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장 지금 나는 무엇을 쓰고 있는가?
질문이여, 안녕!
이제 이 질문─무엇을 쓸 것인가?─을 버려야 할 차례다. 작품에 대한 시-놉시스가 있으니 질문은 사족이 될 뿐이다. 줄곧 얘기한 것처럼 고민을 길게 가져가서는 죽도 밥도 안 된다. 게다가 시적 대상을 계속 바꾸면 화음이고 뭐고 사라져버린다. 애초에 (쇤베르크의 무조음악과 같은) 무조-시를 기획했다면 또 모를까(무조음악에도 소리의 결은 살아 있다). 이런 사람은 대체로 두 가지 부류다. 하나는 시를 위대한 성인의 유골로 격상시켜버린 경우고, 다른 하나는 애초에 시에 대한 관심이 전혀 없는 사람이다. 특히, 시를 쓰겠다면 평생을 마주해야 할 질문이니 여기에 많은 시간을 투자하는 것은 어리석다. 시 쓰기에 예술적 아우라를 덧칠하고 싶다면 나중에 하자. 질문에 드는 시간이 과하다 싶기 전에 바로 멈추고 차라리 책을 읽자.
그렇다면, 이 고민을 짧게 끝내는 방법은 없을까? 괴테나 톨스토이 같은 대문호의 작품들은 그 고뇌의 산물일 텐데, 과연 도마뱀 꼬리 잘라내듯 질문을 버리는 것이 바람직할까? 나는 (노골적으로, 확신을 가지고!) ‘그렇다’로 답안을 제출하겠다.
그런데 ‘질문’을 버려야 할 때는 언제일까? 대략 시-놉시스가 완성될 때다. 그 시간은 생각보다 무척 짧다. 내 경우, 시-놉시스를 통해 대상의 윤곽을 잡으면 뒤도 안 돌아보고 그 질문과 이별한다. 여기서 대상의 윤곽이란 ‘유년의 다락방 냄새’ 같은, 구체적이면서도 포괄적인 상태를 말한다. (구체적이면 구체적일수록 좋다) 다만, 마음 속 어딘가에 질문의 자투리가 남아 있다면, 혹은 여전히 뭔가 찜찜하다면 내가 쓸 대상에 대한 확신이 없다는 얘기니 더욱더 폐기해야 한다. 내가 내 작품에 확신을 갖지 못한다면 다른 사람의 태도는 불보듯 뻔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대상이 정해지면 그 ‘대상’에 집중해야 하기 때문에, 머릿속에 떠오른 아이디어나 설계도가 계속 흔들릴 수 있다. 일단 스케치 수준일지라도 과감하게 작품의 전모를 그려내자. 그것으로 문턱 하나를 넘은 것이다. 시는 건축과 다르므로, 창작 과정에서 얼마든지 짓고 허물고 다시 지을 수 있다.
한 가지 더. 우리는 통상 괴테나 톨스토이의 사상이 절정에 다다른 작품을 읽는다. 고뇌와 혼란으로 가득한, 미생의 청년기 저작까지 접한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그분들이 그 견고한 성채(城砦)를 짓기 위해 보낸 시간들이 고스란히 투사된 작품들은 전공자 혹은 마니아가 아니면 대체로 찾지 않는다는 말이다. 당연하지만 그분들도 ‘무엇을 쓸 것인가?’에 대해 누구보다도 진지하게 고민했을 것이다. 때문에 『파우스트』(괴테)나 『안나 카레리나』(톨스토이)와 같은 인류애를 담은 대작이 탄생할 수 있었고, 이에 대해 정확하게 설명할 수 있었던 것이다. 거듭 강조하지만, 만일, ‘무엇을 쓸 것인가?’에 대한 질문만을 평생 밀고 나갔다면, 이 작품들이 세상에 나올 수 있었을까. 작품이란 이 질문의 직접적인 결과물이 아니다. 이 질문으로부터 촉발되고 수많은 고민과 목소리가 어울어져서는 마침내 ‘당대’라는 ‘총체’(總體)에 이른 완성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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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무엇을 쓸 것인가?’에 대한 문제는 시에 대한 시인의 마음가짐과도 연결된다. 이 ‘무엇’에 대한 창작자의 관점이 그 범위와 크기, 무게를 정하기 때문이다. 좀 전에 괴테와 톨스토이의 문학적 성취를 잠깐 언급했지만, 그분들의 질문은 작품의 최종국면에 적용되는 것이다. 처음부터 이 같은 생각 속에서 작품을 쓰지는 않았다. 그분들은 자신의 삶 가운데 실마리를 찾았고, 그것은 평소 생각하고 주장했던 자신들의 사상과 맞물리면서 점차 대작의 기운을 갖게 된 것이라 보는 게 맞다. 누가 거창하게, ‘나는 인류애를 담은 쓰겠다’고 주장한다면, 그 사람은 십중팔구 허황된 꿈을 꾸거나 자질이 없는 사람일 확률이 높다.
‘무엇을 쓸 것인가’에 대한 고민은, 정확히 시의 주제에 연결된다. ‘무엇’이란 시적 대상의 범위와 폭이지만, 작품의 주제를 선명하게 부각시킬 구체적인 ‘실체’─사물이나 사건 등─다. 따라서 ‘무엇’은 주제의 표현이다. 때문에 그 표현이 생명력을 얻기 위해서는 반드시 명확해야 한다. 공중부양하듯 떠 있으면 시는 방향을 잃게될 공산이 크다. 요컨대, 우리가, ‘이번에 나는 AI에 대해 쓸 거야“라는 문장과 ”아무래도 인공지능과 디스토피아에 대해 써야겠어’라는 문장의 차이는 한눈에 보이지 않는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은 구체적일수록 좋다. 시-놉시스는 후자의 문장이다.
따라서 ‘무엇을 쓸 것인가?’에 대한 답은 내가 가장 잘 아는, 오로지 나의 경험 중에 하나여야 한다. 여기에는 간접 경험도 포함된다. 그렇다고, ‘이것이 나만의 비밀스러운 경험이니 집중해서 잘 들어!’라는 마음을 갖거나, ‘놀랍지? 내 유년은 순수해!’라는 반응을 유도해서도 안 된다. 단지 나는 담담하고 솔직하게 고백할 뿐이다. 지금 내 눈에는 낡은 안경집과 연필깎기, 인주, 빨간색 노트, 20년이 넘은 CD, 귀퉁이가 깨진 기타가 보인다. 이것들은 모두 내 손때가 묻어 있다. 내가 가장 잘 알고, 눈을 감고도 그 내력을 속속들이 기억할 수 있다. 이렇게 손에 잡히는, 눈에 밟히는 경험만이 ‘무엇을 쓸 것인가?’에 대한 화답이다.
담장 밑 버려진 소주병에 바람이 들었습니다 볕이 내려앉아 알맞게 데우고 갔습니다 날벌레 몇 마리도 깊숙이 들어갔다 걸어 나왔습니다 조용히 숨죽이며 날개를 접었습니다 어디선가 금 간 소리들이 들렸습니다 모락모락 부풀고 느릿느릿 퍼졌습니다 악보가 수집하지 못한 소리라 생각했습니다 자세히 보니 음표와 음표 사이에 고여 있는 말들이었습니다 멀어서 늦은 당신처럼 기록되기를 잠시 멈춘 가을, 그 무렵의 악기 한 소절이 늦은 달을 틀어놓고 있었습니다
─ 박성현, 「가울 무렵 악기 한 소절」 전문
악기에 대한 나의 애처로운 연민과 집착은, 대상을 완전히 다르게 보도록 했다. 노숙자 한 분이 담장에 누워 잠을 청했던 모양인데, 날이 어둑해지자 사라지고 없다. 그 옆에는 눅눅한 새우깡과 빈 소주병이 들짐승처럼 웅크려 있다. 다시 길을 가려는데, 어디선가 휘파람 소리가 나는 것이다. 가만 들어보니, 그 병을 드나드는 바람의 옷자락이 스치는 소리다. 청보리밭의 따스한 바람처럼 그 소리는 나를 잡아채고 놓아주지 않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