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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녕 Feb 14. 2020

아버지의 남녀 상열지사

엄마가 돌아가신 후 아버지는 방에서 잘 나오지 않으셨다. 텃밭은 잡초더미로 버려지고 하루 종일 TV 소리만 온 집안을 왕왕거렸다. 친구들 모임이나 친척들 행사에도 안 나가시다 1년쯤 지나서야 조금씩 외출을 시작하셨다. 가끔은 나에게 입 맛이 없다며 뭔가 새로운 음식을 먹으러 가보자고 제안을 하기도 했다.


엄마는 돌아가시기 한 달 전부터 중환자 실에 계셨다. 중환자실은 보호자가 같이 있을 수 없고 정해진 시간에 면회가 가능하다. 아버지는 그때부터 엄마의 물건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엄마의 외출복을 태우고 다음은 신발들, 약봉지들.. 이런 순으로. 그래도 버리지 않은 것은 휠체어와 환자용 침대이다. 그것은 아버지가 언젠가는 사용한다고 하셨다.


엄마가 돌아가신 후 영정사진을 내 방에 두었다. 영정사진은 보통 사진관에서 진지하게 여권사진처럼 찍은 걸로 한다.  엄마의 영정 사진을 가져오라는 장례식장의 말에 나는 엄마의 가장 자연스러운 사진을 골랐다. 봄날, 벚꽃 길에 가서 화사하게 웃으며 찍은 사진이었다. 그 사진을 나는 엄마가 돌아가신 후에도 내 방에 둔 것이다.


사진이야 늘 책상 앞에 걸려 있으니 굳이 눈여겨보지 않으면 거기 있는지 없는지도 잘 모른다. 어느 날 문득 엄마의 사진이 없어졌다는 걸 발견했다. 여기저기 찾아보니 책상 서랍 아래 칸에 들어 가 있는 것이었다. 나는 다시 꺼내서 걸어 놨다. 그리고 며칠 후에 보면 또 서랍 아래칸에 들어가 있는 것이었다.


거실에 걸어 둔 사진도 아니고 내 방 책상 앞에 걸어 둔 걸 아버지는 굳이 책상 서랍에  넣어 두시는 게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사진을 보면 마음이 싸르르 아파오는 그 심정이 이해도 되었다. 나는 엄마의 사진을 장롱 깊숙이 넣었다.



어느 초여름 아침이었다. 마당에서 아버지와 한 여자분의 목소리가 시끄러워 잠이 깼다. 무슨 일인가 싶어 방에서 대화를 들어 보았다. 여자분이 아버지에게 원망하는 목소리였다. 사연인 즉슨 이랬다. 여자분은 그 전날 밤에 아버지와 통화를 하면서 딸인 내가 집에 안 들어올 것 같으니 아침 일찍 우리 집으로 오라는 연락을 아버지께 전해 들은 듯했다. 그런데 막상 일찍 집에 와보니 내 차가 마당에 있는 것이다.


그러니 그 여자분은 집안으로 들어오지도 못하고 마당에서 아버지에게 원망을 하셨다. 당시 나는 바느질 공방에서 작업을 늦게까지 하고 가게에 딸린 방에서 자기도 했었다. 늦은 시간에 집에 들어갔으니 아버지는 내가 가게에서 자는 줄 알고 여자 친구분에게 아침 일찍 오라고 하셨던 것이다.


아버지는 괜찮다며 들어와서 인사를 하라고 했고, 여자분은 어떻게 그러냐며 못 들어온다고 하시며 실랑이를 하셨다. 나야말로 방에서 나가야 할지 계속 자는 척을 해야 할지 난감했다. 나는 대충 옷을 갈아입고 세수를 한 후 마당으로 나가서 인사를 했다.


아버지는 그분을 '이여사'로 소개를 했다. 이여사님은 어색하게 인사를 마친 후, 자연스럽게 안방으로 들어가시더니 분홍색 앞치마를 여미셨다. 그러고 보니 그 분홍색 앞치마가 한참 전부터 안방에 걸려있었던 게 기억이 났다. 부엌에서 설거지를 하다가, 얼핏 본 안방 벽에 걸려있던 분홍색이었다. 그때 나는 아버지에게 분홍색 티셔츠도 있었나보다, 하면서 무심히 넘겼다.


이 여사님은 텃밭에서 상추와 부추를 뜯어 오셨다. 된장찌개를 끓이고 겉절이를 하셔서 재빠르게 아침 상을 차리시면서 이런저런 얘기를 하셨다. 이 여사님은 일찍 남편 분이 다른 여자와 살림을 차려 나가셨고 몇 년 전에 세상을 떠나셨다고 했다. 젊은 날부터 식당을 했고 지금은 오후에 손녀를 봐주신다고 했다.


그렇게 ice break time을 마친 후 같이 아침을 먹었다. 아버지와 셋이서 아침을 먹는데 이여사님은 반찬을 아버지 앞으로 당겨 숟갈에 반찬을 얹어 주셨다. 참 내,  40이 다 되어 가는 이혼녀 딸을 앞에 두고 저러고 싶을까? 했다. 속으로.


안면을 튼 후부터 이여사님은 자연스럽게 우리 집을 드나들었다. 이여사님은 음식 솜씨가 좋았고 손도 굉장히 빨랐다. 이여사님이 만든, 멸치와 다진 고추를 간장에 볶은 반찬은 처음 먹어 본 것이었는데 뜨거운 밥과 먹으면 정말 맛이 있었다. 나중에는 다진 고추 볶음을 좀 해 달라고 부탁까지 하곤 했었다.


이여사님과 나는 김장을 같이 하기도 했었다. 전날 이여사님과 장을 보고, 배추를 절여 놓고 양념준비를 했다. 다음날은 이여사님이 혼자 하시고 나는 저녁에 설거지만 도와 드렸다. 김장을 마친 후 금방 버무린 김치와 수육으로 저녁을 먹었다. 이여사님은 김치를 싸서 아버지의 입에 넣어 주시고는 아버지의 칭찬을 기다렸다. 아버지는 맵지도 짜지도 않고 딱 맛있다 했다. 이여사님은 아주 만족해하셨다.


저녁을 먹은 후, 이여사님 김치통 두 개를 싣고 여사님 집에 태워 드렸다. 차를 돌려 집으로 오는 길에 전화가 왔다. 이여사님이 오후에 샤워를 하고 눈썹 그리는 펜슬을 우리 집에 뒀다며 그것 좀 챙겨 달라고 하셨다.  참 당황스럽기도 하고 우습기도 했다. 샤워? 그랬구나, 그랬어.. 하면서. 샤워 후 눈썹까지 금방 그리는 정성 귀여웠다. 민망함을 무릅쓰고 빠뜨린 펜슬을 챙겨 달라하는 용기는 배울만하다고 생각했다.


이여사님을 처음 대할 때는 어디를 쳐다봐야 할지를 모를 만큼 당황스러웠다. 시간이 지날수록 감사한 마음이 커졌다. 무보다 아버지의 태도가 훨씬 부드러워지고 생기 있어지셨다. 아버지 심기가 불편해 보일 때면 얼른 이여사님 얘기를 꺼냈다.  "아빠, 이여사님 불러서 산채정식 먹으러 가요." 그러면 표정이 밝아져서 전화를 걸었다. 그렇게 다운된 분위기는 이여사님에게 전화하는 것 하나로 종료되곤 했다.


내가 재미있게 본 관점은 이여사님의 딸들의 입장이었다. 가끔 우리 집에 있는 동안 따님들에게서 전화가 왔었다. 그러면 이여사님은 사색이 되셔서 전화를 받았다. 그리고는 어디 다른 곳이라 거짓말을 했다. 이여사님의 딸들이 우리 아버지와 만나는 걸 너무 싫어한다고 했다. 우리 집에 온 걸 알면 펄쩍 뛰며 엄마를 나무란다는 것이다.


내가 이여사님의 딸이라면 어떨까 생각을 해 봤다. 나도 결혼을 하고, 40이 넘어가는 입장이었다면 비슷했을지 모른다. 혼자 오래 산 내 입장에서는 좀 다르게 보였다.  이여사님 딸의 눈에는, 엄마가 다른 노인의 집에 가서 반찬을 하고 텃밭에 풀을 뽑고 콩을 다듬는 일들이 노동으로 보일 수도 있다. 내가 본 이여사님의 수고는 삶에 대한 에너지로 보였다. 텃밭에 모종을 심으러 올 때도 항상 풀메를 하고 오셨다. 모자와 팔에 끼는 토시는 잔잔한 꽃무늬로 피크닉을 가는 분위기였다. 선블럭과 수분크림은 나보다 더 꼼꼼히 챙겨 바르셨다.


딸들이야 엄마가 남의 집에서 고생을 하는 것 같아 속이 상했겠지만, 엄마는 한 여자로서의 다른 삶을 누리고 있는 것이었다. 엄마로, 할머니로  역할과 기쁨이 있다. 그것도 중요하지만 한 인간으로, 역할과 책임을 벗어나 존재 자체를 귀하게 여겨 주고 공감을 나누는 기쁨도 있다. 여자에게,  특히 나이 든 여자에게는 여자로서의 기쁨에는 인색하다. 오로지 기능적인 엄마로만 존재하길 강요당한다.


이여사님이 아는 기쁨은 밥을 해 먹이고 같이 장을 보고 텃밭에서 같이 풀을 뽑는 것들일 것이다. 가지런히 정리된 서랍을 보는 것이 즐겁고 그것에 대해 신기해하며 좋아하는 한 남자를 보는 것이 여자로서의 즐거움이라고 배웠을 것이다. 그 기쁨을 누리는 나이 든 '엄마 여자'를 딸들은 싫어하는 것이다.


나는 여자들이 엄마로만 살지 않기를 바란다. 여자들의 안에는 엄마로, 사회적 성취로, 로맨틱한 여성성으로 기쁨을 누리고 싶은 욕망이 있다. 그 어떤 것 하나도 소홀히 할 수 없는 인간의 당연한 욕구이다. 엄마의 역할만 지나치게 칭찬하는 것은 그 역할에만 가두고 싶어 하는 다른 가족들의 족쇄일 수도 있다.



아버지는 이여사님이 우리 집을 드나들기 시작하면서부터 영정사진을 치우시 시작하셨게다. 나는 엄마의 영정 사진을 아버지가 버리기라도 할까 싶어 장롱 제일 아래에 숨겨 놓았다. 엄마가 병세가 악화되어 병원으로 가기 전, 집에서 입던 분홍색 옥스포드 면 잠옷이 있다. 아버지는 그 잠옷도 버리고 싶어 했다. 나는 뭐라도 하나는 남겨두고 싶어 분홍색 잠옷을 숨겨 놨다. 엄마의 영정 사진은 분홍색 잠옷에 돌돌 말려 지금도 장롱 깊숙이 숨겨져 있다.


연애는 사람을 말랑말랑 하게 녹여 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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