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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여름이가기전에 Mar 12. 2022

입덧, 뭣이 중헌디

그 끝을 향하여

술을 진탕 부어 마신 다음 날, 숙취에 찌든 나는 침대에 퍼져 있었다. 남편은 오늘 자기 친구와의 점심 약속을 잊었느냐며 타박을 줬고, 나는 애써 괜찮은 척 (기억나는 척) 일어나 몸을 씻고 남편과 약속을 나갔다.

    

날이 좋았다. 여름을 앞둔 6월, 미세먼지 없이 쾌청한 하늘에 적당히 따스한 햇살, 싱그러운 초록 새순들이 가득한 거리. 그 거리에서 나는 가로수를 부여잡고 토를 했다. 일어나 마신 것은 물뿐이라 나무에 물을 주기라도 하는 듯 투명한 물이 쏟아져 내렸다.


“경찰 온다”     


놀리려고 하는 줄 알았는데 정말 순찰차 한 대가 다가오고 있었다. 아뿔싸, 노상방뇨가 아니라 노상구토도 벌금의 범주였던가? 긴장 속에서 순간 기지를 발휘해 묘책을 떠올려 남편에게 말했다.

     

“여보. 혹시 무슨 일이냐고 물어보면 입덧이라고 얘기하자!”

     

그래. 나는 그 생각을 떠올린 내가 천재라고 생각할 정도로 철이 없었다.


다행히 순찰차는 그대로 지나갔고, 나는 점심을 먹으러 간 식당에서 토마토 주스만 하나 시켜 그마저도 반만 겨우 마실 수 있었다. 남편의 친구분께는 이 자리를 빌려 다시 한번 심심한 사과의 말씀을.

     



나홍진 감독의 영화 ‘곡성’에서 주인공의 딸 효진이가 어느 날부터인가 걸신이 들린 것처럼 음식을 먹어대는 장면이 나온다. 효진이 옆에 쌓여있는 생선 뼈 무더기와 열린 냉장고 문 앞에 주저앉아 밥솥을 통째 들고 먹는 장면은 기이함을 넘어 공포스럽기까지 하다.      


“효진아!!!”


남편이 나를 불렀다. 임신 6주 차, 배가 고파서 새벽에 깬 나는 라면을 한 봉지 끓여 먹고, 그것도 모자라 밥을 말아 먹고 있었다. 딱히 라면이 땡겨서 먹은 것은 아니었고, 뭐라도 입에 넣어야 살 것 같은 허기짐을 달래기 위해 가장 빨리 되는 음식을 고른 것이었다.


아, 내 이름은 효진이가 아니다. 평소 식욕이 없고, 중학생 때부터 일정한 몸무게를 유지해 올 정도로 자기 관리에 철저한 내가 그 새벽 라면에 밥을 말아 먹는 모습을 보고는 놀란 남편은 곡성의 한 장면을 떠올린 것이었다.

영화 곡성


입덧은 임신 극초기부터 다양한 모습을 하고 임산부들을 찾아온다. 특정 냄새가 싫어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그 냄새의 종류도 다양하다. 남편 냄새가 싫어져 별거하는 이가 있을 정도), 임신 전에는 좋아하지 않던 음식만 먹는 사람도 있고,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위액이며 담즙까지 게워낼 정도로 구토 증세를 보이는 사람, 먹는 것은 괜찮은데 머리가 계속 아픈 사람, 방금 먹었는데도 공복감이 들고 먹지 않으면 토를 하는 사람.


백 명의 임산부들이 있다면 백 가지의 입덧 증상이 있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닌 수준이다. 그중 나는 마지막 증상, 먹덧이 왔다. 일생 동안 먹는 재미를 모르고 산 사람 중 한 명으로 토를 하면 토했지 먹덧이 올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방금 밥을 먹었는데 배가 고팠고, 배가 고프면 뱃멀미를 하는 것처럼 속이 울렁거렸다. 그럼 또 이것저것 입에 욱여넣어 허기를 달랬는데 문제는 30년 넘게 데리고 산 내 위장은 이 정도 양의 음식이 낯설다는 것이었다. 결국 나는 먹다가 화장실로 달려가 변기를 붙잡고 전에 먹은 것까지 모두 게워냈다. 그러고 나면 또 허기가 져 먹었고, 그럼 다시 토했다.


숙취 때문에 변기와 조우하는 것이 익숙한 나였지만 숙취는 잠을 자거나, 오후가 되거나, 정말 심해도 내일이 되면 괜찮아진다는 희망이 있었다. 반면 입덧은 아주 야박하고 고약했다. 새벽부터 시작해서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출석 도장을 찍어댔다. 너무 성실해 정말.     




알다시피 아기는 탯줄을 통해서 영양분을 공급받는다. 탯줄은 엄마의 자궁에 부착된 태반이라는 것과 연결이 되어 있는데, 아기가 처음 생겨났을 때는 탯줄도 태반도 아직 생성되기 전이다. 태반의 중요한 역할 중 하나는 임신을 유지시키는 호르몬을 만드는 것이고, 태반이 형성되기 전에는 모체가 호르몬을 직접 형성해야 한다. 그 호르몬 생성의 과정에서 입덧 증상이 발현된다고 한다.     


그래서 입덧에도 끝이 있다. 나를 대신해서 호르몬을 만들어줄 태반이 완성되는 날, 내 위장과 입 그리고 변기는 드디어 평화를 찾았다. 보통 15주에 태반이 완성된다고 하는데, 나는 12주부터 괜찮아졌다. 고맙다 태반아!


입덧이 없는 엄마들도 더러 있기도 하지만, 입덧은 임신 초기의 상징이자 임신이 잘 유지되고 있다는 몸의 신호이기도 하다. 만약 입덧이 끝날 시기가 되기도 전에 갑자기 증상이 사라진다면, 이는 유산의 징조일 수도 있다. 그러니 우리 입덧을 너무 미워하지도, 막연히 두려워하지도 말고 그 끝을 향해 시간을 달리자.




아가야, 너를 품는 시간 내내 한순간도 행복하지 않은 순간이 없었다고 말한다면 그건 사실 거짓말이야. 특히 입덧이 심했던 날들은 다시 돌아가고 싶지 않을 정도로 힘든 나날들이었다.


근데 웃긴 건, 입덧 증상이 가끔 줄어든 날이면 네가 내게서 사라진 건 아닌지 걱정이 돼 다시 입덧을 하길 기다리고 있는 내 모습이었다. 제 아무리 고통스러워도 너를 잃는 고통에 비할까.


그러니 너는 이 글을 읽어도 내게 미안해할 필요 없다. 너를 품을 수 있다면 그까짓 입덧 또 한 번 겪는데도 아무렴 괜찮다.


뭣이 중헌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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