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사람에게만 다정하게

by 그럼에도
속마음을 말할 사람이 있나요?

속마음을 말할 수 있으려면 내 앞에 있는 사람에 대한 신뢰, 속마음을 말할 어떤 상황과 약간의 용기가 필요하다.


하지만 눈앞의 상대가 보이는 어떤 반응은 대화를 중단시킨다. 언어 외에도 무언의 바디랭귀지이다. 한 번은 싱글로 겪는 어려움을 이야기했을 때, 내 앞의 친구의 얼굴이었다.


육아, 시댁 스트레스라는 피곤함을 나에게 털어놓는다. 한참을 듣던 나는 나도 힘들다는 이야기를 한다. 미혼이라서 겪는 이런저런 현실 고충, 사내에서 유부 대신 업무 떠맡기, 인기 없는 자리에 우선 배치 등등. 그때 기혼 친구 입가에는 미소가 감돈다. 말하지 않아도 어떤 마음을 갖고 있는지 충분히 느껴지는 야릇한 미소와 눈빛.


A 외에도 다른 사람 B, C도 똑같았다. 다들 너는 결혼하지 말라면서 워킹맘의 피곤을 말한다. 생각과는 달리 편안해 보이는 싱글의 삶에도 본인이 감당하지 않는 다른 어려움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순간, 그리고 그 어려움이 본인보다 더 크다고 느꼈을 때, 모종의 우월감을 느낀다. '역시 너보다는 내가 더 낫구나'라는 느낌의 입가의 씰룩거림. 그리고 그다음 말에서 나의 모종의 이런 느낌을 사실로 확인시켜준다.


본인의 신세 한탄에서 갑자기 나에 대한 위로 멘트가 아니면 ‘너는 그럴 수 있겠다~’라는 위로인지 조롱인지 알 수 없는 말이 나왔다. 대화는 그렇게 끝난다. 그리고 나도 A, B, C와의 연락도, 대화도 끝난다. 한국 사회에서 다르다는 것은 틀렸다는 말과 비슷하게 인식된다.


자기 계발에 힘쓰던 시기에 오래 알던 남자 사람 F는 "그냥 결혼이나 해~"라고 말했다. 결혼을 하면 인생의 모든 고민과 문제가 해결되나 보다. 결혼을 해도 문제는 여전한 것 같은데. 결혼을 하지 않은 사람은 사회적으로 신체적으로 미성숙한 사람으로 평가 절하한다. 왜지? 난 당신들에게 피해 준 적 없는데, 놀아달라고 한 적도 없고. 오히려 좀 놀자는 만남 요청을 번번이 거절한 적은 있지만.


한 번은 뉴스에서 새벽 배송으로 목숨을 잃으신 분 기사가 나왔다. 동료와 대화 중에 "나는 되도록 새벽 배송을 시키지 않으려고 한다"라는 한 마디에 동료는 말했다.


"역시 애를 안 낳아봐서 뭘 몰라"라고. 사내에서 젠틀맨의 아이콘이라고 불리는 동료는 그렇게 말하며 피식 웃었다. 난 아이가 없어서인지 그렇게 급박한 배송이 필요한 경우는 거의 없었다. 평소에 미리미리 사두는 습관도 있고, 집 근처에 마트가 3개나 있다. 새벽엔 편의점이 있으니 여하튼 황금상권 앞이라 불편함을 모르고 살고 있다. 그러니 새벽 배송을 시킬 일은 아직까지 없었다. 언젠가 생길 수도 있지만 아직까지는.


대화를 가로막는 이유는 다양하다. 나만 겪는 문제가 있다면 미혼이라는 이유로 이렇게 다른 대우를 받는다는 것이다. 그런 사람들과는 업무 이외에 사적인 이야기는 하지 않는다. 최근에 생긴 나만의 매뉴얼. 선 긋고, 편 가르기를 취미로 하는 사람과 엮이지 않으면 피곤할 일은 없다. 드라마 여주인공처럼 쿨하게 쏘아붙이는 것보다 더 좋은 일은 안 만나면 된다는 것이다.


안 그래도 피곤한 세상, 피곤한 사람들과 더는 엮이고 싶지 않다. 난 그동안 너무 고생했다. 이젠 나를 보호할 차례니까. 충분히 나를 아껴주기로 했다. 좋은 사람에게만 좋은 사람이 되겠다는 나의 다짐이고, 인생 가이드라인이다.


그래서인지 요새는 예전보다 더 밝아졌다. 특별히 더 좋은 일은 없지만 요새는 여러 모로 밝아졌다. 위기도 기회로 보려는 관점은 엄청난 노력의 힘 보다 마음의 여유가 있기에 가능했다. 부자가 된 것도 아니고 믿을만한 그 무엇이 생긴 것도 아니다. 시스템을 바꾸었다. 나라는 사람이 흰색 배경에 있을 때와 노란 배경에 있을 때는 같은 사람이지만 다르게 인식된다. 나도, 타인도.


시스템, 가이드라인. 회사가 소규모에서 대기업으로 성장할수록 신경 쓰고 가장 집중하는 것들이다. 사람의 인생도 그렇다. 인생의 목표, 취향, 관점, 가이드라인이 없다면 헛돌 수밖에 없다. 나이는 먹고, 세상은 변해가는데 언제까지 나를 가내수공업 시절의 모습으로 둘 수는 없으니까.


지금의 나는 그런 시스템을 만들어가는 시기라고 생각한다. 처음엔 취향과 취미를 가지는 시간이라고 생각했다. 시간이 조금 더 쌓여가면서 나는 인생 시스템을 설계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변곡점을 지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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