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에서 무를 창조하는 무생채무침(feat.참치 통조림)

가장 보통의 레시피 - 소박한 식탁 위 발칙한 잡담들

by 웅숭깊은 라쌤

겨울 무를 칭하는 놀라운 표현이 있다. 동삼 冬蔘. 겨울철 삼이라 불릴 정도로 예로부터 약재 역할을 톡톡히 했던 식재료. 어디 겨울뿐이겠는가. 무는 언제나 무에서 무를 창조한다. 무로 만든 어떤 반찬이든 밥 한 공기를 뚝딱 사라지게 만들기에! 무조림, 무나물, 심지어 무 튀김도 맛이 아주 일품이다. 그리고 부모님 두 분이 일을 나가시고 집이 비어 혼자 밥을 차려 먹었던 어린이 시절에, 내 최고의 밥상은 빨간 무생채무침을 양껏 올린 비빔밥이었다.


어머니의 외삼촌, 그러니까 나에게는 작은 외할아버지? 그 할아버지께선 참치 통조림 회사에서 꽤 직위가 높은 분이셨다. 그리고 난 참치 통조림에 미쳐있는 어린이였고, 지금은 미쳐있는 어른이다. 참치 통조림이 좋았던 이유는 —내가 매우 취약한 부분인— 맵거나 뜨거운 음식의 극단적인 성향을 잠재워주기 때문이었다. 김치에도 참치, 라면에도 참치를 곁들여 먹으면 매운맛과 뜨거움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덕분에 할아버지는 우리 집에 참치 통조림을 곧잘 보내주셨고, 심지어 한번은 크래커에 올려 먹는 양념이 된 참치 통조림 신제품을 출시가 되기도 전에 맛보기로 보내주신 적도 있었다. (그건 좀 별로였다.)

밥은 평소 양의 3분의 2 정도만 공기에 담는다. 고소한 맛을 위해 들기름 살짝. 그리고 참치 통조림을 오픈하여 캔 하나를 싹싹 긁어 모조리 밥 위에 얹는다. 그리고 등장하는 무생채무침. 빨갛게 물든 무생채는 보기만 해도 입맛을 자극하지만, 어린이 혓바닥이 감당하기에 조금 매울 수 있다. 그래서 조합이 필요했다. 참치 기름의 느끼함은 무생채가, 무생채의 매움은 참치가. 그런 다음 밥을 야무지게 비비고 양반김인지 백정김인지 조미김에 싸 먹으면 그 어린이는 늘상 미간을 찌푸렸다. 그야말로 진실의 미간. 그 어린이는 지금도 이 조합에 미간을 찌푸린다.


서당 개가 삼 년이면 풍월을 읊는다는데, 30년 넘게 어머니의 양념을 맛본 내가 그 흉내를 못 내겠나, 라는 생각으로 무생채무침을 만들어보았지만 수십 번을 반복해도 그 맛은 나지 않는다. 그래도 될 때까지 —여전히— 도전 중이다.

마트에서 좋은 무를 고른다. 무를 고르는 기준은 사실 잘 모르니 ‘좋아 보이는’ 무를 고른다. 그리고 적당한 크기로 채를 썬다. 무를 칼질할 정도의 실력은 아니니 채칼을 이용한다. 볼에 담긴 무채를 흐뭇하게 바라보며 간장, 식초, 액젓, 소금, 설탕 그리고 고춧가루를 넣는다. 기본 재료를 때려 넣고, 맛을 보며 간을 조절한다. 먹어보면서 부족한 맛을 채워 넣는 셈. 마지막엔 참기름 살짝, 그리고 깨소금. 아, 양념은 살짝 세게 해야 한다. 냉장고에 넣어두면 나중에 물이 생겨서 싱거워질 수 있으므로. 사실 여기에 대파를 잘게 썰어 넣는 식의 다른 응용이 가능한데, 이건 기호에 따라 알아서 잘 조절하면 될 듯하다. 여하튼 무생채무침은 순식간에 후루룩 완성된다는 장점마저 지녔다.


냉장고에 한 자리를 차지한 무생채무침을 보고 있으면 반찬 걱정이 없어 아주 든든하다. 심지어 월요일 아침, ‘무생채무침에 밥 비벼 먹어야지’라고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아주 쉽게 기상에 성공하는 나 자신을 확인했던 적이 있을 정도다. 월요일보다 힘이 센 무생채무침이라니!


잘 차려진 밥상, 그러니까 값비싼 재료로 채워놓은 고급 음식이 없어도 늘 허기를 채워주는 무생채가 있어 오늘도 하루를 살아낼 수 있다. 소소하지만 든든하고, 간단하지만 만족스러우며, 함께 한다는 사실만으로 월요일 아침을 극복해낼 수 있는 존재. 나도 그런 사람이고 싶다.

내 비록 미천하오나 당신이 원한다면 언제든 짜잔 하고 등장할 수 있는, 당신에게만큼은 쉽고도 쉬운, 울고 싶은 날 온갖 투정을 다 받아줄, 그런 소중한 무생채무침이 될 테니 참치 통조림이여, 어서 내게 와 주길. 그럼 우리의 조합은 아주 완벽할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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