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보통의 레시피 - 소박한 식탁 위 발칙한 잡담들
나의 고3 시절 절친 허헌. (참고로 헌이네 집안 식구들 이름은 모두 외자다. 강아지 이름마저 ‘허둥’이었나? 지금은 결혼해서 셋째까지 출산했는데 단이, 승이, 윤이 모두 이름이 외자다) 졸업 후 심지어 재수 학원까지 같이 갈 정도로 우린 참 끈끈했다. 입대 전 나의 삭발식을 함께 해 준 것도 이 친구였을 정도로 나는 늘 그와 함께였다. 물론 지금은 멀리 떨어져 있지만 늘 마음만은 여전히 함께 하고 있다. 갑자기 생각하니 엄청나게 그립네?
그나저나 허헌은 ―다른 재주도 정말 많긴 했지만― 아카펠라 장인이었다. 그냥 단순히 노래를 잘한다, 정도가 아니라 상대의 음을 듣고 거기에 맞춰주는 능력까지도 지니고 있었다. 음악 쪽으로 나갔어도 대성했을 녀석이다. 그리고 우린 고3 때 그룹을 결성했다. (훗, 나도 노래는 쫌 하는 편이다) 허헌의 ‘허’, 기라성의 ‘기’를 따서 만든 우리 그룹의 이름은 ‘허기’. ‘팬 여러분의 사랑으로 우리의 허기를 채우겠어요’라는 나름의 의미까지 부여했는데 물론 음원을 출시한 적은 없다.
어느 날 허헌은 내게 ‘윔마웹빠’를 반복해보라는 생뚱맞은 부탁을 했다. 무슨 아프리카 전통 부족들이나 사용할 법한 단어를 갑자기, 왜? 그렇지만 허헌의 말에 반박할 필욘 없었다. 늘 옳은 말만 하는 친구였으니까. 그래서 했다, 윔마웹빠를. 그리고 나의 윔마웹빠 위에 그의 웅장한 목소리가 덮여 우린 환상의 하모니를 만들어냈다.
In the jungle, the mighty jungle
The lion sleeps tonight
In the jungle, the quiet jungle
The lion sleeps tonight
-영화 <라이언킹> ost, “The lion sleep tonight” 중
사실 윔마웹빠는 ‘a-weema-weh’이 반복되며 나오는 소리였고, 소리에 소리가 얹어져 하나가 된 그 순간은 실로 경이로웠다. 아무런 악기연주도 없이, 어떠한 음악 재생도 없이 오직 지구인들의 목소리만으로 화려한 멜로디가 완성되는 아카펠라의 매력에 아주 푹 빠진 순간이기도 했다.
고3 아이들의 교실은 언제나 삭막할 것 같지만, 의외로 밝고 활기찰 때가 많다. 가끔은 정말 얘들이 정신줄을 놨나 싶은 기분이 들 때도 있다. 수다를 떨며 해맑게 웃음 짓는 수준이 아니라 ‘왜 이런 짓을 하고 있지?’ 하는 의문이 들 정도랄까? 한 번은 수업 종이 쳐서 온갖 수업 자료를 들고 여학생반 교실에 들어갔는데 아이들이 이상야릇한 말 그대로 괴음 怪音을 내고 있었다. 듣자마자 손에 든 교과서와 프린트물을 전부 놓칠 뻔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들으면 들을수록 괴음이 아닌, 하모니로 느껴지는 게 아닌가! 마치 십여 년 전 그룹 ‘허기’가 노래했던 윔마웹빠가 재림한 듯했다! 그리고 아이들의 외침은 잘 들어보면 나름의 규칙이 있었다.
첫 번째. “밥, 밥 콩밥 - 밥, 밥 초밥”
두 번째. “김, 칫국 김칫국 - 김, 칫국 김칫국”
세 번째. “사이사이사이다 사이사이사이다”
그리고 마지막. “계란말이 계란말이 계란말이 Yo!”
4분의 4박자 속 완벽한 조화가 이뤄진 그 교실에서 나는 아이들이 커다란 하나의 몸뚱이가 되어가는 장면을 목격했다. 아니, 그들은 하나의 악보이자 살아있는 음악이었다! 한참 만에 그들의 하모니가 끝나고 난 뒤 진실의 미간과 함께 정성 어린 박수를 쳐 주었다. 완전 무대를 뒤집어 놓으신 그들을 향해.
음악으로 지구인 모두 하나가 될 수 있음을 고3 시절 절친 허헌과, 정신줄을 놓은 고3 학생들이 알려주었으니 어쩌면 고3, 그러니까 열아홉이란 나이는 지구인 중 가장 어른이 아닐까? 이런 가르침을 전해줄 수 있는 존재는 고3이 아니고서는 절대 될 수가 없다.
아카펠라에 심취한 이후 특히나 계란말이를 만들 때면 늘 나도 모르게 엉덩이를 흔들며 리듬에 몸을 맡기곤 했다. 계란 서너 알을 까서 풀어줄 때도, 갖은 채소를 다져줄 때도, 기름을 살짝 두른 팬에 얇게 계란물을 펼쳐놓을 때도, 적당히 익었을 때 계란을 말다가 조금 찢어져 남은 계란물로 구멍을 메워줄 때도, 완성된 계란말이를 케찹에 찍어 한 입 베어 물었을 때도, 토실토실한 나의 엉덩이는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좌우로 맘껏 흔들렸다! 할 게 없어서 혹은 ‘냉털’을 위해 어쩔 수 없이 만들던 계란말이는 이젠 더는 없다. 계란말이를 만드는 목적은 오직 지구인들의 화합! 그래서 신명이 난다! 흔들어! 엉덩이를 흔들어!
악기도, 어떤 음원을 트는 행위도 우리에겐 필요치 않다. 나와 당신이 존재하는 한 우린 환상의 하모니, 아카펠라 연주를 해낼 수 있으니까. 지구인에게 필요한 건 오직 다른 지구인이다. 당신과의 환상적인 어우러짐을 꿈꾸며, 정신줄을 놓은 고3들을 응원하며, 오늘 저녁엔 힘차게 계란을 말아보련다. 계란말이 계란말이 계란말이 Yo! 계란말이 계란말이 계란말이 Y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