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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지개인간 Oct 04. 2023

잘 자요, 오트밀

오버나이트 오트밀로 시작하는 아침

  오늘은 어떤 아침 식사를 드셨나요? 저의 오늘 아침은 오트밀과 과일 몇 조각입니다. 수제 그릭요거트에 오트밀과 꿀을 넣고 고루 섞어 먹는 것은 제가 좋아하는 아침 메뉴인데 아쉽게도 식구 중에는 저만 좋아합니다. 저만 좋아하다 보니 오트밀은 한 봉을 사도 볼 때마다 '이만큼' 남아 있습니다. 쉽사리 줄지가 않지요. 그릭요거트는 딸기잼이나 한라봉청을 얹으면 상큼 달달해져서 드문드문 팔리기는 하지만 오트밀(압착 귀리)은 제가 구해주지 않으면 주방을 나서 식탁으로 옮겨질 일이 없습니다. 


  엄마, 내일 아침에 오트밀 먹고 싶어.

  웬 일? (사)춘기가 아침으로 오트밀을 먹고 싶다고 합니다. 그래서 자기 전에 오트밀을 용기에 담고 우유를 부어 냉장고에서 하룻밤을 재우며 불린 오버나이트 오트밀을 준비해 뒀습니다. 아, 요즘은 워낙 빠른 세상이라 오버나이트 오트밀을 줄여서 '오나오'라고 부르더라고요. 역시 자꾸 배우고 들어야 합니다.


  정말 피곤한 아침입니다. 엿새 동안의 긴 연휴 끝에 등교라 아침에 일어나는 것부터 곤욕입니다. 생전 없던 두통까지 생긴 듯 자꾸만 눕고 싶어 져서 알람을 몇 번이나 맞추고 껐는지 모르겠습니다. 비록 몸은 무거웠지만 아침 메뉴를 고민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은 마음을 가볍게 만듭니다. 냉장고를 열어보니 우유에 충분히 불린 묵직한 오트밀이 용기에 담겨 있습니다. 손가락 마디에서 느껴지는 무게 만으로도 '오늘 오트밀이 참 잘 잤구나!'라는 것을 알 수 있지요. 뚜껑을 열어서 휘휘 저어보니 점성이 생겨 부드럽게 넘어갈 것 같습니다. 우리 춘기가 이것만 먹고 가면 급식 시간까지 배가 고플까 봐 국그릇을 꺼내 '오나오'를 가득 뜹니다. 아침에 냉기 있는 음식은 부담되기에 전자레인지에서 1분 30초를 돌렸습니다. 그 사이에 곁들일 무언가를 찾아봅니다. 냉동 베리류가 있으면 예쁘게 먹을 수 있겠지만 냉동 야, 과채는 사지 않는 편이라 냉동실을 아무리 뒤져도 나올 리가 없지요. 냉장고에 있는 무화과와 사과를 슬라이스로 썰고 꿀단지를 꺼내 꿀을 휘릭 둘러 줍니다.


 

오버나이트 오트밀 @무지개인간


  춘기의 입맛에 맞을까 염려가 되었는데, 춘기는 맛있다고 합니다. 휴, 다행이네요.


  취향이 닮아간다는 것은 어떤 의미 궁금해졌습니다.


  아이가 태어나면 어른들은 자기와 닮은 구석을 찾기 위해 열심히 관찰합니다. 우선은 얼굴에서 찾고 아무리 눈을 크게 뜨고 찾아보아도 친숙한 부분이 없다면 하다못해 발가락, 구체적으로는 엄지발가락 옆 검지 발가락의 주름이 닮았다고 찾아내기도 하지요. 그래그래, 하며 웃고 말지만 닮았다는 것은 대상 존재와 나눌 수 있는 가장 큰 애정 표현입니다. 외적으로 보이는 닮음에 대한 관찰은 어느 시기가 되면 시들해집니다. 갓난아이는 자라는 속도만큼 매일 낯선 얼굴로 엄마, 아빠를 쳐다보지만 기본적인 형식 같은 '틀'은 변하지 않거든요. 어제는 엄마를 닮았다가 오늘은 아빠를 닮는 식의 반전은 없더라고요.


  오늘은 취향을 닮아가는 춘기를 만났습니다. 더 많은 애정과 관심, 다정한 말을 건넸기에 엄마의 취향을 닮아간다는 것은 당연한 일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무엇 때문인지 양가감정이 듭니다. 좋으면서 불안합니다.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보면 아이가 갓난아기의 티를 벗으면 그다음에는 성격에서 나와 닮은 점을 찾아봅니다. 종종 나 대신 '그'와 닮은 몹쓸 성격이 더 잘 찾아지기도 하지요. 아무튼, 춘기가 어렸을 때 어쩌다 저와 닮은 생각이나 행동을 보여주면 '나를 닮아서 다행이야.'하고 내심 좋아했던 기억이 납니다. 이제는 그만큼 가까운 거리에서 아이를 관찰하는 일도 없지만 오늘처럼 우연히 닮은 점을 보게 되면 어깨부터 무거워집니다. 어릴 적 아이를 보며 떠올린 나를 닮았으니 걱정이 없을 거라는 믿음은 이제껏 살아온 삶에 대한 후회 없는 확신에서 온 것이었다면 지금은 사십춘기를 보내면서 바다 위에 흔들리며 떠있는 종이배 같은 삶이 아이에게도 이어질까 봐 불안한 것 같습니다. 그리고 제가 해야 할 것은 이 불안을 마주하고 안아야 다시 안전한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갈 수 있다는 것도 알아차립니다.


  "오트밀도 이제 바닥나겠다."

  저 혼자만 먹던 오트밀을 이제는 나눠 먹게 되었으니, 춘기에게 무엇이든 한번 빠지면 끝장을 보는 네가 오트밀도 질릴 때까지 먹겠다는 말을 농담처럼 던져봅니다. 피곤한 춘기는 대답 없이 웃기만 합니다. 그리고는 한 마디를 덧붙였어요.


  맛있네!


  취향이 같은 어른 사람을 만나는 경험과 아이가 자라며 자신의 취향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우리가 닮았다가 달랐다가 하는 것은 느낌이 무척 다릅니다. 둘 다 편안하고 안정된 마음이 들게 하지만 후자는 전자에 비해 기대와 설렘을 줍니다. 예를 들자면 몇 년 뒤면 어른에게 허락된 소주, 맥주, 와인, 위스키 등의 주류 취향과 함께 커피의 취향도 닮은 지 다른지 알 수 있겠지요. 그리고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리는 시간에는 적성의 닮음부터 알아가겠지요. 다음 주면 춘기의 첫 중간고사가 시작됩니다. 벌써부터 아주 심장이 쫄깃합니다.

  오버나이트 오트밀을 먹다가 취향에 대해 이야기를 했지만 극 현실로 돌아와 중간고사를 떠올리며 적성의 취향으로 마무리하는 신기방기한 글이 되었지만, 머릿속에 가득 차 있던 생각을 써서 기분이 좋은 아침입니다.


  어쨌든 오버나이트 오트밀은 만들기도 간편하고 소화도 잘 되니 작은 양의 오트밀(압착 귀리)을 사서 드셔보세요. 아침이 편안해집니다. 그리고 독자님의 취향도 저와 닮았는지 나눠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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