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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정 Oct 17. 2020

나쓰메 소세키의 <마음>(북로드, 2015)

이 책을 읽고 이 한 줄의 문장이 떠올랐다. ‘자기혐오에 이르는 죄책감은 아무도 구원할 수 없다.’ 그리고 김애란 작가의 책 속 한 구절도 떠올랐다.


“‘마음만큼 형편없는 게 또 있을까.(<침이 고인다>문학과지성사, 2007, p234)”


고장 난 라디오처럼, 마음속에서 계속 반복한다. 마음만큼 형편없는 게 또 있을까, 라고.

이 책의 주인공 ‘나’, 그리고 그 ‘나’가 흠모하고 동경했던 선생님이라 부르는 아버지 연세의 중년 신사. 그 선생님에 대한 ‘나’의 기록, 그리고 선생님의 ‘유서’. 이것이 이 책의 구성이다.


읽고 난 후 내 마음에서는 ‘마음만큼 형편없는 게 또 있을까’라는 말을 끊임없이 되뇌게 된다. 그리고 선생님의 유서에 담긴, 선생님의 일생을 통해, 그가 평생 느꼈을 그 죄책감을 생각한다. 만약 선생님이 자기 자신에 대해 혐오가 아닌 연민의 감정을 품었다면 최소한 자살에 이르지는 않았지 않을까란 생각도 해본다.

그리고 이 또한 고장 난 라디오처럼 내가 나에게 계속 말하고 만다. 죄책감으로 인한 자기혐오는 결국 아무도 구원할 수 없는 것인가, 라는 이 말을.


타인을 향한 죄책감으로 인해 나 자신이 싫어진 끝에, 더 이상 자기 자신과의 삶을 견딜 수 없게 되었을 때. 그때는 어떤 누구도 그 사람을 구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 생각에 이르자 나도 모르게 소름이 끼친다. 나 자신이 자기 연민보다는 자기혐오의 감정에 가까운 사람이기에, 나 자신에게 죄책감이 다가왔을 때 내가 감당할 수 있을까란 두려움이 엄습했던 탓일 게다.


책 속에서 나는 때때로 나를 본다. 혹은 나와 전혀 다른, 닮을 수 없는 누군가를 보기도 한다. 만약 아주 작은 파편일지라도 나와 닮은 부분이 나올 때면, 나도 모르게 그 책 속 인물과 나를 동일시한다. 소설의 주인공이든 작가든 누구이든. 아주 작은 파편에서도 나는 나를 본다. 타인의 눈으로 바라본 나를 본다. 반면, 나와는 대척점에 있는 인물일지라도 그 삶이 나와는 ‘이질적’이란 걸 알게 하면서도 마음 아플 만큼 시리게 다가오는 경우도 있다. 나와 지나치게 닮든, 그렇지 않든 그 인물의 삶이 나에게 아픔으로 전달될 때가 있다.


그렇게 오랫동안 함께 아파했던 책들이 있다. 내가 좋아하는 김애란 작가의 글 속 사람들도 그렇고, 존 윌리엄스의 <스토너>의 스토너도 그러했다. 그리고 이 책의 ‘선생님’도 그렇다. 그가 자살에 이르기까지 고독하게 홀로 ‘견디’었던 그 시간들이 잊히지 않는다.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끌림으로 시작된 선생님과의 교제는 친숙함을 넘어 언제부턴가 내 사고(思考)에 절대적인 영향을 끼치고 있었다단순히 사고라고 하니 왠지 경직된 느낌이 든다그냥 마음이라고 부르겠다아무튼 내 살 속에 선생님의 힘이 스며들어 있다고 해도 내 핏속에 선생님의 생명이 흐르고 있다고 해도 그때의 나로서는 조금도 과장된 표현이 아니었다.(p71~72)”


주인공 ‘나’에게 있어 선생님도 그런 존재인 듯하다. ‘나’의 선생님을 향한 마음은 설명할 수 없는 끌림이었다. 하지만 단순한 호기심이 아니다. 분석, 연구하자는 불순한 의도도 아니라고 분명히 말한다. ‘나’에게 있어 선생님은, ‘나’의 “마음”에 절대적인 영향을 끼친 분이다. 이 책의 제목이 ‘마음’인 이유가 여기서 나타난다.


선생님은 이런 사람이었다.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있는 사람사랑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사람그러면서도 자기 품에 안기려는 사람을 양팔 벌려 환영할 수 없는 사람그것이 바로 선생님이었다.(p24)”


선생님은 다가오는 ‘나’를 거부하거나 내치지도 못하면서 마음껏 반가움을 표현하지도 못한다. 그리고 ‘나’에게 말한다. 자네는 나를 만나면서도 필시 어딘가에 외로움이 자리하고 있을 것(p28)”이라고. 그리고 언젠가 자신과 멀어지게 될 거라고 말한다.


하지만 ‘나’는 선생님에게 말한다. 외로워서 선생님을 찾아오는 것은 아니라고. 그리고 선생님의 그 예언처럼 ‘나’는 선생님을 떠나지 않는다. 두려움이었던 것 같다. 선생님이 그렇게 다가오는 ‘나’를 향해, 언젠가 너도 변할 것이다, 라고 말하는 것은. 변해갈 것들에 대한 두려움에 마음껏 품지 못하는 두려움의 악순환.

선생님이 사람을 사랑하지 않으면 견디지 못하는 사람이면서도 사람을 순수하게 품지 못하게 된 그 이유는, 결국 선생님을 자살에 이르게 하는 이유이자 평생을 괴로움과 죄책감에 시달린 이유와도 연결된다.


선생님 어느 날 문득 이런 말을 한다.


사랑은 곧 죄악이네그 사실을 아는가?(p42)”


선생님의 사랑은 죄악이었다. 한 번도 사랑이란 것을 해 본 적은 없던 ‘나’에게 있어 그 말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미지의 문장이었다. 그리고 선생님은 이런 말도 한다.


나는 인간이란 존재를 애초에 믿지 않네.(p46)”


그 믿지 못하는 대상 안에는 자기 자신도 들어간다는 선생님. 자기 자신조차 믿지 못하기에 타인 또한 믿을 수 없다. 그렇기에 선생님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스스로를 꾸짖는 일 말고는 할 수 있는 것이 없네(p47)”라고 말한다. 그리고 어느 날, 선생님은 이런 말도 했다. 사람이란 누구나 한순간에 나쁜 사람이 돼버린다(p87)”라고.


도대체 선생님은 왜 이렇게 인간 불신이 된 것일까, 어떤 일이 선생님을 이토록 자기혐오에까지 이르게 한 것일까. 선한 사람도 순식간에 나쁜 사람으로 변하게 한다는 이 뿌리 깊은 불신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선생님의 그 ‘마음’의 그림자를 알고 싶어 하는 ‘나’에게 선생님은 말한다.


나는 과거의 경험으로 인해 사람들을 믿지 않게 되었네그건 자네도 예외가 아니네하지만 이젠 자네를 믿고 싶네자네는 너무나 순수하거든솔직히 나는 세상을 떠나기 전에 단 한 명이라도 좋으니 마음을 터놓고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이 있었으면 했네자네가 그 한 명이 될 수 있겠나자네는 진정 진지하다고 자부하는가?(p94)”


마음의 무게를 홀로 견디던 선생님. 그에게 어느 날 나타난 ‘나’. ‘단 한 명이라도 좋으니’라는 문장이 참 아프게 들린다. 세상을 살아가고 견디는 데는 많은 숫자가 필요한 게 아닌 듯싶다. ‘단 한 명’, ‘단 하나’라도 진심이라는 것을 펴보일 수 있고, 내가 나로 살 수 있게 하는 ‘단 한 공간’만이라도 있으면 되지 않을까란 생각을 하곤 한다.

선생님은 그 유일한 ‘단 한 명’으로 ‘나’를 선택한다. 하지만 말이 아닌 ‘유서’의 형태로 전하기에 선생님의 죽음을 ‘나’는 말릴 수 없었다. 단 한 명을 찾았지만 선생님의 자기혐오와 죄책감은 선생님 자신을 구원할 수 없었다.


그토록 오랫동안 마음의 문을 닫고 지내던 선생님이 ‘나’에게 마음을 열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유서의 서두에서 선생님은 이렇게 말한다.


나는 수천만 명이나 되는 우리나라 사람들 중에 오직 자네에게만 내 과거를 말해주고 싶다네왜냐하면 자네는 참으로 진실한 사람이니까자네는 인생 그 자체에서 커다란 교훈을 얻고 싶다고 말한 사람이니까.(p170~171)”


선생님의 마음의 무게를 알려달라고 했던 ‘나’. 그에게 약속을 지키기 않으면 견딜 수 없을 만큼, 윤리적으로 결벽증적인 사람이었다, 선생님은. 윤리적으로 결벽증적이라는 이 말이, 선생님을 죽음으로 몰게 한 가장 큰 원인이 아닐까 싶다.


존 윌리엄스의 책 <스토너>에서 스토너는, 아내의 횡포로 딸이 망가진 삶을 살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도, 그 딸에 대해 자신이 무력했음을 인정하지만 '죄책감조차 사치'라고 말한다.

그 책을 읽던 당시에는 스토너의 그러한 삶의 방식에 대해 무력감 이상의 무엇도 해석할 수가 없었다. 세상과 운명이 던지는 돌 앞에서 몸을 움츠리며 반항은커녕 한 마디 신음도 내뱉지 않던 모습이 숨 막히도록 답답하기만 했다. 그런 방식으로 스토너는 자신의 삶을 버티어 낸다. 그것이 그의 삶의 견디는 방식이었다.


하지만 이 책, <마음>의 선생님에게 있어 죄책감은 사치가 아니다. 이 선생님도 삶에 대해 인간에 대해 증오와 혐오를 느끼며 무력감을 느끼기는 하지만 죄책감을 사치라는 말로 도망치지 않았다. 죄책감이 자기혐오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윤리적으로 결벽증에 가까운 사람이었기 때문에 자기 자신을 벌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다. 차라리 선생님이 자기 연민의 감정을 품었다면, 자살에는 이르지 않았을 거란 생각을 해 본다.


돌아가신 아버지를 대신해 재산 관리를 해 주던 작은아버지. 하지만 어렸던 선생님 몰래 남겨진 유산을 빼돌렸던 작은아버지. 그렇게 믿고 따르던 가족에게 배신을 당한 선생님. 이 일로 선생님은 타인에 대해 불신과 혐오를 느낀다.


이 타인을 향한 분노가 자기 자신에게도 향하게 되는 또 하나의 사건이 있다. 선생님이 머물던 하숙집 따님을 선생님은 좋아했었다. 그녀를 향해 종교와도 같은 신성한 사랑을 느꼈다. 하지만 차마 고백하지 못했었는데 함께 하숙하던 친구K가 그 따님과 사이좋은 모습을 몇 번 목격하게 되며 불안을 느낀다. 그러던 어느 날, 친구K가 선생님에게 그녀를 좋아한다고 속내를 밝힌다. 이를 듣고 선생님은 하숙집 아주머니에게 딸과 결혼하고 싶다고 먼저 말을 꺼내고 결혼을 얻어낸다.


친구K도 그녀를 좋아하는 건 알지만, 어쩌면 따님도 그 친구를 좋아할지도 모르지만 자신의 사랑을 빼앗기고 싶지 않다는 욕심에서 나온 비겁한 행동이었다. 친구에게 자신이 비겁했음을 용서 빌까도 했지만 자존심 때문에 내일로 미룬다. 그 다음 날, 그 친구는 자살한다.


나는 작은아버지에게 기만당했을 때 타인을 믿을 수 없다는 사실을 절감했고그만큼 나 자신에 대한 확실한 믿음이 있었네세상이야 어떻게 되든 나만은 완벽한 사람이라는 믿음을 갖고 있었지그런 믿음이 K의 일로 보기 좋게 무너지고 나 자신도 작은아버지와 다를 바 없는 인간이라는 사실을 새삼 확인했을 때 내 마음도 흔들리기 시작했네타인에게 등을 돌렸던 나는 곧 스스로를 혐오하게 되었고나 자신을 가둔 채 점점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나약한 인간으로 변하고 말았네.(p297)”


친구가 남긴 유서에는 선생님을 탓하는 내용도 없고, 따님에 관한 언급도 없다. 그리고 따님이자, 지금 선생님의 아내는 그 친구를 사랑했다고 말한 적도 없다. 선생님의 시선에서는 그 둘의 사랑을 선생님 자신의 욕심으로 인해 갈라놓은 듯하지만 정말 그런가에 대해서는 의문이 든다.


선생님의 아내와 ‘나’가 대화하는 장면에서, 아내분은 ‘나’에게 이렇게 말한다. 친구의 죽음 이후 선생님의 성격이 달라졌는데 그 친구가 왜 그랬는지는 나도 모릅니다남편도 마찬가지일 거예요하지만 그때부터 무언가 달라진 것으로 보아 그 일과 관련이 있다고 생각되는 것이지요(p61)”라고.


가장 가까웠던 친구의 죽음 앞에서도 죄책감으로 인해 슬픔을 표현할 수 없었던 선생님. 사랑했던 여자와 결혼했고 아내도 아내의 어머니도 자기 자신도 행복했지만 내 행복에는 언제나 검은 그림자가 따라다녔(p294)”다고 고백하는 선생님.


선생님은 아내의 얼굴을 볼 때마다 죽은 친구의 얼굴이 떠올라 두려웠다. 왜 나를 싫어하느냐고 묻는 아내, 무언가를 숨기는 게 아니냐는 말을 하는 아내에게, 이 모든 마음의 무게를 털어놓고 싶었지만 아내의 기억에 작은 그림자조차 드리우고 싶지 않았기에(p297)” 솔직히 털어놓지 못했다. 분명 사실대로 아내에게 말하고 참회했다면 아내는 오히려 감사의 눈물을 흘리며 나를 감싸주었을 거라고 믿(p297)”으면서도 아내를 향한 사랑이 컸기 때문에 혼자 끌어안고 말았다. 그리고 선생님은 생각했다.


내가 가장 믿고 사랑하는 사람마저 나를 이해할 수 없다는 사실에 무척 슬펐네아니지이해할 수 있는데도 그렇게 만들 용기가 없다는 사실이 슬펐다고 해야 옳을 것이네그래서 나는 더욱 슬펐지.

나는 외로웠네나는 이 세상에 나 혼자뿐이라는 생각에 잠기곤 했네그러면서 K가 자살한 이유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았지. (중략) K는 나처럼 외롭고 공허한 마음을 이겨내지 못해 자살을 선택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네그런 생각이 들자 나는 온몸에 소름이 돋았네나 또한 K가 걸어간 길을 똑같이 걸어갈지도 모른다는 예감이 스쳤거든나뭇잎을 소리 없이 스치고 지나가는 바람처럼 어느 날 갑자기.(p299~300)”


서평의 서두에서, 이 책을 읽고 김애란 작가의 책 속 한 문장인 “마음만큼 형편없는 게 또 있을까”란 문장을 떠올린 이유는 무엇일까. 선생님을 평생 죄의식과 우울증에 시달리게 하고, 기쁨은 물론 슬픔조차 느끼지 못한 채 죽은 마음으로 살아가게 한 그 이유가, 어쩌면 선생님 자신의 지나친 결벽증적인 윤리관에서 온 것은 아닐까 하는 추측 때문이다.


친구도 선생님의 아내를 사랑한 것은 사실일지 모르지만 아내분이 그를 사랑했던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친구 또한 집안 사정이 복잡해지고 여러 가지 그를 괴롭혔던 일들이 많았는데 그러한 이유들로 인해 자살에 이른 듯한데 선생님은 오로지 자신의 탓으로 돌리며 혼자 감당하려했다. 또 다시 이 말을 되뇌고 만다.

'마음만큼 형편없는 게 또 있을까.'


사람마다 저마다의 삶을 견디는 방식이 있다. 자기 연민과 남탓으로 타인과 세상을 향해 가시를 돋우면서라도 자기 자신을 보호하며 사는 사람. 타인을 향해야 하는 가시조차 자신에게 돌리며 자학하며 사는 사람. 어떤 것이 더 났다고는 말하지 못하겠다.


한 때는 자기 연민과 남탓으로 타인에게 비난과 독설을 퍼붓는 사람을 혐오했던 적도 있다. 이기적이라 비난했던 적도 있다. 하지만 그것이 그 사람이 삶을 견디는 방식이라면, 이란 생각을 하게 되면서 비난을 멈추게 된다. 어쩌면 자기 연민이나 남탓으로라도 자기 자신을 지키며 나에게 주어진 삶을 다하는 것 또한 용기가 아닐까란 생각도 한다. 내가 그런 사람은 될 수 없음을 알지만.


나 자신을 믿고 아껴주고 영원히 신뢰해주는 '단 한 사람'만 있었더라면 자살에 이르지 않을 거라는 믿음이 있었다. 하지만 책을 읽을 때마다 그런 나의 생각이 조금씩 흔들린다.

빈 센트 반 고흐에게는 영원히 그를 믿고 응원하고 아껴주는 동생 테오가 있었다. 하지만 그의 죽음을 말리지 못했다. 버지니아 울프라는 작가에게는 그녀를 믿고 그녀의 글을 사랑하는 평생의 동반자 남편이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주머니에 돌을 넣고 강물에 뛰어들었다.


자기 자신을 자기가 사랑하지 않는 한, 자기혐오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한 자살이라는 유혹에서는 벗어나기 힘든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을 한다. 더구나 죄책감이라는 단어가 자기혐오와 만나면 자살에 대한 욕구는 더 커질 듯 싶다. 자신의 존재 의미에 대한 추궁만으로도 감당하기 힘든데 자신의 존재가 누군가에게 죄가 된다고 느껴진다면.... 그것을 견디어낼 만큼 강한 자존감, 이기심에 가까운 자기 연민이 아니면 버티기 힘들지 않을까란 생각이 든다.


소설을 오랫동안 기피했다. 소설 속 인물들과 같은 마음으로 살아가는 며칠이 괴로웠던 탓이다. 지금도 여전히 책 속 인물들의 마음으로 살게 되고, 역시나 함께 괴로워하고 말지만 그렇지만 이제는 그런 이유로 소설을 피하지는 않게 되었다. 눈앞의 문제에 대해 비겁하게 눈을 돌리며 모르는 척 하는 삶을 살고 싶지 않다는 나만의 결벽증적인 윤리관일지도 모른다. 마음에 넣어두었던 또 한 명의 삶을 이렇게 내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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