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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뢰렉신 Apr 29. 2019

사랑이 식어갈 때

그녀의 사랑만 식어서 아프다


바사삭하고 부서졌다.


외투 주머니 속에서
만지작 거리던 쿠키 하나가
손가락의 악력을 이기지 못하고
여러 조각과 셀 수 없는 가루로
주머니 안을 어지럽혔다.  


이왕 이렇게 된 거
다른 조각난 쿠키 조각마저
하나씩 찾아내 엄지와 검지로
처절하게 으깨버려 가루화 시키면서

뭔지 모를 집중력이 발휘되었다.


'바보.....'


아래 입술을 질끈 깨물며
조금 전 있었던 그녀와의 대화를 리플레이시켰다.


"사랑하지 않아... 오래전부터..."


는 정직해 보이는 목소리로 내뱉었다.


"왜? 어째서? 언제부터? 내가 무슨 잘못이라도 했던 거야? 응? 말해봐 봐 응?"


나는 속사포같이 쏘아붙였지만 그녀는 표정의 변화 없이 뭔가 말하려는 듯 입을 씰룩거리더니 이내 한숨을 얕게 뱉었다.


"휴... 아냐... 만 얘기하자. "


"뭘 그만 얘기해, 도대체 너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거니?"


그녀는 대답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성큼 카페 문을 열고 나갔고,


나는 그녀가 나간 빈자리를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언제부터 나를 사랑하지 않게 되었을까?

3년이라는 연애.

서로의 새로움은 이제 발견해 낼 수 없는 시점이 오기는 했다. 이제 익숙하고 예측이 가능한 그녀와의 대화들과 편해진 관계에서 자연스레 불거져 나오는 서로 맞지 않는 자잘한 일상의 요소들.


만난 지 얼마 안 된 상황이라면 이런 것들을 맞춰나가는 것도 하나의 관문이고 연애의 맛이라고들 하지만, 우리는 벌써 오래전 그런 과정을 겪었고 나름 많은 대화를 통해 서로의 일상적 상식을 많이 맞춰놓은 상태였다.  


그러나 이런 상황이 오니까, 정신이 번쩍 들면서 그녀가 근래, 아니 좀 오래전부터 나를 대하는 태도 하나하나가 조금씩 변해왔다는 것에 대해 이제야 깨닫기 시작했다.


쉴 새 없이 떠들던 우리의 대화도 침묵의 간격이 생기기 시작한 것은 이미 오래전이었고, 각자 지금 뭘 하고 있는지 궁금하지 않게 된 것도 좀 된 거 같다. 약속이 취소되어도 그냥 그런가 보다 했고, 로 바빠서 만나는 날도 서운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기 시작했다.


곰곰이 최근 그녀와의 소통을 떠올려보니 짜증을 내는 빈도가 조금 많아지긴 했던 거 같다. 그리고 연락은 원래 서로 긴밀하게 안 하던 사이라서 그런가 보다 했지만, 뭔가 이젠 관계의 진척을  위한 노력은 하지 않는구나라는 생각이 든 건 요 근래가 확실하다.


그러나 나는 뭐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이 정도의 연애기간이라면 누구나 느슨해지는 건 있지 않나? 오히려 서로 편해진 이 관계가 완성형 단계에 들어선 게 아닌가 하며 오히려 안심을 했지, 이 분위기를 부정적으로 생각해보지 않았다. 그러나 그런 나와는 달리 그녀의 생각과 마음은 크게 달랐던 모양이었나 보다.

 


왜 마음이 변했던 걸까?

여자의 마음이 변하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이 친구는 꽤나 성숙한 연애 가치관을 가지고 있었고 서로의 성격에 장단점을 잘 알고 잘 맞춰주며 지내왔다.


또한 서로 종종 장난 어린 말투로 "너 성격은 지구 상에서 나 외에는 아무도 못 받아 줄걸?" 하며 '너는 나밖에 없어'란 신념을 서로에게 심어주곤 했었다.


그게 나는 시나브로 세뇌가 되어 정말 이 여자 외에는 나 같은 또라이(?)를 사랑해 줄 여자는 없을 거야 했었는데, 그녀는 이젠 그 또라이가 싫어졌나 보다.


다음날 저녁 늦게 그녀의 집 앞으로 무작정 찾아갔다. 그리고 전화로 집에 있는 것을 확인하고 잠깐이라도 얼굴 좀 보자고 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사랑이 식어버린 그 이유를 명확히 듣고 싶었다.


그래야 뭔가 오해를 하고 있다면 합리적 변명으로 이 위기를 돌파하고 싶었고, 납득이 되는 이유라면 반전시키려 눈물 콧물 쏟으며 무릎 끓고 빌던지 아니면 최악의 경우 이별행 기차 티켓을 끊고 탑승만을 기다려야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기다리는 동안 서늘한 마음으로 하늘을 바라보니 제길 하필이면 별들이 유난히 아름답게도 반짝이는 밤이었다. 한 10분쯤 지나자 트레이닝복 차림의 그녀가 어두운 얼굴로 내 눈을 마주치지 못한 채 내 앞에 다가섰다. 애써 그녀의 눈과 맞추려 고개를 아래에서 위로 들며 말을 걸으려 했지만, 여전히 그녀는 내 눈을 피했다.


해서 그냥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뭐가 문제인지 말해 줄 수 있니?"



그렇게 사랑은 식어갔단다.

뭔가 계속 망설이는 표정과 뭔가 계속 내뱉으려다 가까스로 참으려는 입모양이 나를 더 궁금하게 만들었다. 그냥 내가 받을 상처 따위는 상관하지 말고 속시원히 이유를 말해주었으면 좋겠다 하니, 결국 그녀는 뾰족한 칼끝으로 내 심장을 깊숙이 찌르는 말 한마디를 내뱉었다.


"이유가 뭐가 있겠어. 그냥 좀 다르게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


나는 그녀의 그 한마디가 많은 걸 함축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지금까지 나와 쌓아 온 많은 이야기들과 일상들을 묻어버리고 이젠 다른 삶의 이야기들과 일상들을 찾아가겠다는 뜻이었다.


이보다 더 완벽한 이유는 없었다. 


내가 무언가로 그녀를 크게 실망시켜서 사랑이 식은 것도 아니고, 그녀가 다른 사람이 생겨 헤어지겠다는 것도 아니고, 그냥 자기 삶의 패턴을 바꿔야겠다라는데, 나는 뭐라고 변명할 거리도 없었고 더군다나 회유할 엄두도 나질 않았다.


그녀 삶의 패턴을 바꾸기 위해 가장 먼저 아웃시켜야 하는 1번 타자는 바로 나였기 때문이었다.


그 뒤에 이어진 그녀의 '사랑이 식은 이유'를 몇 가지 더 말해주었지만, 내 귀에는 들리지 않았다. 그리고 그녀의 머리속에는 자신의 일상에서 나를 떨어내고 싶은 생각이 온통 지배하고 있었기 때문에, 내가 어떤 이유나 변명을 한다 해도 마음을 되돌리기에는 이미 늦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녀의 사랑만 식어서 아프다.

더 이상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그 말을 듣는 게 너무 힘들었다. 나는 전혀 예측할 수 없었던 상황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동안 자신이 받았던 사랑을 떠올려 보면 그 받은 사랑들이 그녀를 가만히 두지 않았을 텐데, 그걸 이겨내고 식은 사랑을 더 이상 데우려 하지 않았던 그 마음이 너무 서운하고 괘씸한 마음이 들어 그녀에 대한 회의감이 엄청난 후폭풍으로 밀려들어왔다.


'사랑의 온도'


그것은 한 사람만이 데워서는 유지되기 힘들다. 둘이 서로 아무리 사랑한다고 하지만, 어차피 결국 한쪽은 덜 사랑하기 때문에 시간이 지나면 서서히 식어가는 게 당연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우리가 처음 사랑을 시작하게 된 열정의 온도는 분명 서로의 의지가 불꽃처럼 튀면서 끓어올랐겠지만 시간이 흐르면 서서히 그 불꽃은 사그라들며 숯처럼 누그러져 잔잔한 온돌방의 온기로 응근해지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녀는 그 응근해진 사랑에 회의를 느꼈나 보다. 그리고 불꽃처럼 튀는 사랑에서 늘 삶의 에너지를 찾아왔던 사람이었다면 지금의 상황은 절망과 허탈감의 연속이었겠지.


나는 그녀가 그렇게 오랜 기간 나와의 관계를 참아왔을지 모른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리고 모든게 내 탓으로 지금의 상황을 반성했고 그녀를 향한 애잔한 마음을 갖기 시작했다.  



누그러진 사랑이 누구의 잘못은 아니다. 어떤 연인이든 다 그렇게 안착이 될 뿐이다. 그러나 그것으로 사랑이 식었다는 생각으로 증폭시키고 서운함과 배신감으로 뻗쳐 나와 스스로에게 압박을 가하기 시작하면 결국, 본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그런가 보네, 변했나 보네"하는 궁지에 몰린 심정으로 관계를 극단적인 선택으로 몰고 간다.


'사랑이 식었을 때'


그 무엇보다도 서글픈 감정이 든다. 분명 처음엔 그 사람에게 반하여 사랑이 시작되고 숙성되었던 과정들을 하나하나 떠올려보면 그만큼 세상에서 제일 행복했던 시간들도 없었을 텐데. 그걸 떠올려내지 못하는' 망각의 뇌'가 너무나 원망스럽다.


얼마나 재미있었던 이야기들이 많았는데,

얼마나 행복했던 웃음들이 많았는데,

세상에 우리 둘만 알던 그 기억들을 

이제 다시 나눌 수 없다니,

가슴이 찢어지고

내 두 다리가 허물어지는 아픔을 느낀다.  


아.... 왜 사랑은 유지되기 힘든 걸까.

그 깊은 번뇌를 안고,

오늘도 내 눈물 한잔을 소주처럼 마시고 있다.






마지막으로 진상을 부려보자면,


변하는 마음이었다면
애초부터 그녀
사랑했던 적이 없었던 것이다.


호기심이, 

관심이 이제야 끝난 것이다.

그것을 감히 '사랑'이란 단어로 표기해서는 안된다.


감히

사랑이라 할 수 있는 것은,


상황이 변하고 나이를 먹고,
고귀함이 없어진다 해도,

머리에 키스를 하며,


"네가 좋아"


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나는 그럴 수 있었는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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