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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에 익숙해진 우리에게

1장. 통증을 다시 읽는 시간 # 20

by 시선

어둠을 지나 삶을 세우는 길


어둠.
우리는 벗어나고자 하면서도,
아이러니하게 그 익숙함에 머물고 싶어한다.


오랜 시간 빛을 보지 못하면
우리 스스로도 빛을 지니고 있었음을 잊는다.


통증 역시 그렇다.
몸의 신호를 넘어,
삶의 배경이 되어버린 고통 속에 머무는 것이
때로는 더 안전해 보이기 때문이다.


통증으로 처음 내원하는 환자들에게
나는 가끔 이렇게 묻는다.


“치료 목표가 있으세요?”


환자들은 이 질문에 때로는 황당한 표정을 짓기도 하고,

때로는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 대답을 내놓기도 한다.


“당연히 통증이 사라지는 것이죠.”

“그건 의사 선생님께서 정해주셔야 하지 않나요?”

“오늘 일할 수 있게만 해주시면 돼요.”


그러나 사실, 그것은 진심을 말한 것이 아니다.

아니, 애초에 자기 마음의 진심조차 알지 못한 대답에 더 가까웠다.


통증이 삶에 어떤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는지
스스로 알지 못한다면
통증을 올바로 이해했다고 할 수 없다.


통증에서의 완벽한 회복은
의사의 목표일 수는 있다.
그러나 환자의 목표가 되어서는 안 된다.


진정한 목표는 단순히 통증의 소멸이 아니라,
몸과 마음을 건강하게 세워
삶 전체가 새로워지는 것이다.


“마음이라는 게 그렇게 중요해요?”

“네, 자세를 바꾸는 것도, 운동을 하는 것도… 결국 내가 움직이기 시작해야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
단순히 통증이 사라지는 것을 맹목적으로 집착한다면

반드시 재발한다.

잘못된 자세, 움직이지 않는 습관,
우울과 불안, 부정적 사고가 뿌리째 남아 있다면
온전한 결실을 얻을 수 없다.
그리고 목표가 이루어지지 않는 순간

실망은 기대만큼이나 우리를 무너뜨린다.


그러므로 통증은
끝내 사라져야 할 적이 아니라 (결국 사라지겠지만),
삶을 새롭게 세우는 과정 속에서
자연스레 사라지는 그림자여야 한다.


그러니 통증을 당연한 운명처럼 받아들이지 말라.
낙심하지 말라.
이 어두움을 지나 더욱 밝은 빛을 기대하며
그 여정을 이어가야 한다.




빛은 이미 우리 안에 있다


얼마나 오랜 시간,
얼마나 아팠는지는 중요하지 않을 수 있다.
회복의 본질적인 방법을
아직 깨닫지 못했을 뿐이다.


진정으로 중요한 것은 지금 이 순간,
내 안에 회복을 향한 확신과 믿음을 다시 붙드는 일이다.
어쩌면 우리는 그것을 위해 태어났는지도 모른다.


현재의 불안과 고통을 이겨내며
더 단단한 사람이 되어가는 길,
그 길 위에서 우리는 깨닫는다.


빛은 밖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우리 안에 있었음을.


회복에 이른 사람들은 말한다.
단순히 통증만 사라진 것이 아니라
삶의 목적이 달라졌다고.


관계를 바라보는 시선,
갈등을 대하는 마음,
앞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발걸음의 방향이
새롭게 세워졌다고.


삶의 끝자락에서 우리는 누구나 호흡을 멈춘다.
그곳에는 우리를 괴롭히던 몸의 통증도,
마음을 짓누르던 아픔도 없다.


그러니 그 마지막 순간에 다다를 때까지,
고통을 이겨내며 이어가는 발걸음 하나하나에
이미 삶의 의미가 있다.


그래서 통증은 단지 어둠이 아니다.
우리를 무너뜨리려는 그림자가 아니라,
빛으로 안내하는 길이 될 수 있다.


그리고 마침내 우리는 깨닫는다.

우리는 처음부터 빛을 지닌 존재였다는 것을.




Darkness cannot drive out darkness; only light can do that. Hate cannot drive out hate; only love can do that.


어둠은 어둠으로 몰아낼 수 없다. 오직 빛만이 어둠을 몰아낼 수 있다.
증오는 증오로 사라지지 않는다. 오직 사랑만이 그것을 없앨 수 있다.


— Martin Luther King Jr. (Strength to Love, 19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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