뭔가 거창하게 다시 시작한 듯한 브런치. 하지만 마음은 그 허울보다 편안하다. 진솔한 이야기를 써 내려가보고 싶어 에세이를 쓰기 시작해 본다.
삶에서 직접 우러나오는 생각들로 이뤄진 에세이야말로 체험 삶의 현장이 아닐까.
이윤주 작가님의 책 <어떻게 쓰지 않을 수 있겠어요>를 보다 문득 생각했다. 에세이가 이렇게 재밌고도 공감되는 이야기구나. 나와 비슷한 사람이 이렇듯 생생하게 삶을 살아내고 있구나.
이젠 글쓰기가 습관이 됐다. 의식적으로 습관을 만든 것이 아니라 저절로 형성이 되어 버렸다. 쓰지 않을 수 없어 쓰게 됐고, 쓰지 않을 수 없는 순간들이 자주 다가와 나를 계속 두드렸다.
8년 전 취직을 하고, 6년 전 결혼을 하고, 5년 전 첫째 아이, 그리고 2년 전 둘째 아이가 생겼다. 나는 순식간에 남편이 되었고, 아빠가 되었다.
뭐든 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현실은 그리 쉽지만은 않았다.
나의 강인한 인내심으로 인해 결혼 생활이 참 쉬울 줄 알았다. 육아는 뭐 아무것도 아닌 줄 알았다.
타이슨의 대표적인 명언이 있다.
누구나 그럴싸한 계획을 갖고 있다.
쳐 맞기 전까지는.
참을성에 대한 나의 믿음과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은 링 위에 오르자 처참하게 얻어터졌다. 약하디 약한 정신력과 체력은 전장에서 어김없이 드러났고 숨겨왔던 동물적인 모습도 여지없이 보였다.
난 이성적이고 차분한 사람인 줄로만 알았다. 그렇게 생각했던 게 어찌 보면 당연했다. 이렇다 할 어려움을 겪어보지 않았으니까.
사람은 고난을 겪어 보면 본모습이 나온다. 사실 어제도 버럭. 짐승 같은 하이드가 모습을 드러낼 뻔했다.
이렇게 글을 쓰고 나를 바라보지 않았으면 나는 그대로 짐승으로 살았을지도 모른다. 이젠 글쓰기가 매일 복용해야만 하는 진통제와도 같아졌다.
짐승 같은 마음이 언어가 되면 그 짐승은 나를 잡아 삼키지 못한다.
슬픔은 나누면 반이 되고 기쁨은 나누면 배가 된다고 한다. 이 말은 듣는 대상에 따라 다르다. 아무리 친한 친구나 심지어 가족이더라도 어떤 사람들에겐 전해지는 기쁨이 질투심으로 작용한다.
슬픔도 마찬가지다. 반이 되지 않고 그저 부정적인 감정이 전염만 될 수도 있는 노릇이다.
하지만 그 대상이 하얀 백지일 경우 달라진다.
겉으로 보기엔 분명 주고받는 대화가 없다. 하지만 글을 쓰는 사람들은 대부분 안다. 내가 글을 쓰면서 말을 걸고 글이 다시 나에게로 말을 건넨다.
타인에게는 보이지 않는 대화이기에 그 깊이가 꽤 깊다.
깊은 대화는 솔직함이 드러난다. 온전한 나를 마주한다. 본연의 나를, 깊숙이 존재한 나를 밖으로 잠시 내놓는다. 드러난 나를 유심히 살피고 관찰하다 끝내 보듬어 주고는 다시 안으로 고이 들여놓는다.
그렇게 오늘도 글과 깊은 대화를 한다.
짐승이 아닌 사람으로 살아가기 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