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세자는 혜경궁 홍씨를 원망했던 것일까
역사책방과 함께하는 조선의 역사 탐방
페이스북의 피드를 보다 역사책방이란 이벤트를 알게 됐다. 가이드와 함께 창경궁을 둘러보며 역사를 배우는 투어인데 마침 가까운 곳이기도 하고 내가 사는 동네의 역사를 알아보고 싶어 신청했다.
역사책방 전날에 장소와 시간이 적힌 안내 문자가 왔다. 투어 시작 장소가 창경궁이 아닌 서울의대였는데 왜 서울의대를 먼저 가야 하는지 의문이 들었다. 빨리 궁 안을 구경하고 싶다는 조바심이 생겼지만, 조선 역사를 알려면 서울의대에 있는 옛 건축물을 먼저 봐야 한다는 가이드 말에 참고 따르기로 했다.
서울의대 정문을 지나 안으로 들어가면 문만 남은 옛 터를 볼 수 있다. 그 터는 정조가 화성으로 옮기기 전까지 사도세자의 신주를 모셨던 궁으로, 고종에 이르러 융릉이란 명칭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가이드는 융릉의 위치를 잘 기억하라고 말하며 창경궁으로 이동했다. 그 의미는 창경궁 정전의 뒤편인 왕실이 머물렀던 공간에서 밝혀졌다.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죽은 후 정조는 후에 창경궁 밖에 신주를 모시는 묘를 세웠는데 그 위치는 정조의 어머니인 혜경궁 홍씨가 머물던 경춘전과 일직선 상에 놓여 있어 경춘전에서 멀리서나마 볼 수 있었다고 한다. 정조의 효심이 담긴 것이라고 하나 한편으론 정조가 어머니를 원망하여 한 것이라는 설이 있다.
사도세자가 죽임을 당하게 한 주요 인물이 혜경궁 홍씨 집안이었는데, 혜경궁은 영조에게 정조를 살리는 약조를 받고 사도세자의 죽음을 외면했다. 어릴 적 두 눈으로 지켜본 정조가 혜경궁이 죄책감을 느끼도록 사도세자의 묘가 보이는 경춘전에 모셨던 것이다.
그동안 역사에 무관심하면서 한국엔 해외만큼 볼거리가 없다고 잘못 생각했었다. 역사책방을 간 이후 그 생각이 잘못됐다는 걸 알게 됐다. 꼭 해외가 아니더라도 한국에서도 충분히 멋스러운 건축물을 볼 수 있고, 내가 살고 있는 동네이기에 조선에서 근현대로까지 변화하는 과정이 더욱 의미 있게 다가왔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