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행기가 지나갈 때 두 손의 엄지와 검지로 네모(카메라)를 만들고, 그 안으로 비행기를 100번 찍으면 엄청난 행운이 생긴대."
내가 초등학생 때 학생들 사이에서 유행하던 말이었다. 이 말을 들은 이후로, 나는 비행기가 지나가는 소리만 들렸다 하면 어김없이 두 손 안에 비행기를 가두기 바빴다. 혼자 길을 걷다가, 친구와 이야기하다가, 운동회날 야외에서 간식을 먹다가도 비행기만 보이면 조용히 미소 지었다. 내가 찍은 비행기 횟수는 (내가 기억하기로는) 20번대였다. 어느 순간부터는 정확한 횟수를 세는 것도 힘들어지고, 학년이 올라가면서 '저학년 애들이나 하는 것'을 아직도 한다며 유치하게 생각할 다른 이들의 시선을 의식했다. 어느 순간부터는 비행기가 지나가면 두 손을 올리는 대신 유년시절 그 기억을 습관처럼 떠올렸다. 그리고 꽤 오랫동안 바라보았다. 그 시절, 아니 그 시절 이후로도 비행기를 지나치지 못하고 손으로 눈으로 바삐 찍어댄 탓이었을까. 내게도 그 '엄청난 행운'이라는 것이 생겼다.
"네가 굳이 무언가가 되지 않아도 좋아."
그는 그저 지금 너의 모습 그대로면 괜찮다고, 아니 있는 그대로의 모습이 자신에게는 너무나 완벽하고 이상적이라고 말했다. 내게 그런 말을 서슴없이 내뱉는 사람은 처음이었다. 그는 내 가치를 끊임없이 확인시켜 주었고, 나 자신이 얼마나 소중한 사람인지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사람이었다. 굳이 그렇다고 힘주어 말하지 않아도 그의 눈빛이나 미소에서 그가 늘 같은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나는 나를 잘 몰랐다. 내가 무언가가 되어야 상대가 나를 좋아할 것이라고 생각했고, 그 무언가가 도대체 무엇일까에 대해서 온 촉을 세우며 살던 사람이었다. 물론 나는 긍정적인 사람이기도 했다. 가끔은 근거 없는 자신감이나 희망으로 중무장된 사람이기도 했고, 일상 속에서 소소한 감사를 느낄 줄 아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사람들의 시선에 자꾸만 나를 끼워 맞췄고, 내가 정한 보통의 범주에서 벗어난 행동은 하지 않으려 했다. 내 안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 보려는 노력보다는 억제했고 통제했으며 선을 그어대기 바빴다.
나는 과거의 어떤 한 시점에 머물러 있던 사람이었다. 유연하게 움직이는 것 같아 보였지만 멈춰 있는 사람이었다. 썰물의 광야 같은 갯벌에서 발이 묶여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사람이었다. 나를 이 곳에서 꺼내 달라고 누군가에게는 도움을 요청해야 했지만 그럴 수도 없었다. 나는 내 이야기를 할 줄 모르는 사람이었고, 너무 말하고 싶어서 목구멍으로 이야기가 줄줄 새어 나오기도 했지만 그 이야기를 이어 나간다는 것은 머릿속 상상에서나 가능한 일이었다.
나는 시간의 힘에 기대고 있었다. 아무에게도 털어놓을 수 없으니, 시간에 기대기로 했다. 상처를 시간으로 묻어버리면 나를 괴롭히던 것들에서 자유로워질 것이라고 믿었다. 관계의 밀도가 짙어지려 할수록 꽁꽁 묻어둔 상처가 얼굴을 빼꼼 내밀고, '네 옆에 있는 상대한테 이 이야기도 털어놓을 수 없으면서, 관계는 무슨 관계?'라고 비아냥거리는 또 다른 자아가 내 마음을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나는 입을 열어야 했다. 그것이 나 자신이든, 타인이든, 한 번은 속 시원히 털어놓고 어린아이처럼 울어버려야 했다. 그렇게 보내버려야 했다. 시간은 분명 상처의 흔적을 옅어지게 해 줄 테지만, 얼마나 오래 걸릴지 모르는 일이고, 그 시간의 덕을 볼 수 있을 때쯤에는 내가 이 세상에 없을 수도 있었다.
그는 평소에 그가 하는 생각과 실제로 내뱉는 말의 결이 같은 사람이었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사람의 얼굴은 저런 얼굴이겠구나.' 깨닫게 해 준 사람이었다. 나는 그 앞에서, 지금보다 더 좋은 사람이 되기 위해서 애쓸 필요가 없었다. 억지로 내키지 않는 표정을 지어 보이지 않아도 되었다. 그저 좋으면 좋다고, 싫으면 싫다고, 불편한 것은 불편하다고 말하면 되었다. 울고 싶은 날엔 그저 울면 되었고, 사랑하면 사랑한다고 표현하면 되었다. 그는 내가 어떤 직업을 가져서 나를 좋아하는 것이 아니고, 내 외모가 화려해서 좋아하는 것이 아니고, 그저 나라는 사람 자체를 아끼고 보듬어주었다. 그 덕분에 그 자리에 10년이고 20년이고 혼자 우두커니 서 있을 것 같던 내가 바뀌었다. 다른 사람이 된 것도 같았다.
그는 해외 유학을 앞두고 있었다. 약 2년 동안의 공부를 위해 미국행이 예정되어 있었다. 5개월 후에 미국으로 떠날 사람과 연애를 한다는 것은 이전의 나로서는 감히 엄두도 못 낼 일이었다.
'과거의 내가 엄두 내지 못했던 일이라고 해서 미래의 나도 그래야만 할까?그냥 이 관계가 어떻게 되는지 한번 지켜보자.'
용기가 필요하기는 했다. 하지만 우리는 서로를 더 알아가지 않으면 안 되었다. 한정된 시간 속에서 더 애틋했고, 헤어질 날을 카운트 다운했지만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행동했다.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이 길지 않다는 것이 우리에게 약점인 줄만 알았는데 강점이 되기도 했다. 우리는 상대방이 내뱉는 말 한마디 한마디와 함께 있을 수 있는 시간의 소중함을 알 수 있었다.
그와 곧 장거리 연애를 해야 한다고 했을 때, 혹자는 이렇게 말했다.
"장거리 연애는 진짜 다시 생각해 봐. 내가 아는 사람들 중에 성공한 사람이 없어."
나는 그 앞에서 "쉽지 않죠." 애써 웃어 보였지만, 무례하기 짝이 없는 말이라고 생각했다. 그래 그의 의중은 알겠으나, 장거리 연애를 본인이 직접 겪어본 일도 아니고, 심지어 본인이 직접 겪은 일이라 한들 그것이 모두에게 적용될 것이라고 공식([장거리 연애=실패])처럼 단정 지어 버리는 것은 이해되지 않았다. 때로 우리는 상대에게 조언으로 둔갑한 충고를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그 날의 조언인지 충고인지는 무게를 두지 않고 가볍게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다.
그가 출국하고 얼마 뒤, 나는 비행기에 올랐다. 장거리 비행을 혼자 하는 것도 처음이었지만, 미국행도 내 생에 처음이었다. 디트로이트 공항(DTW)에 내려서 작은 비행기로 환승을 해야 닿을 수 있는 곳. 직항으로 갈 수 있는 곳이 아니라서 막막함도 있었지만 더 이상 나는 이전의 내가 아닌 것 같았다. 더 이상 내 마음을 모르는 체하지 않았다. 비행기에는 수화물만 실은 것이 아니었다. 보지 못한 시간 동안 꽁꽁 쌓아둔 그리움과 애틋함과 그를 다시 볼 수 있다는 설렘을 가득 싣고 탔다. 그 마음의 무게를 쟀어야 했다면, 아마 적정 허용 무게 초과로 비행기에 타지 못했을 수도 있다. 아무리 초과 금액을 지불한다고 해도 말이다.
사람과의 관계에서 추구할 수 있는 가장 귀하고 가치 있는 것은 무엇일지 생각해본다. 따뜻한 말과 눈빛, 그를 통해 전해지는 정서적 안정감, 건강한 마음,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아봐 주는 것, 그리고 그것에서파생되는 긍정적인 기운들이 아닐까. 이 기운들은 뜬구름 잡는 것들인 것 같다가도, 궁극적으로 삶의 모든 것들을 바로 세울 수 있는 가장 강력한 키가 되기도 한다.
십이월에 접어들면서 그 날의 비행기를 떠올린다. 우리가 우리만의 이야기를 지어나가는데 한 치의 거리낌 없던 그 움직임들. 한 해의 끝자락이 되면 올 한 해를 돌아보기도 하지만, 우리가 함께 있을 수 있음이 무한한 감사로 다가온다. 곧 첫눈이 내릴 것만 같은 날씨인데. 시원한 굴국 끓여놓고 먹으며 몇 시간이고 이야기하고 싶다. 우리가 서로를 알아보았던 '그 행운'에 대해서, 그리고 그 날 내가 올랐던그 비행기에 대해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