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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날raw로먹는 여자 Jul 19. 2019

또 아파? 대체 내가 왜?!!

요리하면서 철학하는 여자들

또 아파? 대체 내가 왜?  


“건강한 몸에 건강한 정신이 깃든다.” “You are what you eat.”


이 두 문장을 나의 신조로 삼으며 2015년 이후로 더욱 생기 있고 활기차졌다. 15년도 이전의 나는 통통과 뚱뚱 사이를 오가던 존재였다. 체성분 검사를 하면 체지방률은 외관에 비해 높이 나왔고 어릴 적부터 잔병치레가 잦았다. 체지방률이 높은 만큼 혈액순환도 잘 안 되고 때론 손발이 저려 자다 깬 적도 많았다. 무엇보다 나를 괴롭힌 건 다름 아닌 염증이었다. 친구들이 서서히 취업준비를 하며 사회에 뛰어들 때 나는 염증 앞에 모든 것을 내려놓았다. 


가장 아팠던 때를 떠올려 글을 쓰기란 기억력으로나 감정적으로나 쉽지 않다. 


충격과 괴로움의 시기였기에 기억 속 장면들이 뜨문뜨문 연결되어 있을 뿐이다. 나는 20대에 들어서면서 소화기가 더 약해졌다. 몸과 대화를 할 수 있다면 내 몸에게 ‘대체 얼마나 아픈거냐’라며 묻고 싶었다. 나는 탄수화물 폭탄 메뉴를 주로 선택했었고 디저트와 커피류를 즐겼다. 술도 마실 수 있다면 꼬박꼬박 마셨던 듯하다. 이렇게 실컷 즐기곤 했는데 잠들기 전에 만약 속이 거북하면 새벽 늦게까지 온몸을 마사지하고 트름을 해야지만 마음편히 잘 수 있었다. 물론 이 버릇도 장염이 잦아지며 생긴 버릇이었다. 몸과 음식에 대해 조금이라도 배우고 알아가는 지금으로써 나는 염증의 원인을 음식으로 꼽는다. 맛집투어는 은밀하게 나를 염증투어의 길로 인도했다. 염증은 장염만이 아니었다. 내 인생을 통틀어 건강사에 밑바닥을 내리친 것이 장염이었고 그 외에 나열하자면 염증이 드러난 부위와 증상의 정도는 아주 다양했다.


대학병원 응급실이 내 장염 해결책의 첫 장소였다. 링거를 맞았고 다음날 조금 나아져서 약간의 께름칙함을 안고 집에 돌아왔다. 하지만 밤늦게 다시 설사가 시작되었고 토는 엎친 데 덮친 격이었다. 분수처럼 내뿜는 토였는데 몸이 나에게 “괴로워!! 괴롭다고!!”라며 고래고래 소리치는 듯했다. 부모님도 놀라셨고 입원 가능한 병원을 찾아 다시 링거를 맞았다. 의사에게 상황을 설명했지만 돌아오는 답은 똑같았다. “설사가 멎을 때까지 일단 기다리세요.” 도무지 영문을 알 수 없어 답답함이 계속 이어져갔다.


나는 아파서 병원에 다녀오면 조금 우울해지곤 한다. 이유는 두 가지다. ‘또 아파서’ 그리고 ‘대체 왜?’. 내가 자주 갔던 내과, 가정의학과, 안과, 이비인후과 등 병원의 의사들은 정기모임을 가지나보다. 모임 내용은 이렇다. “그 환자가 오면 아무문제 없다고 얘기해야 해!”라고 말이다. 의사소견을 빌리자면 내 증상은 정상이고, 아무 문제 없고, 단지 스트레스 때문이다.


병실 침대에 누워 생각했다. 먹고 싶은 음식도 못 먹고 아픈 배는 내 마음을 몰라주는 것 같아 정말 서운하고 억울했다. 울음이 터져나왔다. 하지만 우는 것도 잠시, 너무 힘들고 기가 빨려서 바로 멈추었다. 목이 말라서 물을 마시고 싶었다. 앞에 물병이 있길래 뚜껑을 따려고 했더니 손에 힘이 없어서 포기했다. 그 모습을 본 간호사는 나에게 “물 드시면 안 돼요. 입에 머금는 것도 금지예요”라고 했고 내 물을 가져가 버렸다. 


바늘을 꽂은 손등이 살살 아파왔다. 우유색깔의 영양제와 링거 하나를 꾸역꾸역 맞고 있는데 어느 순간 손등이 엄청나게 부어올랐다. 간호사는 바늘을 빼 다른 곳에 놓으려 했지만 매번 실패했다. 영양제 바늘이라서 바늘은 일반 링거보다 구멍이 컸고 더 길었다. 그 바늘로 내 팔과 손등을 쑤신 게 6번인가 그랬다. 간호사는 나에게 주사를 맞기 싫어하면 혈관이 엄청 도망다닌다고 했다. 핑계로 밖에 안들렸다. 그 순간만큼은 간호사를 미워했다. 결국 손등이 아닌 다른 곳에 바늘을 꽂았다.


그 후에도 설사는 안 멈췄고 열도 심해졌다. 결국 큰 병원으로 옮겼다. 대학병원보다 작은 사설병원에 입원을 했고 나도 지칠대로 지쳐버렸다. 정신이 혼미해졌고 열이 40도까지 올랐다고 한다

.

내 몸이 더 이상 내 소유가 아니라는 생각을 했다. 무언가 마음을 다 잡고 시작하려고만 하면 건강이 내 발목을 잡았다. 원인을 알 수 없는 피부 발진과 두드러기, 결막염으로 저하된 시력, 한쪽 다리가 마비된 거 같은 순간, 세상이 빙빙돌아 걷기조차 어려운 증상, 기상 후 손끝 피부 쪼그라듦, 질기도록 떨어지지 않던 독감, 아무리 자도 풀리지 않는 근육 뭉침, 소화불량, 복부팽만감, 기본 5-6개의 두피 뾰루지, 몸살, 이유 없는 무기력증, 물러지는 손톱, 눈에 띄게 심해진 머리카락 갈라짐, 손발 차가움, 혈액순환문제, 부종 등 몸에 일어나는 모든 증상을 혐오했다.


‘자기 몸 혐오시간’을 충분히 보내던 쯔음 검사결과가 나왔다.



 의사는 희망찬 목소리로 “원인을 찾았습니다!”라며 내 병실로 달려왔다. 몸에 고름이 차 있어서 계속 아팠던 거였다. 고름이라니! 정말 어이가 없었다. 게다가 내과도 아니고 가정의학과 의사였다. 응급수술을 바로 진행했고 나는 수치스러운 수술을 마치고 3일간 혈변을 봤고 피를 토해냈다. 

 

나이가 어린 사람은 고름이 쉽게 차지 않는다고 한다. 노인이나 남자의 경우가 젊은 여성보다는 고름이 좀 더 잘 차는 환경인데, 나는 몸이 아주 약해져 있었고 염증수치는 2000이라고 했다. 재검사를 받았고 염증수치는 모두 가라앉았다. 점점 링거로부터 자유로워졌고 어느 날 흉터를 세어보았는데 내 손등에는 12개의 바늘자국이 있었다. 거의 한 달간 병져 누워있었기 때문에 체중은 7kg 정도가 빠졌고 걷는 것 또한 80세 노인과 같았다. 마지막 진료를 받은 날이었다. 의사는 나에게 2달 동안은 요양하듯 지내야 할 거라고 했다. ‘요양’이라는 단어를 20대 중반에 몸으로 경험했다. 물 컵 하나 한 손으로 들지 못했고 화장실에 가려면 기어서 가야했다. 언제 한 번은 기를 쓰고 일어났는데 첫 걸음마 떼는 기분이 이런건가 싶을 정도였다. 할 수 있는 일은 부축을 받아 걷거나 계단 오르내리는 게 나의 최선이었다.


퇴원 후 집에서 시간을 보내며 안락한 생활을 이어나갔다. 베란다 창밖으로 펼쳐진 파아란 하늘과 키 큰 나무 사이로 지나가는 바람흔적, 바람에 흩날리는 작은 새 소리, 그야말로 요양은 푸르디 젊은 나에게 최고의 특혜를 안겨주었다. 자연을 더 생각하고 아끼게 되면서 내 마음에는 진정으로 건강하고 싶다는 희망이 싹트기 시작했다. 비오는 날엔 부침개, 식사 후엔 커피와 케이크 같은 남들 다 하는 식사법이 나에겐 더 이상 의미가 없어졌다.


여러 가지 음식을 한꺼번에 식사하는 것은 왠만하면 피하고 있다. 그리고 소화가 될 때까지 기다리고 배고파지면 다음 끼니를 해결했다. 술은 그 당시 종류별로 마셔보길 참 잘한 것 같다. 늦바람보다는 낫다. 요즘에는 맥주나 와인, 마셔봤자 한달에 두어번이다. 이제 감기에 들면 3일이면 낫고 쉽게 걸리지도 않는다. 그만큼 몸 관리를 잘해왔단 뜻이다. 몸이 좀 더 좋아지길 바라며 침도 몇 달간 맞았다. 주 4회는 꼭 1시간씩 산책을 했다. 이후 더 나은 건강을 위해 근육을 키웠고, 3kg의 근육량을 얻었다. 운동이 주는 에너지 덕분에 나는 더 밝아졌다.


2017년 초 자연식물식을 하면서 내 몸은 더 강해졌다. 한 번을 크게 아파보고 나니 식사법과 영양에 대해 알고 싶어졌다. 하비 다이아몬드, 존 맥두걸, 콜린캠벨의 책을 총 7권을 사서 읽었다. 고탄수 저지방식이 나의 면역을 지켜준다고 믿고 있다. 최소한의 조리와 양념으로 식사를 이어갔다. 면역력은 장의 건강과 직결되는데 소화도 잘 되고 배변활동도 좋아지면서 장내세포가 더 촘촘해진 것 같은 기분이었다. 어릴 적 식습관을 완전히 바꾸진 않았지만 채소와 과일 비율을 높였다. 외식은 즐기지 않는다. 건강은 품질 좋은 재료를 직접 구하는 데서부터 시작된다. 마트나 편의점보다는 시장이 더 좋다. 내 몸에 맞는 식사법으로 요리하는 것이 큰 행복이다. 로푸드를 배우고 채식베이킹을 알아가며, Whole food plant based에 더 큰 매력을 느꼈다. 


한국로푸드협회를 통해 정말 좋은 것을 알아냈으니 앞으로 해야할 일은 3가지다. 첫 째 유지하고, 둘 째 지속하고, 셋 째 꾸준히 이어나가는 것이다.



위 이야기는 로푸드팜에서 로푸드지도자과정을 수료하신 선생님이 쓰신 자신만의 이야기가 진솔하게 담긴 글입니다. 나의 경험들을 용기 있게 나눈 다는 것은  타인에게 어떤 방식으로든 영향을 줍니다.

 그것이 불교에서 말하는 보시와 같다고 합니다. 어려운 이야기 꾹꾹담아 써주신 선생님께 감사드리고 늘 통통 밝은 분위기를 주시는 귀엽고 예쁜 선생님을 늘 응원하는 마음으로 감사함을 담습니다. 




요리하면서 철학하는 여자의공간

http://rawfoodfarm.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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