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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여름이가기전에 Mar 14. 2022

분홍색? 파란색? 아니 노란색!

딸이든 아들이든

나도 몰랐다. 내가 맘카페에 드나들게 될 줄은. 막상 회원이 되고 보니 외부에서 흔히 말하는 잘못된 상식을 공유하거나 이상한 소문을 퍼뜨리는 것은 맘카페의 아주 작은 부분이었고 순기능이 더 많았다.


주변 사람들에게 말하는 것이 껄끄러운 임신과 난임, 유산에 대한 경험을 공유하기도 하고, 임신 주수 별 증상이나 아기의 성장 단계를 공유해 자신이 별 탈 없이 아기를 잘 키우고 있는 건지 확인하고, 내 얼굴의 침 뱉는 격인 남편이나 아이들에 대한 고민을 털어놓기도 하는 엄마이거나 엄마가 되고 싶은 이들의 대화의 장일 뿐이었다.

     

여느 커뮤니티가 그렇듯 맘카페에도 그곳에서만 쓰이는 용어들이 있는데 카페에 처음 접속했을 무렵 나는 그 낯선 단어들의 뜻을 찾아 헤매고는 했다. 예컨대 ‘배테기’는 배란테스트기, ‘문센’은 한센병의 일종인가 싶었는데 문화센터의 줄임말이었고, ‘매직아이’는 임신테스트기에 희미하게 보이는 양성 반응을 말했다.


그 중 가장 특이한 것은 ‘각도법’이란 말이었다. 태아의 성기가 완전히 생성되기 전이라 성별을 알 수 없는 시기에 태아 하복부의 각도를 통해 성별을 유추하는 방법이다. 정확도가 떨어짐에도 많은 부모들은 이 방법을 통해서라도 아기의 성별을 하루라도 빨리 알고 싶어 한다. 각도법 잘 보는 엄마들의 아이디가 카페에서 유명할 정도.




태어나지도 않은 태중 아기의 성별이 궁금한 이유는 뭘까? 아기 물품을 준비하기 위함이라고는 하기에는 신생아 시기의 남녀 아기의 물건은 크게 다르지 않다. 배냇저고리의 색이라면 남자가 분홍을 입고, 여자가 파랑을 입지 못할 이유는 없고, 정 싫다면 노란색이나 초록색도 있지 않은가?

    

아마 부모가 아이의 성별에 따라 기대하고 소망하는 역할이 있기 때문이지 않을까 생각한다. 딸을 바라는 부모들은 딸의 살가운 애교와 훗날 아이가 성인이 됐을 무렵 자신들에게 베풀 효심을, 아들을 바라는 부모들은 아들의 든든함과 함께 전통적인 가부장적 사회에서 응당 아들을 가져야 한다는 압박으로부터의 해방을 기대하고 있었다.


“OO색이네요”


산부인과 담당의가 아기 성별 힌트를 주던 12주차 검진. 아기의 성별이 그리 궁금하지 않았는데 알게 되어 얼떨떨했다. 효심 깊은 친구 같은 딸을 바라지도 않거니와 가부장 사회의 해방군 역할을 해줄 아들을 바라지도 않았다. 그저 건강하게 태어나 예의 바르게 자라 사회에 보탬이 되는 구성원으로 자라길 바랄 뿐이었다.


되려 나는 사회의 성역할에 대한 기대와 실존하는 불평등 속에서 아이가 나의 바람과는 달리 ‘딸’로서 또는 ‘아들’로서 자라나지 않을까 걱정하기 시작했다.


딸이라면 예쁜 짓을 해보라는 주변의 요구를 받고, 그걸 제대로 해내지 못해 애교가 없다는 핀잔을 들을 것이었다. 크면서는 공중화장실에서 옆 칸에 누가 있는지 두려워하고, 늦은 새벽 귀가할 때면 작은 소리에도 놀라 걸음을 재촉하고, 결혼과 출산에 대한 은근한 압박을 받다가 산고를 치른 후 아기를 키우며 원하던 꿈을 이루지 못하고 살아갈지도 모른다.


아들이라면 우는 것도 서러운데 강하지 못하다는 핀잔을 듣고, 크면서는 남성 집단에서 으레 나타나는 위계에서 살아남기 위해 노력할 것이며, 반인륜적인 대우를 당할 위험을 감수하고 군대를 가고, 결혼할 때는 집을 해가야 한다는, 결혼 후에는 가족을 부양해야 한다는 압박감에 시달리며 어릴 적 꿈은 고이 접어둘지도 모른다.


딸이든 아들이든 이 땅에 태어나 한 사람으로서 세상을 살아가는 것은 그리 녹록지 않은데 여성과 남성이라는 성의 구분 속에서 우리 아이는 스스로를 규정하거나 속박하지 않고 커갈 수 있을까?




마음이 여리고 섬세한 성격을 지닌 아들이라도 강인함을 강요하지 않고, 무뚝뚝하고 야망 넘치는 딸이라도 부드러움을 가르치지 않는 엄마가 되고 싶다. 그저 아이가 타고난 있는 그대로의 성질을 보듬어 더 나은 인간으로 키우는 것을 목표로 하고 싶다.


그리하여 아이가 모두에게 안전한 공중화장실과 새벽 거리를 마련하기 위해 마음을 쓰고, 온전히 자신의 선택으로 결혼과 가족의 구성을 결정하고, 사회 곳곳의 반인륜적인 처우에 함께 분개하며 스스로 경제적으로 독립할 수 있고, 상대 배우자가 희망하지 않는 경력단절 또는 부양의 의무를 요구하지 않는 사람으로 크길 바란다.


우리가 던져야 할 질문은 누가 더 우월한가, 누가 더 힘든가와 같은 논쟁을 위한 논쟁거리가 아닌, 각각의 성역할로부터 우리가 더 자유로울 수 있는 실질적인 방안에 대한 것이 되야하지 않을까? 그리고 그 방안의 시작에는 아기를 낳고 기르는 부모의 인식과 태도가 놓여있다고 믿는다.




아가야, 너를 처음 초음파로 봤을 때 네가 딸인지 아들인지 알 수가 없었다. 성별이 달라도 똑같은 모습을 하고 있거든. 꼬박 3개월 동안 열심히 성장한 후에야 너의 성별이 드러났단다. 인간은 태초에 모두 같은 모습을 하고 있다는 것이 신기하지 않니?


엄마의 바람을 담은 첫 번째 시도는 너의 방을 분홍색도 파란색도 아닌 노란색으로 꾸민 것이었다. 그 노란 방에서 갈등이 아닌 화합과 배려를 배우고, 사회가 규정하는 한계가 아닌 네 자신의 한계를 넘어서는 지혜롭고 용감한 사람으로 자라나길 희망한다.


자기 자신이 아닌 타자가 규정한 정체성 때문에 결코 꿈을 포기하지 말아라. 그 타자들은 엄마가 사는 동안 바꿔보기 위해 최선을 다할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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