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댁에 대한 갈등이나 고민은 전혀 없었다. 미국은 결혼에 대해 더없이 쿨한 나라처럼 보인다. 한국에 비해 ~해야 해 하는 관념들이 너무 없어서인지 우리는 미국 가족들에게 부담을 느껴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반면 미둥이들은 한국 가족들과의 관계에서 가끔씩 부담을 느낄 때가 있었을 거다. 우리는 온몸으로 그들을 지켰다. 부모님과 친척들은 어쩌면 서운한 부분이 있었을지도 모르겠지만, 결국 평생을 살게 되고 내 인생에 영향을 끼치는 건 그들이 아닌 내 옆의 이 사람이다.
1년에 한 번 만날까 말까 한 서로의 부모님들과의 관계에 어쩔 때는 죄책감이 들 때도 있었다. 너무 신경 안 쓰는 건 아닐까 하고. 나와 언니는 결혼하고 나서 부모님과의 관계가 더 멀어졌다. 그동안 쓰고 있던 착한 딸의 가면을 조금 더 벗어던졌다. 남편들과의 관계에서 나도 몰랐던 나의 진정한 모습들을 발견하게 되니 더 이상 1초도 가면을 쓸 수가 없어지게 되었다. 타인을 만날 때 빈말은 줄어들고 부모님 사이를 더 좋게 만들기 위해 착한 딸로서 애교 부리던 모습도 줄어들었다. 부모님은 상처를 받으셨겠지만 우리는 더 성장하게 되었다. 서로의 독립을 향해 나아가는 과정인 것 같다. 일평생 가장 잘한 일이 우리를 낳고 기른 것일 부모님은 자녀로부터 독립하게 되고, 딸로서의 역할만 하던 자식들은 이제 새로운 가정을 꾸리려 부모로부터 독립했다. 부모님으로부터 완전한 독립은 아마 부모님이 돌아가시더라도 못하겠지만, 그들의 생각이나 가치관이 우리에게 영향을 덜 주기 시작했다.
하지만 부모님에게는 여전히 귀엽고 사랑스러운 딸 들일 텐데 딸들이 너무 심각하고 진지해지니 우리는 보험인 미둥이들을 끌어들였다. 전화를 하거나 만날 때 미둥이들을 데리고 가면 분위기는 더 풀어졌다. 유창하지 않은 한국어로 “어머니 김치가 세상에서 제일 맛있어요. 아버지 사랑해요” 라고 하면 그 딱딱하던 아빠도 허허 웃음을 터뜨리고 엄마도 아기를 대하듯 “그랬어요?”라며 웃으신다. 한국 사위였으면 이런저런 삶의 조언을 해주시거나 서로 연락도 자주 하고 선물도 주고받으며 조금 더 끈끈한 관계를 맺을 수도 있었겠지만, 실제로 그런 가족들이 한국에 얼마나 많을까 싶다.
솔직한 심정으로 미둥이들이 한국어를 한국인만큼 못했으면 좋겠다. 부모님과 적당한 거리를 둘 수 있어서 나는 다행이라는 생각도 든다. 나중에 시간이 지나면 어떻게 될지 모르겠지만 지금 마음은 그렇다. 자식들에게는 표현하기 힘든 ’사랑한다‘는 낯간지러운 표현도 사위들에게는 “아들 아이러브유” 하며 표현하시는 아버지.
미국도 별반 다를 게 없더라. 아들들에게 깊이 마음을 표현하기에는 너무 복잡하고 심각해져서 표현을 미루던 시어머니도 우리의 유창하지 않은 영어 메시지에 조금은 마음이 가벼워지셨을까. 완벽하지 않고 미성숙한 사람들이 부모가 되었고, 자식들을 너무 사랑하지만 오히려 그래서 쉽게 표현하지 못하는 감정들을 사위나 며느리라는 존재를 통해 조금 더 가볍게 할 수 있는 것 같다. 부모님에게는 표현하기에 용기가 너무 많이 필요하지만 시어머니에게는 더 쉽게 표현할 수 있다. 당신 너무 사느라 고생하셨다고. 언젠가 부모님 눈을 바라보며 진솔하게 진심을 전하는 날이 오면 좋겠다. 남편들이라는 보험 없이도.
결혼을 한다는 건 단순히 사랑하는 두 사람이 만나 결혼이라는 제도에 묶이는 것이 아닌 것 같다. 처음에는 그저 우리끼리 행복하게 살면 그게 결혼이나 다름없지 생각했다. 동거만 하면서 살아도 괜찮다고 생각했지만 국제커플에게 결혼은 꽤나 현실적인 방법이다. 결혼 비자를 받아 함께 살게 되면 훨씬 더 편했다. 5년 전의 우리를 만나게 된다면 우린 정말 강하고 굳건하게 말했을 것이다. “결혼 따위는 안 해. 비혼주의자로 살 거야” 결혼이라는 건 달달하고 행복한 모습보다는 사회에서 결혼을 선택하지 않으면 도태되며 다른 내 주변 사람들에게 악영향을 끼치는 것이라고 생각해 왔다. 특히 한국 사회에서 결혼은 가족과 가족이 묶이는 일이며 부모님에게는 큰 숙제를 끝내는 일인 것 같다. 결혼을 하고 나면 서로의 부모님에게 인사도 자주 드리고 명절이나 생일 또는 제사 같은 일에 참여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불편하다고 생각했다. 어릴 때부터 결혼이라는 제도에 묶이며 너무 많은 자유를 속박당하고 평등하지 않은 광경을 많이 보고 자랐다. 그래서인지 결혼하면 불행하다고 믿게 되었다.
우리가 처음 만나 온갖 주제로 대화를 하기 시작했을 때도 결혼이라는 주제에 대해서 넷다 생각이 없다고 말했었다. 심지어는 사귀기 시작해서 온몸의 직감이 ‘평생 함께 하게 될 것 같다’라고 생각이 들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결혼은 여전히 나에게 경계의 대상이었다. 그런데 코로나 덕분에 1년을 못 만나게 되었고, 중국에서 일하던 미둥이들이 중국 생활에서의 불편함이 많아지자 한국으로 오기로 결정했다. 함께 살기 위해서는 비자가 필수적이었고, 처음에는 유학 비자로 시작했지만 학교를 나가야 했기에 이후에 바로 결혼비자로 전환해 그렇게 갑자기 혼인신고를 하게 되었다. 3년을 연애를 하며 결혼에 대해서 서로의 관념이 많이 바뀌었다. 미둥이도 부모님이 결혼하지 않았었기 때문에 결혼에 대한 생각이나 관념이 전혀 없었다. 그런데 결혼에 대해 우리 넷의 생각이 점차 열리기 시작했다. 평생 서로 함께하자는 유치해 보이는 약속, 그것을 해보고 싶어졌다.
평생 한 사람만을 사랑하며 한 사람과의 관계만 맺을 것을 약속한다는 건 엄청난 책임감이구나 싶었다. 하지만 그 외에 다른 선택지는 아예 생각도 나지 않았기에 우리는 서로 약속했다. 평생 서로를 돌보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