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라온제나 Oct 14. 2023

나는 너의 불안 보호자, 너는 나의 우울 보호자

저희도 남편들도 쌍둥이입니다

10. 나는 너의 불안 보호자, 너는 나의 우울 보호자


나는 자주 우울해한다. 최근 들어 몇 년 전 보다 많이 줄었지만 가끔 우울감이 덮쳐오면 어찌할 도리 없이 무기력해진다. 명상도 하고 요가도 하고 책도 보고 사랑도 하고 내가 좋아하는 일도 다 하고 여행도 다니는데, 이제는 정말 내 인생이 완벽해야 하는데 왜 또 우울할까. 이런 생각이 드는 순간 더 우울해진다.

그럴 때 가만히 집에 와 제프를 안는다. 따뜻한 온기를 전해 받으며 온갖 번잡했던 생각들이 일순간 멈춘다. 머릿속에 조금 전까지 ~해야 되는데 하던 모든 생각들이 다 부질없게 느껴진다. 그래 이 포옹 하나면 나 잘 살고 있는 거지. 하루에 한 번 이상 이런 따뜻한 포옹할 수 있는 나는 복 받은 사람이지.


내가 우울하고 무기력해 있으면 제프가 와서 머리를 들이밀며 내 어깨에 대고 비빈다. 마치 털이 복슬복슬한 대형견 한 마리가 부비부비 하는 것 같다. 반려동물을 키운다면 기분이 이럴까. 갑자기 제프가 전기모기채를 들고 허공에 스윙한다.

내가 물었다. "잡았어?"

"응 내가 방금 니 우울 잡아서 죽였어"

난 정말 초파리를 잡은 줄 알고 물어본 건데 내 우울을 잡아 죽였단다. 사실 이 귀엽고도 신선한 발상은 제프에서 비롯된 게 아니다. 이 글을 읽다 보면 제프만 너무 귀염둥이처럼 느껴질 거 같아서 말해보자면 원래 아이디어는 나로부터 비롯됐다.


나에게 적이 우울이라면 제프의 적은 불안, 초조함이다. 나는 처음에는 초조함의 뜻도 잘 몰랐다. 그런데 감정은 전염이 되는 것일까. 나도 가끔 초조할 때가 생겼다. 초조함은 우울함과는 다르다. 둘 다 마음이 허기진 느낌이 드는 건 같지만 초조할 때는 뱃속 아래부터 쭉 올라오는 답답하면서 꽉 조인 느낌이 있다. 명치 부분이 꽉 조인 듯 답답하다.


제프가 불안하고 초조해할 때 나는 우산을 들었다. 그날은 제프의 불안, 초조함의 강도가 너무 세서 집에서도 충분히 휴식을 못 취하고 뭘 하든 집중하지 못했다. 비가 꽤 오는 날이었지만 난 제프의 손을 잡아끌고 홍제천으로 나갔다. 우리는 그냥 홍제천을 따라 걸었다. 나는 제프에게 들고 있던 우리 둘 우산 빨강, 파랑 우산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제부터 난 너의 초조함 보호자야. 내가 이 우산으로 초조함으로부터 너를 막아줄게. 이얍!"

칼을 빼 든 전사처럼 우산을 들자 제프가 빵 터져 웃으며 너무 고맙다고 했다. 그리고 서로 그림을 그려 휴대폰 잠금 화면으로 설정해 놨다. 언제든 우울과 초조가 마음을 침범하려 할 때 이 그림을 보고 어벤저스 같은 든든함을 느끼라고. 서로에게 마음을 보호해 주려는 작고 사랑스러운 노력들로 우리는 더 단단해지고 있는 중일 것이라 믿는다. 서로의 믿음과 사랑 응원과 격려가 없다면 사람은 진정 성장할 수 있을까.



이전 09화 내가 나를 비난하는데 왜 네가 울먹여?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