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묵(沈默)의 살인자(殺人者)'라고 하면 대부분 '고혈압(高血壓)'을 떠올리지 않을까 한다.
고혈압은 혈액이 동맥 벽에 가하는 압력이 지속적으로 높은 상태를 말한다.
때문에 동맥이 손상되고 심장 발작이나 뇌졸중과 같은 심각한 합병증이 발생할 수도 있는 질환이다.
특히 고혈압의 가장 큰 문제는 평소에 증상이 없다 보니 사람들이 이 질병을 앓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지나칠 수 있다는 점이라고 한다.
그래서 치료를 받거나 특별히 주의를 기울이지 못하다가 어느 날 갑자기 위중한 결과에 미치는 경우가 있기에 고혈압을 '침묵의 살인자'라고 부르는 것이다.
한국인의 대표적 사망 원인에 고혈압성 순환 계통 질환이 자주 포함되는 걸 보면, '침묵의 살인자'가 정말 무서운 병인 것만은 분명한 것 같다.
그런데 이렇게 무서운 고혈압의 별칭(別稱) '침묵(沈默)의 살인자(殺人者)'에는 우리가 흔히 쓰는 단어 하나가 슬그머니 자리하고 있다.
'의견이나 제안 따위를 듣고도 못 들은 척한다'는 의미로 쓰이는 '묵살(默殺)'이 그것이다.
대체적으로 누군가의 의견이나 제안을 묵살할 수 있는 사람은 권력을 가진 지위에 있는 사람이다.
거꾸로 권력관계의 하위에 있는 사람이 상위 권력자의 의견 또는 제안을 묵살하는 경우는 있을 수 없다.
그렇기에 현실 세계에서 묵살(默殺)이란 방법은 분명히 권력을 가진 자만이 행사할 수 있는 행동방식이다.
나는 묵살(默殺)이란 한자어(漢字語)에 '잠잠할 묵(默)'이 쓰인 것은 그렇다고 해도, '죽일 살(殺)'이란 흉흉한 글자가 쓰인 이유가 궁금해졌다.
호기심에 어원(語原)을 찾아보려고 이런저런 문건을 찾던 중 어느 한문학과 교수님이 쓴 글을 읽게 되었다.
"... 묵살(默殺)은 상대에 대한 무시(無視)와 멸시(蔑視)를 포함하며 관계의 단절을 전제한다.
이는 또한 자신의 힘이나 정당성을 過信(과신)하는 한편 상대방의 가치와 능력을 얕잡아보는 결과이기도 하다...." (부산일보 [한자로 보는 문화] 默殺 김성진. 부산대 한문학과 교수)
묵살의 어원에 해당하는 고사를 찾지는 못했지만, 단어에 대한 해설을 살펴보니 '죽일 살(殺)'이란 글자가 쓰이는 게 전혀 어색하지 않겠구나 싶기도 했다.
누군가의 의견을 묵살하는 사람의 입장이 아니라, 누군가에게 묵살당하는 사람의 입장에 감정이입 해본다면 정말 죽고 싶을 만큼 괴로운 경험을 할 수도 있겠구나 생각이 드는 것이다.
누군가 자신을 무시하고 멸시하면서 나의 가치를 얕잡아 본다면 얼마나 괴로운 생각이 들까 말이다.
결국 누군가의 간절한 의견과 제언이 아무렇지 않게 묵살되는 조직은 마치 고혈압에 걸린 사람과도 같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당장은 침묵으로 문제를 감출 수 있겠지만 혈압이 높아지다가 인체에 치명적인 피해가 있는 것처럼
조직 역시도 건강한 제언과 의견을 묵살하다가는 그 압력이 터져 나와 돌이킬 수 없는 피해를 입을 수도 있으니 말이다.
'클린 디젤'이란 선언적 목표로 인해 현실적인 정보를 묵살하던 폭스바겐에선 디젤게이트가 터져 회사의 존립을 걱정하는 수준에 이르렀었다.
경쟁사가 그렇게 큰 홍역을 치르는 것을 보고도 부정한 품질인증 사실이 감춰지던 도요타도 최근에는 역시 부끄러운 치부가 터져 나오고 말았다.
어느 조직을 막론하고 조직 내부의 건강한 비판과 의견 개진을 묵살한다면, 조직 내부에 '침묵의 살인자'가 돌아다니게 된다는 점을 생각들 하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