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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책다람쥐 Oct 07. 2023

내가 뭘 하고 싶은지 알기 힘든 이유

| 나중에 커서 뭐가 될까 |

 알랭 드 보통은 그의 책 <뭐가 되고 싶냐는 어른들의 질문에 대답하는 법>에서 '나중에 커서 뭐가 될까?'라는 질문은 오랜 역사를 가진 질문이 아니라고 말한다. 그는 15~16세기 몇 세대에 걸쳐 그림을 그렸던 벨리니 가문을 예로 들며 지난날의 인류는 고민할 필요도 없이 부모님이 하던 일을 물려받았다는 사실을 일깨워준다. '나중에 커서 뭐가 될까?'라는 질문 없이 운명처럼 주어진 일을 했던 벨리니 가문의 한 사람을 떠올려본다. 그가 살던 시대에는 사람들이 하는 일의 종류도 지금처럼 많지는 않았을 테지.


 사회가 발전하면서 사람들이 하는 일은 점점 더 세분화되었고, 새롭게 생겨난 직업도 많다. 모차르트가 11루이도르를 지불했던 마부의 일은 사라졌지만 그 시대에는 없던 버스, 지하철, 택시, 기차, 비행기가 새로운 일자리를 창출한 것처럼 말이다. <2020 한국 직업사전>에 나오는 우리나라 직업수 현황은 무려 16,891에 육박한다.

2020 한국직업사전 통합본 제5판에 나오는 직업수 현황

 오늘날 사람들이 하는 일은 이렇게나 다양하다. 하지만 '알고 있는 직업을 말해보세요'라고 했을 때 우리는 몇 가지나 말할 수 있을까? 어른들도 그렇지만, 어른들보다 주변에서 보고 듣는 게 적은 중학생은 잘 알려진 직업 몇 가지 외에는 말할 수 있는 직업이 더더욱 별로 없다. 

 

| 내가 뭘 하고 싶은지 알기 힘든 이유 |

 '자기 이해'와 '직업 세계 이해'라는 두 축으로 진로 수업을 하고 있는데, 자기가 어떤 일을 하고 싶어 하는지 알기 힘든 이유도 이 두 축으로 설명되는 것 같았다. '나는 어떤 성향과 능력을 가진 사람일까'(자기 이해)와 '내가 선택할 수 있는 직업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직업 세계 이해)에 대한 대답이 어려울수록 뭘 하고 싶은지도 말하기가 어려워진다.


 문제는 이 두 질문에 대한 답을 가까스로 내놓는다고 해도 시간이 흐른 뒤에는 그 답이 유효하지 않을 수 있다는 점에 있다. 특히 직업 세계의 변화는 사회 변화의 속도에 따라 한층 더 가속화되고 있다. 사회 구성원의 직업 가치관 변화에 따라 특정 직업을 바라보는 시선이 바뀌기도 한다. 진로 수업에서는 이 점을 염두에 두되, 현재에 발을 딛고 있는 우리가 할 수 있는 탐색을 해나가는 일이 필요하다고 여겼다.


 '내가 잘 몰랐던 일 중에 혹시 내가 하고 싶은 일이 있는 게 아닐까?'라는 생각을 해본 적이 있다. '세상에 이런 일을 하는 사람들도 있다는 걸 십 대에 알았더라면 내 공부의 방향이 달라졌을까?'하는 생각과 함께 말이다. 나의 중학생 시절처럼 알고 있는 직업이 너무나도 한정적인 학생들의 시야를 넓혀주기 위해 학생들이 정확히 무슨 일을 하는지 잘 모를 것 같은 직업이나 자주 접하지 못하는 직업 몇 가지를 추려보았다. 변리사, 임상병리사, 물리치료사, 관세사, 공인노무사, 회계사, 군무원, 공항보안검색요원, 외환딜러, 국회의원 보좌관, 보험심사평가사, 산림병해충예찰방제원, 철도관제사, 세무사 등의 직업명과 하는 일 설명이 A4 앞뒤를 가득 채웠다. 


| 우리 수준에 맞추어, 5초씩 이어그리기 |

 이 수업의 목표는 학생들이 '이런 직업이 있구나'와 더불어 '이 직업을 가진 사람은 대략 이런 일을 하는구나'를 알 수 있게 하는 것이었다. 내가 나눠준 자료를 읽기만 해도 이 수업의 목표는 어느 정도 달성이 될 터였다. 하지만 읽을 자료를 받아 든 중학생이 그걸 꼼꼼하게 읽을 거라고 생각한다면 크나큰 오산이다. 학생들이 제대로 읽지 않을 테니 교사가 설명을 해주면 되지 않을까 생각하는 것도 요즘 중학생 상태(?)를 모르고 하는 말이다. 교사의 설명이 길어지면 위험하다. 설명 시간과 '몸은 여기에, 정신은 다른 곳에'를 표방하는 학생의 수는 정비례 관계이다.


 그래서 '5초씩 이어그리기' 게임을 계획했다. 나누어준 자료에 나오는 직업명을 쪽지에 3장씩 적었다. 같은 내용의 쪽지를 받은 3명의 학생이 5초씩 그 직업에 대한 설명을 읽고 알게 된 내용을 이어 그리게 할 용도였다. 

 3명이 이어 그린 그림을 보고 친구들이 그 직업명을 맞추면 성공이고, 못 맞추면 실패라고 설명했다. 숫자나 문자를 제외한 그림만 그릴 수 있다는 점도 강조했다. 친구들이 자기 그림을 보고 그 직업명을 맞추게 하려면 어떤 그림을 그려야 할지 생각하기 위해 직업에 대한 설명을 꼼꼼하게 읽어봐야 하고, 또 친구들이 그린 그림을 맞추기 위해서도 자료를 읽어볼 수밖에 없다. 좀 더 정확할 순 있으나 재미는 없는 교사의 설명보다 도저히 알아볼 수 없는 그림이라도 웃어가며 볼 수 있는 친구의 그림은 학생들을 집중시키는 데 있어서 비교 대상조차 되지 않는다. 


 첫 번째 학생이 나와 아래와 같은 그림을 그렸다. 앉아있는 아이들이 말했다. "브라키오사우루스?"

 우리가 알아볼 직업명에 브라키오사우루스는 없었지만, 내가 봐도 브라키오사우루스랑 비슷해 보이긴 했다. 브라키오사우루스 볼에 붙은 저 반창고는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궁금했지만 이 게임은 3명이 이어그리기를 마친 뒤 정답자가 나오는지 안 나오는지를 보고 그다음에야 그림의 의미를 묻는 시간을 가질 수가 있다.

 3명의 이어 그리기가 끝났다. 이 글을 읽으시는 분들 중 이 그림이 설명하는 직업을 맞춘 분이 있을지 궁금하다. 과연 이 그림은 어떤 직업을 설명한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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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답은 변리사이다. 학생들이 받은 자료에는 변리사에 대한 설명이 아래와 같이 적혀있었다.

변리사의 업무는 크게 산업재산권 출원 대리 업무와 산업재산권 분쟁에 관한 심판 및 소송 대리로 구분할 수 있다. 첨단기술의 발달과 함께 지식재산권의 창출 및 보호에 변리사의 역할은 날로 커지고 있다.


 이제 브라키오사우루스의 정체에 대해 물어볼 시간이 되었다. 학생이 대답했다. 브라키오사우루스가 아니고 사람 머리를 그린 것이며, 저건 반창고가 아니라 '지식재산권'을 표현한 거라고 했다. 서류와 화난 사람을 그린 학생은 '소송'을 저렇게 그렸다고 말했다. 


 때로는 설명이 필요 없을 정도로 그림이 무엇을 말하는지가 확실하게 보이는 경우도 있었다. '관세사' 쪽지를 받은 첫 번째 학생이 나와서 그린 그림이 그랬다.

 우리나라와 이웃나라 사이에 오고 가는 화살표를 그려서 수출입을 표현했다. 나눠준 자료에서 관세사에 대한 설명은 아래와 같았다.

관세사는 수출입 과정에서 통관업무 대행을 맡아한다. 수출입을 하자면 세관 통과에 필요한 신고서 등 관련 서식 작성과 복잡한 서류 등을 구비해야 한다. 만일 바나나를 수입해 오려는 무역업자가 있다면 바나나 원산지가 수입 가능 지역인지부터 따져야 하고 식물검역기관이 발행하는 식물검사 증명서 취득 등 신경 쓰며 챙겨야 할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사업자 입장에서 수출입 관련 법령을 일일이 꾀고 제대로 대처하기도 힘들다. 이 때문에 관세사의 도움을 필요로 한다.

 두 번째 학생은 이 설명에서 눈에 들어온 단어가 바나나 밖에 없었던지 그다음으로 나와서 바나나 하나를 그리고 들어갔다. 첫 번째 학생이 큰 역할을 해준 덕분에 바나나로도 충분한 굳히기가 되었고 이 팀은 무난히 '관세사'라는 정답을 이끌어냈다.


|  내가 잘 몰랐던 일 중에 혹시 내가 하고 싶은 일이 있었던 게 아닐까 |

 '나는 어떤 성향과 능력을 가진 사람일까'(자기 이해)와 '내가 선택할 수 있는 직업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직업 세계 이해)에 대한 대답이 어려울수록 뭘 하고 싶은지도 말하기가 어려워진다. 중학생 시절의 나는 자기 이해 능력도 떨어졌고, 직업 세계에 대한 이해는 밑바닥 수준에 가까웠다. 어떤 직업이 요구하는 능력과 그 직업의 급여에 대한 현실적인 문제를 떠나서, 일단 이렇게나 많은 직업이 존재한다는 것 자체를 잘 몰랐다. 그래서 어쩌다 잠깐 맡게 된 진로 수업이지만 그 수업을 준비하는 마음만큼은 진심이다. 스스로 어떤 사람인지를 잘 몰랐고, 세상에 어떤 직업들이 존재하는지를 잘 몰랐던 중학생 시절의 내가 교실에 앉아 있을 것만 같아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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