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처음 만난 건 7월 17일 여름이었다. 제헌절이었다. 그날은 비가 억수로 내렸다. 우리가 가려던 은하수 다방은 문을 닫았다고 했다. 이왕 비 오는 김에 동동주에 파전이나 먹죠. 네가 말했다. 실없는 이야기를 하다가 흥이 올랐다. 2차로 근처 바에 가자고 했다. 이동하는 동안 너는 내게 우산을 씌어줬다. 종종 팔이 스쳤다. 꿉꿉한 공기와 술을 먹어서 벌겋게 데워진 내 살갗에, 희고, 서늘한 네 팔이 닿았다. 지금까지도 너에게 고백한 적은 없지만 사실 나는 그때 네게 사랑에 빠졌었다.
하지만 난 네가 언제 나를 좋아하게 되었는지 정확하게 알고 있다. 2차로 간 바에서 말도 안 하고 시선을 마주쳤을 때였다. 몇 분을 내 눈만 바라보던 네가 말했다. 내가 초면에 욕먹을 것 알지만 키스해도 돼요? 그 말을 정확히 기억한다. 왜냐하면 내가 대답하기도 전에 네가 키스를 했기 때문에.
그렇게 우리는 만나기 시작했다. 사실 그때의 파편적인 일상은 하도 오래되어 거의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이미지가 뜨문뜨문 남아있어, 너는 여름의 짙고 서늘한 수목을 닮았던 기억이 있다. 웃을 때의 입술선, 가로수 녹음이 반쯤 그리워진 얼굴. 너는 성격도 건조했다. 꼭 필요한 말밖에는 하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말해주지 않는 너를 가늠하는 방법을 배웠다. 네가 좋아하던 음악과 취향 너머로 왜 이런 것들을 좋아할까 학습했다. 그때 분명 내 안에 네가 이식되었다. 죽을 때까지 떼어지지 않을.
흔한 연애처럼 우리는 가끔 싸웠고 가끔 화해했다. 너는 종종 말했다. 같이 살게 되면, 레몬 띄운 진 토닉을 같이 만들어 먹자. 그때 당시의 나는 그것이 네가 할 수 있는 최선의 표현이라는 것을 미처 몰랐다. 나는 낭만을 원했지만 그러기엔 네 인생은 너무나 지리했다. 네게 진 토닉 이상을 바랄 수 있는 상황이라는 걸 미처 몰랐다. 너는 고독했고 나는 외로웠다.
우리는 곧 헤어졌다. 다시 만날 수 있을까란 나의 질문에 너는 가정법은 의미가 없다고 말했다. 네 말버릇이었다. 나는 그 말을 곧바로 학습했다. 이별 후 할 일은 많았다. 가끔 새벽마다 우는 것 빼곤 살아갈 만했다. 나는 직장을 다니고 해외를 갔고 다른 사람을 만났다. 프러포즈를 받았을 때 순간적으로 네 생각이 났지만 가정법은 의미가 없었다. 전후 사정이 복잡하지만 내 약혼은 파국을 맞았다. 모든 것을 잃었다. 몇 년 만에 용기를 내서 네게 연락을 했다. 네 목소리를 듣는 순간 나는 몇 년의 이야기를 통곡처럼 말했다. 너는 대답도 하지 않다가 끝에 말했다.
우리 어디론가 같이 여행가지 않을래
그날부터 우리는 메일을 주고받으며 여행 계획을 짰다. 탄중아루 해변을 가기로 했다. 너는 워터 슈즈를 샀다고 회신을 보내왔다. 우리는 결국 코타키나발루에 가지 못했다. 대신에 나는 한국으로 돌아왔다. 우리는 해변이 아닌 서울 한복판 카페에서 다시 만났다.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 네가 말했다. 나는 근본적으로 연애가, 결혼이 맞지 않는 사람인 것 같다고. 너를 만나서 알게 된 것 같다고. 그러니 혼자서 사는 삶도 나쁘지 않은 것 같다고. 나는 너를 만나고 연애에서 얻을 수 있는 고저는 다 겪었으니 더 이상 하고 싶지 않다고. 그 말을 듣고 내가 진심으로 사과했다. 내가 너무 어린애 같았지. 너는 나보다 7살이 많았다. 네가 대답했다. 그래서 좋은 것도 있었어. 나는 그냥 웃었다.
사실은, 사실은, 사실은 아직도 내 안에는 네가 살아있다. 나이를 들어가며 너와 비슷한 궤적을 밟을 때마다, 네가 침묵 속에 숨겼던 슬픔과 고민을 종종 뒤늦게 알아차린다. 내가 너보다 더 늦게 태어나서 미안하다. 내가 너를 사랑했기 때문에 오히려 가장 먼 타인이었던 것도 미안하다. 나는 나름대로 내내 너를 가늠하려 애썼지만, 그 과정에 이기심이란 불순물이 껴 있었다. 그것도 잘못했다. 지금도 너를 낭만적으로 소비해서 미안하다. 7월 17일 날 너를 만나서 미안하다. 설레서 미안하다. 아니다. 내가, 모조리, 잘못했다. 내가 나라서 정말 잘못했다.
그러니 너는 다시 사랑을 하고 누군가와 결혼 생각도 해라. 누군가에게 나를 욕해도 좋다. 가정법은 의미가 없지만, 소원을 빌 수 있다면 나는 우리의 연애 시작으로 돌아가 너를 만나지 않을 것이다. 요즘 네가 누군가를 만난다는 말을 들었다. 축하한다. 결국 코타키나발루에는 나 혼자 갈 것이니까.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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