)로 두 개의 서랍칸 바로 위인 냉장실 1층으로 들어갔습니다. 이후 냉장고 문은 여러 번 열렸지만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도 수박을 꺼내주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고 하며 수박은 '이러다 여름잠이라도 들겠어'라고 말하려는 찰나, 사람의 온기를 느끼고 잠을 물리쳤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내 누구 덕분에 밖으로 나오게 되었는지 알 수 있었다고 합니다.



수박이다! 수박 수영장이다!


 

  "수박 화재는 안돼. 그냥 먹자. 엄마가 지금 먹기 좋게 자를게."

  먼저 수박을 반으로 가르고, 껍질을 흰 부분을 정리해 줍니다. 그리고 댕강댕강 깍둑 썰어 보관 용기에 가득 담아주지요. 별 일은 아니지만 껍질이 가득 쌓이는 지금 이 순간도 저는 수박이 싫습니다. 수박이 싫은데 춘기가 제일 좋아하는 과일이라 내색을 못하다가 마침 춘기가 방에 문을 닫고 있는 관계로 수박에게 본심을 전해봅니다.


  난 말이야. 수박 네가 싫어. 왜 싫은지 오늘 알았어. 나는 수박이 네가 그렇게 싫더라고.
  넌 왜 크고 무거운데 둥글기까지 해서 우리 엄마를 그렇게 힘들게 했니?
  내가 어렸을 때 엄마가 우리 남매 먹일 수박을 사서 손에 들고 30분이나 되는 길을 얼마나 힘들게 다녔겠니, 그 무더운 여름날에 무거운 널 들고 말이야. 넌 우리 엄마가 몇 번이나 손을 바꿔가며 크고 무거운 널 데리고 왔는지 알잖아. 수박 아저씨가 맛있다고 세모로 조각 내준 것도 눈으로 보기만 하고 먹지도 않고 꼭 끼워 오셨어.
  어느 날은 엄마와 함께 시장을 갔는데, 엄마는 오른손에는 수박, 왼손에는 복숭아 봉지와 고등어 봉지를 들고는 나한테는 나물 봉지를 들게 했어. 그러다가 아빠가 좋아하는 참외를 보면 못 지나치고는 참외도 한 봉지를 샀지. 그 봉지를 내가 들었는데 그때 내가 너무 말라서 몹시 무거워 보였나 봐. 그날은 엄마가 중간이 나를 세우더니 나무 그늘 밑에서 수박아저씨가 내 준 세모 조각을 나한테 줬어. 먹으라고.
  지금 생각하니 엄마가 수박 하나 때문에 얼마나 힘이 들었을까, 나는 이틀 동안 꼴도 보기 싫던데 엄마는 저녁 먹고 도란도란 둘러앉아 먹는 수박이 맛있어서 사고 또 샀겠지?
  난 그것도 모르고 엄마가 제일 좋아하는 과일이 수박인 줄 알았어.
  수박 너는 왜 그렇게 크고 무거운데 둥글기까지 해서 우리 엄마 손도 너처럼 빨갛게 익도록 만드니!
  엄마를 닮아갈수록 자꾸만 수박 네가 싫어지잖아.   


수박이 싫지만 춘기가 좋아해서 잘랐다 @무지개인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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