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네팔에서의 단상들
3.1
반나절 정도 고민하다 덜컥 구매한 비행기 티켓.
검색창에 목적지를 ‘anywhere’로 설정해 놓고 검색을 누르니 카트만두가 눈에 띈다.
올 초에 했던 업무 중 네팔에 다녀온 중학생들의 글을 교열했던 적이 있다.
그 덕에 작업하는 내내 네팔에 대한 호기심이 커졌는데 마침 눈이 마주친 것이다.
지난 몇 년 동안 체력도, 마인드도, 성격도 은근하게 바뀌었을 내가
오랜만에 떠나는 낯선 곳에서의 여행을 어떻게 마주하고 채워갈지 궁금해졌다.
잠시 잊고 살던 행복한 에너지들을 마음껏 꺼내 쓰고 오기를.
3.2
시간이 없어서, 돈이 없어서, 생각이 많아서와 같은 애매한 핑계들은
머릿속에서 잠시 잊어버리기로 했다.
사실 핑계가 있든 없든 늘 애매한 건 마찬가지 었기에.
몇 안 되는 나의 특기 중 하나인 ‘일단 움직이자’로 향한다.
최근엔 산만한 마음과 고요한 마음 사이를 유유히 오간다.
단지 해외로 나가고 싶다는 것보다 낯선 장소와 시간 속에 다시 한번 나를 던져 놓음으로써
무엇을 찾고, 어떤 균형을 가지게 될지가 궁금했던 것이다.
말이 통하지 않음에서 오는 침묵, 마음으로 오가는 대화,
나 자신에게 집중하여 나아갈 수 있는 환경을 찾아 잠시나마 떠난다.
3.5
언젠가의 나는 입버릇처럼 “나는 원래 ~한 사람이야.”와 같은 말을 자주 내뱉었다.
아직도 스스로를 알아갈 때마다 매번 새로운데
그때 당시의 나는 나를 얼마나 알았기에 그런 말을 습관처럼 했을까.
아마 몰라서 그랬던 게 분명하다.
한두 번의 경험 혹은 지극히 개인적인 시선에서 정의 내려진 말들이
생각보다 삶에 끼치는 영향력이 컸음을 뒤늦게 깨닫는다.
섣부른 판단과 확신을 내리기보다 더 중요한 것은 꾸준히 나를 알아가는 것과,
그런 나를 지혜롭게 이끌어갈 수 있는 마음을 찾아가는 것이었음을.
스스로가 정의 내린 모습에서 부지런히 문을 열고 나와야겠다는 생각이 드는 날.
3.6
갑작스레 온 얼굴이 빨갛게 뒤집어졌다.
살아오는 동안 마주했던 얼굴 중 손에 꼽을 정도로 심하게.
먹는 것과 바르는 것, 마음 상태까지 되돌아보지만 오히려 좋은 것들만 취한 시기였다.
화상이라도 입은 것처럼 타오르는 얼굴이 당황스럽다.
저녁이 되도록 가라앉지 않는 얼굴을 보며 하나둘씩 외면했던 이유가 떠오른다.
너무 자주, 가깝게 지낸 히터를 원인으로 지목해 보다가도
결국엔 내가 돌봐주지 못한 몸과 마음의 구석구석에 먼지가 쌓였음을 인정하게 되었다.
날이 갈수록 더 솔직하고 빠르게 반응을 보이는 몸과 마음.
이 기세를 몰아 남아있는 불순물을 걸러내듯 뱉어낼 것은 뱉어내며 비워지길 기다려 볼 수밖에.
3.7
그동안 나는 어떻게 변했을까. 여전한 것은 무엇일까.
낯선 곳에서 만나게 될 모습이 벌써부터 궁금해진다.
예전과 달라진 식성과 체력, 그리고 성격과 몇 가지의 가치관들.
안팎의 조각들이 사라지고 새롭게 생기고를 반복하며 지금의 내가 되었다.
그렇게 흘러온 나를 모험의 세계로 또다시 이끈다.
혼자 떠날 수 있는 이 소중한 여행이 부디 평온하고 아름답게 채워지길 바라면서.
3.8
나는 아직도 모든 걸 내려놓고 세상을 유영할 만큼의 용기가 없는 걸까.
스치듯 지나가는 사람들과 자유와 행복을 함께 나누고 홀연히 떠나는 삶을 상상한다.
무엇을 좋아하기에, 무엇을 오랫동안 안고 가고 싶기에
이토록 신중히 골몰하며 지금 이 순간을 보내고 있는 걸까.
“풀지 못한 숙제를 왜 엄한 괴담에서 찾아.
자기 자신에게서 찾아야지.”
/ 영화 '카오산 탱고'
넵.
3.9
어쩌면 나는 이미 여행 중이다.
일상이 담긴 이곳에서든, 낯설다고 착각하는 어딘가에서든.
지금 있는 곳에 나의 존재를 부디 편안하게 놓아주자.
예전보다 나아진 것들이 분명히 있다.
3.10
캠핑의자 하나와 따뜻한 커피 한잔, 책 한 권을 챙겨 집 근처 산으로 향했다.
등산 대신 한적한 어딘가에 자리를 잡고 앉아 산을 그저 감상한다.
손에서 멀어졌던 책을 오랜만에 다시 읽고, 순간을 유유히 느끼는 연습을 했다.
지금의 나에겐 등산보다 눈앞의 상황을 느긋하게 마주하는 연습이 필요했기에.
무언가에 자꾸만 끌려가지 않기를 간절히 원한다.
좋은 에너지를 채우기 위해 오늘처럼 멍하니 자연을 바라보는 시간이 필요하다.
뭔가를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뭔가를 조용히 찾기 위해 자연 속에 느슨하게 파묻혀 기다려본다.
요란할 만큼 요동치던 감정도 다스리면서.
스스로가 지닌 성질을 무작정 지우기보다는 잘 다룰 수 있는 길이 있지 않을까.
3.11
의도하지 않아도 지난 시간들이 문득 떠오를 때가 있다.
그때마다 슬픔이 앞서 나타나기보다 옅은 미소를 지으며 덤덤해질 때가 부지런히 올 거라 믿는다.
겉으로만 그런 게 아닌, 속의 속까지.
오늘 문득
흙내음과 나무향, 맑은 공기가 어우러지는 듯한 느낌의 사람이 되고 싶어졌다.
3.12
몇 시간째 이어지는 이 상황을 조금 떨어져 지켜보며 깨달았다.
화는 화를 부르고, 고요함은 고요함을 부른다는 것을.
해결될 일은 해결될 것이고,
어려울 것 같은 일은 잠시라도 한발 물러나 차분히 바라봐야겠다는 것을.
해결방법이 다가오지 않는 건 떠나보낼 수밖에 없다는 것도.
주변의 상황이나 기운이 아무리 혼잡하여도 그 속에서
내가 흔들리지 않는 것에 집중할 수 있기를 다시 한번 기도한다.
3.13
어쩌다 보니 옆자리에 앉은 네팔인과 꽤 많은 대화를 나누게 됐는데 그와의 대화가
인상 깊어 간단히 옮겨 둔다.
“ 계속 나아가고, 계속 울고, 계속 보고, 계속 배워야 해.
요가든 뭐든 하나만 파는 건 좋지 않아.
다른 것들과 어우러져야 더 오래, 더 제대로 할 수 있어.
석가모니가 태어날 때 요가 기술을 먼저 가지고 있던 게 아니야.
다만 명상을 했을 뿐.
타인을 따라가는 것보다 나 자신을 따라가야 해.
마음과 몸을 먼저 다스린 다음 기술이나 일에 다가가야 해. ”
3. 15
지구가 무너졌다 다시 생기면 이런 모습일까라는 생각을 할 정도로 사방이 황폐하다.
느린 속도로 나름의 방식을 따르며 재건 중인 산속의 마을들을 지나치며 조용한 배움을 얻었던 시간.
비포장도로를 넘어 생사의 갈림길 같은 곳을 한참 동안 달리다 보니
시간은 몇 배 더 걸리지만 느리게 갈 수 있는 이 상황이
오히려 더 많이 보고 들을 수 있는 기회인 것만 같다.
3.16.
이곳에선 어딜 가나 유난히 많이 보이는 단어들이 있다.
PEACE (평화)
HEAVEN (천국)
PIGEON (비둘기)
VEGAN (비건)
YOGA (요가)
단어들이 선사하는 힘을 온몸으로 안아 든다.
이곳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될 자유를 나에게 선사해야지.
3.17
한국에서도 그랬지만 낯선 곳으로 떠나오니 더욱더 감사한 것들이 많다.
기온과 음식이 잘 맞는 것
아픈 곳 없이 잘 지내는 것
호숫가에 앉아 일몰을 감상할 수 있는 순간이 주어진 것
‘나’를 조금씩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
튀어 오르거나 불편한 마음 없이 그저 머물 수 있는 것
어느 바(BAR)에 앉아 사장님에게 과하지 않은 친절함이 주는 편안함을 배운다.
순간의 가치로움을 느끼게 해주는 곳.
모든 곳에 길이 있고, 언제나 나에게 필요한 선택지가 주어질 거라는 확신이 짙어진다.
3.18
앞으로만 하염없이 걷던 어제와 달리 오늘은 불현듯 반대 방향으로 발길을 돌렸다.
정반대의 분위기를 가진 마을이 나타난다.
계획에 없던 짧은 트레킹을 하고, 아무도 없는 길을 걸으며 새로운 경험을 했다.
자연과 나 자신으로부터 끊임없이 용기와 확신을 끌어당기면서.
드문드문 만나는 산속의 사람들이 안내자가 되어주었고,
눈앞의 상황에 집중하게 되는 힘을 느끼며 다시 한번 여행을 사랑하게 되었다.
평소라면 쉽게 포기했을, 외면했을 상황에 주저 없이 도전해 보게 되는 순간들.
그 과정에서 오늘도 무사히 나를 지켜주고 인도해 줬을 많은 존재들에게 감사하며.
3.19
히말라야 산자락의 어느 마을에 머물며 요가 리트릿을 시작했다.
마을에 도착하기 전날까지 산불이 크게 일어났다 한다.
그 덕에 방안의 침대와 몇 안 되는 가구, 천장과 바닥은 검은 재로 가득 덮여 있다.
대충이나마 쓸고 닦아봤지만 잠시 나갔다 오면 또다시 검은 재로 가득한 방을 보며
이 상황을 어떻게 이해하면 좋을까 싶다.
큰맘 먹고 예약한 생애 첫 요가 리트릿이니 당황스럽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더 나은 것과 덜한 것을 굳이 나누며 살 필요는 없다는 성인들의 말을 따르기엔
나는 켜켜이 쌓여온 관습과 환경이 남아있기에.
차선책으로 겨우 방을 바꿨으나 1인 1실이었던 조건이 2인 1실이 되었다.
네덜란드에서 온 여행자와 한 방을 쓰게 되었는데그녀와 나는 이것마저 감사할 정도였다.
좀 전의 방이 프라이버시와 뷰가 더 좋았음에도 검은 재를 피해 들어온 이 방이
가장 좋은 곳으로 느껴졌기 때문에.
마음먹기에 따라, 상황에 따라 완전히 다르게 보일 수 있음을 체감한 순간.
방을 바꿨음에도 마을 전체에 남아있는 연기와 잿가루가 여전히 콧구멍을 간지럽힌다.
게다가 유럽 각국에서 온 다른 멤버들과 나의 짧은 영어가 주는 소통의 한계는
우리를 저절로 과묵하게 만든다.
그럼에도 지금 이 순간, 이곳에서조차 나에게 필요한 무언가가 존재하고 있다.
몸은 여전히 건강하게 잘 따라와 주고 있으며,
태양은 이 모든 것에 개의치 않고 잘만 떠 있다.
흥미로운 이 상황을 그저 그렇게 받아들이는 일만 남았을 뿐.
3.20
어제의 당황이 무색할 정도로 깊고 편안한 밤을 잤다.
자고 일어나니 신기할 정도로 모든 게 만족스럽고 괜찮아졌다.
혼자였으면 은근슬쩍 넘어갔을 아침요가도 했고,
챙겨 먹지 않던 아침식사도 이곳에서 키운 유기농 재료들로 아주 맛있게 먹었다.
어색한 것은 어색한 대로,
마음에 드는 것은 마음에 드는 대로 내버려 두는 시간들.
인터넷 연결이 잘 되지 않는 지역이라 오히려 책을 찾게 된다.
산불로 인해 어디가 길인지도 모를 만큼 사방이 뿌연 곳에서 태연하게 오늘을 이어가는
마을 사람들이 인상 깊다.
곧 다시 울창해질 거라 유쾌하게 말하는 모습을 보며 그들의 단단함을 배운다.
3.21
한가함을 누리는 날들이 이어질수록
무엇을 얻어야 할까에 대한 괜한 강박과 의문이 든다.
자유를 선사하기로 한 나의 다짐은 자꾸만 어디로 가는 걸까.
아무도, 아무것도 뭐라 한 적이 없는데 마음 한편에는
반어적인 질문들과 옅은 의무감이 아직도 남아있다.
아무래도 산책을 더 많이 해야겠다.
3.22
갑자기 쏟아지던 비를 거의 맞지 않았다. 마침 마주친 거대한 나무 덕분에.
오늘도 이렇게 나무에게 신세를 진다.
몸의 흐름을 따라가기.
마음먹기에 따라 시시때때로 모든 게 달리 느껴지는 게 선명하게 다가온다.
지금만큼은 외부가 아닌 내부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집중해 본다.
속도도 전혀 중요하지 않다.
이렇게 몇 주를 지내보니 신기하게도
내 안에서 사라지는 것들과 드러나는 것들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한다.
얼마나 이어질지 모를 이번 여행에서 내가 놓아주어야 할 것과 채우게 될 것들을
하나씩 눈치채고 있는 요즘.
3.23
낯선 곳에서 길을 잃지 않고 무사히 나아갈 수 있는 건 단순히 운이 좋아서라기보다
누군가의 도움 혹은 무언가의 안내가 있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혼자 걷고 있다 해서 그게 전부가 아님을,
나 또한 내가 가진 것들을 최대한 활용해 도움이 필요한 모든 곳에 내어놓고 싶다는
다짐을 하게 된 날.
비록 반짝이거나 강력하진 않더라도 말 한마디, 표정 하나가 주는 힘이
결코 작지 않음을 깨달았기에.
짧은 시간이었지만 산을 만날 때마다 늘 감사한 것들이 많아진다.
비를 막아주는 나무, 안전히 걸을 수 있는 흙길, 오며 가며 서로의 안녕을 비는 사람들,
무사함을 빌게 되는 자연, 뼛속까지 깨끗해지는 공기까지.
자연 같은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다시 한번 하게 되는 순간들.
3.24
하루종일 길 위에서 만나는 불특정 다수의 사람들에게 “Happy Holi!”를 외치며
서로에게 오직 행복한 에너지만 전하는 날에 지금의 내가 놓여있다.
사람이 많거나 시끌벅적한 곳을 피하는 편이지만 홀리 축제만큼은 온 마음을 다해 즐겼다.
익숙해진 습성들 사이사이에 외면하거나 망설이던 것들을 하나씩 꺼내어 마주해보고 싶어졌다.
그리고 행하고 싶어졌다.
3.25
무너진 산과 건물 아래에서도 무던히 살아가는 사람들.
아슬아슬한 길 위를 걷는 사람들을 보며 주어진 삶에 다시 한번 감사해진다.
살아있음과, 이동할 수 있음과, 먹을 수 있음과, 누군가와 안부를 주고받을 수 있음에.
더 좋아지기 위해 시련과 고난이 온다는 말을 살면서 참 많이 들었다.
그들도, 이곳도, 지금의 나도 머지않아 더 아름답고 단단해지기 위한 과정에 놓여있음을
알려주는 메시지가 아닐까.
무너지거나 혼란스러울 때가 없을 수는 없다.
그런 상황들 속에서 다시 나아갈 수 있는 힘을 깊고 길게 가져오려면
단순히 자본만이 답이 아님을 기억해야겠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어떤 상황에서도 스스로를 끄집어낼 용기와 결단력.
3.26
최소한의 것에서 최대한의 평온함과 가치로운 힘을 만들어내는 걸 목격했다.
개의치 않아야 할 것들을 여태껏 너무 많이 신경 써왔음을 깨달았다.
3.27
어느 외딴 도시에서 아버지 또래의 선생님을 만나게 되었다.
은퇴를 하고 여행을 다니신다는 그 분과의 진중했던 대화.
시간은 계속 흐르고, 우리는 앞으로도 각자의 자리에서 제 할 일을 하고 있겠지만
그 안에서 하고 싶은 것들이 있다면 최대한 미루지 말고 하라는 다짐을 안겨 주셨다.
그때그때 사랑한다 말하고, 따뜻한 말 한마디 건네보고,
가끔은 새로운 추억도 만들면서.
3.29
5시간이 걸리는 여정이 10시간에 걸쳐 마무리되었다.
시간에 묶이지 않고 다닐 수 있는 여유가 나를 느슨하게 만들어준다.
짧지 않은 시간 동안 옆자리에 앉게 된 네팔 교수님과 드문드문 대화를 나눴는데
그를 보며 양면적인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인간이라는 존재는 누군가에게 인정받고 싶은 욕구와 동시에
누군가를 도와주기 위해 이 행성에 모여 사는 걸지도 모른다는 생각.
3.30
수많은 야생동물들이 기온변화와 나 같은 관광객이 만들어낸 소음에 갈 길을 잃은 것 같다.
어떻게 해야 인간과 동물이 오래도록 깊게 공존할 수 있을까.
3.31
이방인이자 여행자인 나와
생계가 달린 현지인들의 영업에는 어쩔 수 없는 간극이 생긴다.
어쩌면 사는 내내 느꼈던 감정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생계의 초점이 서로 다른 것에서 오는 간극.
2024.3월의 기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