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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허경심 Apr 04. 2021

아무리 기쁜일을 찾아 해도 기쁘지가 않다

 

 공황장애 환자들이 힘든 건 언제 또 공황발작이 일어날지 모른다는 불안감, 즉 예기불안 때문이다. 죽을 것 같은 고통을 이미 느껴봤기에 더욱 불안하다. 그러다보면 일상생활의 범주가 많이 줄어든다. 운전을 못 한다든지, 대중교통 이용을 못 한다든지, 사람이 많은 곳에는 못 간다든지. 특히 특정 장소나 상황에서 발작이 일어났다면  그 장소나 상황을 더욱  피하게 된다.  그래서 예기불안으로 인해 우울증이나 불면증, 건강 염려증, 대인기피증 등이 동반되기도 한다. 나 또한 생활 반경이 이전과 달리 많이 줄어들면서 자연히 우울해졌다. 예민해졌고 아픈 사람이라는 특권의식을 가지게도 되었다. 그렇기에 조금이라도 신랑이 나를 위해주지 않거나 이해해주지 않으면 서운하고 화가 났다. 뭐든 부정적으로 생각하게 되었고 만사가 불만이었다. 이 시기 동안 신랑과 가장 많이 싸웠던 거 같다.      


 이런 나를 조금이라도 기쁘게 해 주려 가족들은 노력을 많이 했다. 엄마는 구피 어항을 예쁘게 꾸며 선물해주기도 하고 꽃을 사와서 화병에 꽂아주기도 했다. 신랑은 풍성하게 핀 국화와 카랑코에 화분을 사오기도 했고 예쁜 옷을 사주기도 했다. 그런데 그런 것들이 하나도 기쁘지 않았다. 그저 무감각했고 무관심했다.


 공황장애 사개월차에 내 생일을 맞이했다. 신랑은 모처럼 굉장히 고급지고 맛있는 식당을 예약했다. 요리사가 오직 우리 가족만을 위해 철판에 요리해 주는 식당이었다. 현란한 요리 동작과 불쇼도 보여주었다. 그런데 그 와중에 나는 옆 테이블 요리사와 우리 테이블 요리사를 자꾸 비교했다. 옆 테이블 요리사는 젊고 활기차고 유쾌했다. 우리 테이블 요리사는 나이 들었고, 얌전하고 재미가 없었다. 음식은 대체로 맛있었지만 이 가격을 주고 오기에는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식당 이미지와 어울리지 않는 지저분한 화장실도 마음에 안 들었다. 온통 부정적인 생각뿐이었다. 한편 신랑이 내 기분이 나이지도록 자기 나름대로 노력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전혀 나아지지 않는 나 자신이 싫었다. 기쁘고 싶고 활기차고 싶어도 내 의지대로 되질 않았다. 슬픔과 짜증과 우울과 불안이 한 대 섞여 집으로 돌아왔다. 오자마자 바로 침대에 누웠다. 자기 딴에는 특별히 준비한 이벤트에 어떤 반응도 없고 뾰로통한 나에게 신랑은 그만 폭발해버렸다. 그간 참아온 온갖 비난과 경멸의 말을 나에게 쏟아 냈다. 그런데 하나도 서운하지 않았고 화나지도 않았다. 그런 신랑이 충분히 이해되었고 오히려 미안했다. 슬펐다. 이런 상황을 바로 옆에서 지켜 본 아이에게 또다시 나의 어린 시절과 같은 환경에 노출시킨 것 같아  마음이 불편했다. 엄마 아빠가 싸우는 모습을 보며 무섭고 불안했을 아이에게 어떤 말을 해 주어야 할까? 고민하다가 영화 <터널>을 생각해 냈다.      


 영화 <터널>의 주인공은 평범한 자동차 영업사원이다. 그가 자동차를 타고 터널을 지나가다가 무너저 내린 터널 안에 갇혀 구사일생으로 살아나오는 것이 영화의 큰 줄거리다. 영화는 우리 사회의 모순들, 이기적인 인간들의 모습을 굉장히 잘 그려냈다. 나는 당시 이 영화를 보면서 비뚤어진 사회를 꼬집는 부분보다 주인공 부부의 가족애에 집중했다. 터널에 갇힌 주인공이 언제 구조될지 아니 구조가 되기는 할지 막연한 두려움과 공포에서 끝끝내 살아나올 수 있었던 것은 가족의 사랑 덕분이었다. 라디오 방송으로 끝가지 힘을 준 아내와 아직 어린 딸에 대한 사랑의 힘이었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이 인상 깊었다. 터널에 대한 트라우마가 있는 주인공이 차를 타고 다시 터널을 지날 때 긴장한다. 그때 아내가 손을 꼭 잡아주고 둘은 무사히 터널을 통과한다.


 나는 부부싸움 현장에서 무서웠을 아이에게 영화 이야기를 하며 이렇게 말했다.

 “지금 우리도 그 터널에 있어. 그래서 좀 힘든 거야. 그런데 아빠랑 엄마랑 또 00이랑 함께 힘을 모으면 우리는 그 터널을 빠져나갈 수 있어. 그러니까 걱정하지 마. 엄마가 더 힘 내볼게.”

 아이에게 미안해서 꼭 안아 주었다. 아이가 나가면서 해맑게 말했다.

 “엄마 힘내요. 사랑해요.”

 흐르는 눈물을 참을 수가 없었다.     


 내 앞에 고난이 닥쳤을 때 늘 하던 나의 생각패턴은 굉장히 극단적이었다. ‘안 되면 말지 뭐. 까짓 거 죽으면 그만이지.’ 라는 극단적인 생각으로 곧장 달려갔다. 나를 소중하다고 생각한 적이 없기에 나를 살리고 지키려는 의지가 부족했다. 그럴 때면 지금 앞에 닥친 고난을 헤쳐나갈 의욕은 사라지고 괴로움만 남았다. 이제는 그 패턴을 부숴야했다. 나에게는 너무나 사랑스러운 아이가 있고 나를 사랑해주는 남편이 있으므로. 어쩌면 신랑 말대로 나는 감정조절이 안 된다는 핑계를 대고 있었는지도 몰랐다.  그날 아이에게 영화 <터널>에 대해 이야기한 뒤 내가 아니라 우리 가족을 위해  일어서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계속해서 감정이 이끄는 대로 끌려가지 말고 부정적인 생각으로 끌려가지 말자고 다짐했다.

 살다보면 모든 걸 포기하고 싶을 때가 있다. 그럴 때 우리가 생각해야하는 건 ‘내’가 아니라 ‘가족’이다. <터널>의 주인공이 그랬듯 가족을 생각하면 좀 더 버틸  수 있고 끝끝내 이겨낼 수 있다. 기쁜 순간은 내가 행복할 때도 찾아오지만 더 큰 기쁨은 내 가족이 행복할 때 찾아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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