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think togetherness is a very important ingredient to family life.
-Barbara Bush-
나는 가족생활에서 함께 하는 것이 매우 중요한 요소라고 생각한다.
-바바라 부시-
아주 가끔 모든 것이 완벽해 보이는 옆집이 있다. 넉넉한 살림에 능력 있는 남편, 심지어 원하는 방향으로 건강하고 똘똘하게 잘 자라주는 아이들, 노후 걱정 없는 양가 부모님...그야말로 행운의 여신의 축복을 받은 행복한 가정이다. 이렇게 운이 좋은 경우를 제외하고는 겉으로 문제가 드러나냐 그렇지 않느냐의 차이일뿐 각 가정마다 고만고만한 문제를 안고 있기 마련이다.
아직까지도 많이 회자 되고 있는 고전인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리나’의 유명한 첫 문장에서도 말하고 있지 않은가. “행복한 가정은 모두 비슷한 이유로 행복하지만, 불행한 가정은 저마다의 이유로 불행하다.” 라는 말은 사실 저마다의 이유로 불행을 안고사는 가정이 그만큼 많다는 뜻이기도 할 것이다.
불행해서 이혼 했으나 다시 행복하기 위해 재결합을 선택하기로 결정 내렸다면 일단 선택에 큰 의미를 부여하고 싶다. 그러나 철저한 자기 반성 없이 내가 봐준다, 살아준다, 참아준다 라는 심정으로는 억지 인연을 반복해서는 안된다.
어른의 사랑을 생각해 보자. 성숙한 남녀가 사랑을 할 때 현재와 미래를 생각하지 과거를 캐묻지 않는다. ‘지금의 나’를 만나기 까지 어떤 과거가 있었는지 어떻게 만나고 어떻게 헤어졌는지 이별의 이유가 무엇이었는지 묻지 않는다. 우리 모두 미성숙한 연애 경험을 통해 굳이 상대의 과거를 파고든다는 게 얼마나 치졸하고 의미없고 칼에 벤 상처에 소금을 뿌리는 행위임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재결합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심사숙고 끝에 재결합을 결정했다면 부부관계의 핵심 축이 ‘나’와 ‘배우자’가 만드는 ‘우리’ 라는 것도 잊으면 안된다. 아이 때문에 모든 것을 다 참고 억지로 부부관계를 이어 나간다는 건 자녀를 두 번 죽이는 일이다. 많은 부모들이 아이 앞에서 싸우지 않겠다고 다짐한다. 그러나 단순히 싸우지 않는다는 사실보다 더 중요한 게 있다.
어린 시절, 나의 부모님도 참으로도 많이 싸우셨다. 엄마와 아빠 모두 성격이 정반대 였는데 지금은 엄마는 아빠의 소심하고 꽉 막힌 성격을 답답해 하셨고, 아빠의 엄마의 센 경상도 말투 만큼이나 괄괄한 성격에 상처 받곤 했다. 돌이켜 보면 두 분은 사춘기인 내가 보기에도 참 사소한 일로 다투곤 하셨는데 대체 이런 식이었다.
“당신은 왜 내 허락도 없이 티셔츠를 버렸어?”
“아이고~산지 십 년도 더 돼서 헤질대로 헤졌는데 그걸 좋다고 또 입으려고?”
“아직 충분히 더 입을 수 있는데, 내가 아까지는 티셔츠잖아.”
“당신 그런 거지같은 옷 입고 외출하면 마누라인 내가 욕 먹어.”
“뭐? 거지?”
“그래! 거지!”
이렇게 사소하게 시작한 싸움은 서로 말꼬리를 잡고 늘어지면서 서로의 성격에 대한 문제, 그리고 빠듯한 살림에 대한 얘기로 주제를 옮겨가며 하루 종일 싸울 때도 있었다. 그러나 나는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 같은 주제로 계속 싸우시는 부모님의 부부싸움이 나와 혹은 이미 결혼 해서 살고있는 오빠에게 별로 부정적인 영향을 낳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오히려 자식 앞에서 싸우는 걸 부모들의 큰 과오로 지적하공 있는 심리학자, 가족 상담자 들이 너무 오버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책을 준비하면서 여러가지 참고 문헌들도 뒤져보고 개인적으로 상담을 받아보면서 깨달은 사실이 있다. 바로 부모의 싸움으로 인해 짜증과 불만이 생길지 언정 불안에 떨지 않았다는 점이다.
사춘기 시절, ‘아 그냥 엄마의 경상도 말투를 하루 이틀 겪은 것도 아닌데 왜 자꾸 아빠는 엄마의 말투를 지적해서 긁어부스럼을 만들까’ 혹은 ‘왜 아빠는 다 지난 일을 또 끄집어 내서 엄마와 쓸모없는 입씨름을 할까’와 같은 짜증과 아쉬움은 있었다. 그러나 혹시 이러다가 엄마 아빠가 이혼하는 건 아닐까, 만약 이혼하게 되면 난 누구와 함께 살아야 하지 하는 생각으로 불안에 떨지 않았다. 또한 나는 두 분 모두에게 충분한 사랑을 받았다고 자신하고 살고 있다. 나이가 마흔이 다 되었지만 건강하고 자식에게 의지않는 충분히 독립적인 부모님은 지금도 나의 든든한 빽이다.
2020년 초반부터 시작해서 한국 뿐 아니라 전 세계를 움츠러 들게 만든 코로나19에 대한 국가별 대처를 살펴 보자. 정부에 대한 강한 불신과 코로나 바이러스에 걸리는 순간 보호받지 못하고 죽을 수도 있다는 불안을 느끼게 한, 소위 선진국이라 불리는 국가들에선 생필품 사재기 폭등이 일어났다. 통상적으로 선진국이라고 불리우던 나라에서 벌어진 일이라 더욱 놀랐다. 그러나 한국은 그러지 않았다. 정부의 대처가 국민의 100퍼센트를 만족시키지는 못하더라도 (그럴 수도 없는 노릇이고) 그래서 불만이 생긴다 한다 한들, 정부의 대처로 불안해 하지는 않았다. 왜 정부의 지침이 이런거야- 하는 불만과 내가 코로나 19에 감염되면 죽을 수도 있는거 아닌가 하는 불안은 너무 다른 개념이다. 그래서 우리 대한민국은 전 세계가 깜짝 놀라할 만한 자세로 평온하게 대처한다. 생필품 사재기는 우리가 선진국이라고 여겨왔던 남의 나라 이야기가 됐다.
부부싸움을 아이 앞에서 하지 말라는 이유 역시 같은 개념으로 이해할 수 있다. 싸우지 않고 부부간에, 그리고 부모와 자식 간에 사랑과 존경만 뿓어지면 좀 좋으랴. 그렇지만 현실적으 로 불가능 하다고 봤을 때, 단순히 자식 앞에서 싸우는지 아닌지 단순히 부부 싸움의 유무로 자녀의 정서를 파악할 필요는 없다. 자식에게 있어 눈 앞에서 부모가 싸우고 있는 상황보다 더 최악인 것은 서로를 미워하고 경멸하면서 자식 때문에 이혼 하지도 못하고 사는 부부들이다. 집 안에서 서로 필요한 얘기 외에는 대화하지 않는 부부, 스킨십은 고사하고 각자의 방식대로 자녀하고만 대화하는 부부는 투닥투닥 하면서도 평소에는 잘 지내는 부부보다 자녀에게 훨씬 더 악영향을 미치게 되는 것이다. 자녀에게 있어서 난 태어나지 말았어야 했다, 우리 부모님때 나 때문에 헤어지지도 못하고 저렇게 인생을 저당 잡혀 사는 구나 하는 죄책감을 씌우는 것만큼 무책임한 행동은 없다. 이런 부부는 깔끔하고 젠틀하게 이혼한 이후에 양육자로써, 비양육자로써의 각자의 삶을 사는게 최선의 선택이다.
나의 경우도 꼭 같았다. 자식의 입장에서 부부싸움을 지켜보는 게 결코 유쾌한 일은 아니겠지만 사람으로 태어나서 이 세상의 크고 작은 상처를 받지 않을 수는 없다. 받은 상처를 스스로 해독하며 면역력을 갖기 위해서는 부모님께서 많이 다투는 모습이 눈 앞에서 펼쳐지더라도 부모님이 나 때문에 억지로 삶을 희생하며 사는 것이 아니라는 확신과 믿음이 있었다.
결국 재결합을 생각하면서 당장 아이가 아빠 없는 (제한적으로 보는) 아이를 만들어 주기 싫다는 생각으로 결국 아무런 반성 없이 재결합을 쉽게 생각하다 가는 아이에게 더 큰 상처를 두 번씩이나 주는 결과를 초례한다.
재결합이 옳으냐 그르냐에 대한 정답은 없다. 깨진 그릇을 도로 붙일 수 없다는 말도 맞고 상처를 견디고 더 단단해졌다는 관계도 있다. 즉, 관계를 어떻게 빚어나갈 것인지는 자기 자신에게 달려 있는 셈이다. 죽기보다 싫은데 오직 아이 때문에 재결합을 생각한다면 이미 깨져버린 관계에 가깝다. 배우자보다 아이를 우선시 했던 잘못된 우선순위가 결혼생활에 금이 가기 시작했던 시발점이라는 것을 잊지 않도록 하자. 상대에 과거를 캐묻고 집착하는 건 새로 시작하는 평범한 연인들 사이에서도 매너가 아니다.
반복은 없다. 다시 시작하라. 아이 문제를 차치하고서라도 서로가 필요했음을, 서로를 원하고 있음을 상대에게 보이는 게 과거의 실수를 반복하지 않는 첫 걸음이다.
가까운 친척이 오래 전 이혼을 했다. 어린 내가 보기에도 가장 사이가 좋아 보이는 친척 어른 내외였기에 내가 받는 충격은 상당했다. 우리 집은 내가 어린 시절 외가에 놀러가서 친척들 앞에서 큰 소리를 내며 싸운 적이 있었기에 난 늘 마음 한 구석으로 금슬 좋은 부모를 둔 그 외사촌의 집안 환경을 부러워했었다. 내비게이션 없이 운전하면서 종이 지도로 도로 찾기가 일상이던 시절, 부모님은 서로가 주장하는 길이 맞다며, 비난을 했다. 그 길 찾기로 시작된 말다툼은 주제를 옮겨가며 서로가 얼마나 말이 통하지 않는 사람인지로 늘 결론이 나곤 했다.
지금 돌이켜 보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모님은 말 싸움 도중에 자리를 뜬다거나 전업주부인 엄마가 식사를 차리지 않는다거나, 화가 난 아빠가 밖에서 술을 진탕 마시고 늦게 들어온다 거나 한 적이 없었다. 나의 성장기 부모님의 싸움에 불안에 떨지 않았던 이유 이기도 하다.
훗날 그렇게 이혼한 외삼촌의 아들인 외사촌을 만났다. 수년 동안, 사춘기와 부모님의 이혼과정을 동시에 겪으며 그 친구도 많이 방황을 하고 아직까지 부모에게 받은 상처가 치유되지 않아 보였다.
너무 오랜만에 만난 친척 동생이라 어색하게 밥을 먹으며 서로의 안부를 간략하게 주고 받은 뒤 그 동생은 나에게 이런 말을 남겼다.
“고모와 고모부(즉, 나의 부모님)의 부부싸움이 나는 부러웠어. 별것 아닌 문제로 싸우고 화해하는 그 과정이 내가 보기엔 진심으로 정상인 가정처럼 보였거든. 우리집은... 겉으로는 반짝 화목해 보였을지 몰라도, 싸움이 잦아지면 엄마는 외가로 가버리고 아빠는 술을 마신 채 늦게 오시거나 외박까지 했어. 그걸 보면서 나는 만약 두 분이 이혼하면 어쩌지, 아무도 나를 안 키운다고 하면 어떡하지 불안해 했었어. 학년이 올라가니까 이제 이런 생각이 들더라고. 내가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난 것도 아닌데 저렇게 서로 못살겠다고 비난하는 부모님을 보니까 아...내가 태어나지 말았어야 했구나. 누나는 모를거야. 존재가 미안한 느낌...태어나서 죄송한 느낌...”
나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그 대화로부터 수년이 지난 오늘날에서야 생각했다.
이혼한 많은 부부들이 자식은 아무런 죄가 없다는 명제에 서로 동의 하면서도 자식을 위해서 참고 살기면 하면 된다는 나이브한 생각을 갖는 다는 것에 대해 개탄을 금할 수가 없다.
반복하지 않기를 바란다. 다시 시작하기를 바란다. 지옥을 반복하지 않기를 바란다. 아이 때문에, 체면 때문에, 구관이 명관이라 라는 의미로 관계를 붙잡지 말고 다시 시작하기를 바란다. 실수한 남편을 진심으로 이해하고 용서하라. 남편과는 다른 방향으로 남편을 배신했던 점 즉, 남편을 돈 버는 기계로 여겼거나 인정하고 대우하지 않은 점에 대한 서로의 반성과 용서없이는 지옥의 반복 및 아이들에게 부모님의 이혼과 재혼 그리고 재 이혼으로 통한 상처를 안길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