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미타불이 모든 중생을 구제해 주신다는 불가사의한 서원에 힘입어, 반드시 극락에 왕생할 것을 믿고 염불을 하겠다는 마음이 일어나는 그 순간에, 우리는 바로 여래의 은혜 속에 존재하게 된다.”
유이엔 지음, 오영은 옮김. 2012. 《탄이초》. 서울:지식을만드는지식. p.7
법장비구가 인간이었을 적에 마흔여덟 개의 서원을 세운 뒤, 열여덟 번째 서원으로 염불만 하면 극락왕생을 할 수 있다는 본원을 세웠다. 법장비구는 이 서원이 이뤄져야 부처가 되겠다고 맹세한 뒤 오 겁이라는 시간 동안 사유하여 나무아미타불이라는 염불을 생각해 냈고 마침내 성불했다. 나무아미타불. 저같이 어리석은 중생도 극락에 가는 방법을 만들어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그러니 우린 나무아미타불만 하면 된다. 이 이야기는 앞서 여러 번 반복했으므로 더는 언급하지 않을 예정이다. 이 글의 독자 중에 아미타불을 만난 분이 있다면 진실로 아미타불을 믿고 나무아미타불~하며 염불하고 계시리라 생각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제부터는 절에 다니면서 내가 궁금했던 것들을 모아 모아 하나씩 풀어보는 시간을 가져보려고 한다. 첫 번째로 절에 가서 왜 촛불을 켜는지에 관한 것이다.
2달러를 내고 촛불을 켜고 왔다.
얼마 전에 뉴욕에 갔다가 패트릭 대성당에 들렀었다. 근처에 있는 록펠러 센터에 갔다가 마침 미사 시간이 돼서 조용히 들어가 한쪽에 자리를 잡았다. 조용히 앉아 성당 안을 여기저기 바라보고 있는데 동행했던 딸이 귓속말로 뭐라 한다. 잘 들어보니 자기도 촛불을 켜고 싶다나. 어라? 촛불? 옆을 보니 정말로 초를 켜는 공간이 마련돼 있다. 와~ 성당에서도 초를 켜다니! 나는 절에서만 켜는 줄 알았는데! 성당에서 초를 켜는 이유는 그리스도를 상징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초를 켜면 주변이 환해지는 것처럼 그리스도가 항상 함께하심을 표현한 것이라고 한다. 그래서 미사가 시작되기 전에 밝히고 집에서도 기도하기 전에 밝힌다고 한다. 인터넷에 검색해 보니 그렇게 나온다. 그렇다면 절에서는 왜 초를 켤까?
나는 절에 갈 때마다 초를 켜고 왔다. 아주 두껍고 긴 초를 켜면 일주일은 간다는 말에 엄마 손을 잡고 절에 가서 항상 커다란 초를 켜고 기도했었다. 초가 녹아내리는 모습을 보면 내 근심 걱정을 다 태워줄 것만 같은 기분이었달까. 그 뒤에 혼자 절에 갈 때도 초를 켰는데 자연스럽게 내 딸도 나의 그런 모습을 보게 됐다. 갈 때마다 왜 켜는지도 모르고 그저 자기도 해보고 싶다고 쫑알쫑알하기에 그러라고 했었다. 물론 일본 사찰에서만 허용해줬다. 한국에서 파는 초는 크기가 꽤 큰데 일본 절에는 어린이가 켜도 될 정도로 작은 걸 팔아서 혼자 해보라고 해도 부담이 없었기 때문이다. 신나게 촛불을 켠 딸이 나에게 물었다. 촛불을 왜 켜냐고 말이다. 그러고 보니 절에 가서 왜 불을 밝히고 오는지는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다.
여긴 촛불 2개에 백엔!
육법공양(六法供養)이라는 말을 들어보셨는지. 나는 이 글을 쓰기 위해 조사하다가 처음 알았다. 부처님께는 공양을 올릴 수 있는 것이 여섯 가지로 정해져 있다고 한다. 와우! 이것도 처음 알았다! 육법공양은 향(香), 등(燈), 과일(果), 차(茶), 쌀(米), 꽃(花)의 공양물을 갖추고 운심공양진언(運心供養眞言)을 외며 공양의 뜻을 고하는 의식이다. 원래는 등을 켜는데 세월이 지나며 촛불로 변화해 초도 켜고 등도 켜는 방식으로 남게 됐다. 요즘은 기름 등이 아니라 전구 등을 켜니 세월이 변해도 많이 변했다.
보석사 감로도의 공양물 부분(김승희 2013: 291)
육법 공양물은 모두 각각의 상징을 가지고 있다. 향은 해탈, 등은 지혜, 꽃은 수행, 과일은 깨달음, 차는 열반, 쌀은 기쁨을 회향한다는 의미다. 조금 더 자세히 살펴보면 등이나 초를 켜는 행위는 나의 불성을 밝혀 번뇌를 멸하고 깨달음을 얻기 위함이다. 아, 나는 그동안 나만 잘 먹고 잘살겠다는 생각으로 켰는데! 공부 잘하게 해 주세요, 시험에 합격하게 해 주세요, 건강하게 해 주세요 기타 등등의 소원성취를 말이다. 지금 보니 번지수가 틀렸다. 그럼 나의 소소한 소원성취는 어디 가서 비나. 남편한테 관세음보살을 찾아가도 되냐물었더니 시험 합격이 구고구난이냐고 되묻는다. 나는 당당하게 말했다. 시험 합격을 못 하면 엄마한테 엄청나게 혼날 테니까 괴로움과 재난에 해당하는 것 같다고 말이다. 내가 말한 것이지만 정말 궁색하다. 허허.
그렇다면 촛불은 어떤 마음으로 켜야 할까? 부처님 오신 날 사찰에 가보면 명당자리일수록 등이 비싼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등의 크기도 제각각인데 엄청 큰~ 등은 가격이 또 엄청나다. 등을 켜거나 촛불을 켜려면 크기로 승부해야 하는가? 그러면 부처님이 정말 좋아하실까? 너무 당연한 이야기지만 아니다. 등을 켤 땐 온 마음을 다해 정성을 담아 켜야 한다.
빈자일등(貧者一燈)이라는 이야기가 있다. 옛날옛날, 사위국(舍衛國)에 난타(難陀)라는 여자가 살고 있었다. 하루는 그녀가 사는 마을에 부처님이 찾아올 것이란 이야기가 돌았고 난타는 자신도 부처님을 만나겠다는 생각에 시장에 나가 구걸하기 시작했다. 등을 밝혀 공양을 올려야 하는데 기름 살 돈이 없었기 때문이다. 문제는 아무리 구걸해도 기름을 살 만큼 돈이 모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다행히도 기름장수가 그녀의 사정을 봐주어 적은 돈을 받고 기름을 넉넉히 주었다. 난타는 기름을 받고 신나서 등 공양을 올렸다. 그날 많은 사람이 등 공양을 올렸고 그렇게 하루가 지났다. 다음날 아침, 다른 사람들의 등은 거의 다 꺼져가는데 희한하게도 난타의 등만 더욱더 맹렬히 타오르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부처님은 그것을 보고 난타의 정성스러운 마음을 알게 돼 제자로 받아들였다고 한다. 이후로 대웅전 앞에 놓는 석등은 빈자일등을 상징하며 한기만 놓는다고 한다. 혹시 절에 갔는데 대웅전 뜰 앞에 석등이 양옆으로 나란히 있다면 잘못된 것이다. 아무튼, 등이나 초를 공양할 때는 난타처럼 정성을 다해야 한다. 그런데 앞서 얘기했듯이 그 정성이라는 것은 나의 불성을 밝혀 번뇌를 멸하고 깨달음을 얻기 위함이다. 이번주에 복권에 당첨되도록 숫자 6개만 알려주세요가 아니다.
아~ 세상 살다 보면 코 앞의 일을 위해 복을 빌어야 할 일도 있지 않습니까라고 질문하고 싶으실 것이다. 그럴 땐 산신각이나 칠성각으로 가면 된다. 그곳에 재물과 재능을 주시는 분들이 계시니 말이다. 그러니 앞으론 전각을 찾을 때마다 그 성격을 잘 알고 찾아가시길 바란다. 물론, 나부터!
나무아미타불.
* 참고문헌 김승희. (2013). 감로도에 보이는 공양물의 내용과 그 의미: 보석사감로도를 중심으로. 미술사학, (27), 289-3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