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스장에는 큰 거울이 있다. 자세와 동작을 확인하기 위한 용도라는 건 운동에 별 관심 없이 살아온 나도 짐작할 수 있다. 다만 거울친화적이지 못한 나에게 그 커다란 거울은 여간 부담스러운 게 아니다.
세상에는 두 가지 부류의 사람이 있다. 거울에 비친 자기 모습을 확인하는 게 즐거운 사람과 거울이 보여주는 진실을 외면하고 싶은 사람. 둘 중 후자에 가까운 나는 자칫 방심하면 거울 속 나와 눈이 마주치기 일쑤인 헬스장에서 시선 처리에 곤란을 겪곤 한다. 대개 거울 속 나와 어색한 눈 맞춤을 최소화하기 위해 어정쩡한 각도로 시선을 내리는데, "거울 보고 팔 높이 확인하세요"와 같은 선생님의 지시가 떨어지면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들어 정면을 바라본다. 거울 속엔 푸석해 보이는 나이 든 여자가 서 있다.
동글동글 동안과는 거리가 먼 얼굴. 거기에 볼까지 훅 들어가 버리니 노안도 이런 노안이 없다.
"선생님, 이거 한 세트 더하다가 얼굴살이 더 빠지면 어떡해요? 안 그래도 늙어 보이는데 여기서 얼굴살 더 빠지면 안 되거든요."
우리 선생님은 고생도 많으시지, 어쩌다가 볼살은 채워지고 뱃살만 빠지면 좋겠다는 허황된 꿈을 가진 회원을 가르치게 되셨을까. 마지막 한 세트를 생략하기 위한 엄살처럼 들리기에도 딱 좋은 말이었다. 그런 의도가 전혀 없었다고 발뺌하진 않겠지만, 볼살이 빠져 더욱더 늙어 보이는 단계에 이른 나의 진심이 담겨있기도 했다.
이렇게 노안(老顔)인 것만으로도 서러운데, 그 정도로는 부족했던지 나에게 노안(老眼)의 서러움까지 찾아왔다. 벌써 1년 전의 일이다. 신문과 책의 글씨가 흐릿하게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짬이 나면 주로 무언가를 읽으며 시간을 보내는 나에겐 청천벽력 같은 일이었다. 생활의 불편함은 해결해야겠기에 안경점을 찾았다. 돋보기를 맞추며 안경점 사장님에게 건넸던 말이 아직도 기억난다.
"원래 돋보기 처음 맞출 때 좀 슬픈가요?"
항상 좋은 시력을 유지해 주던 내 안구에게 서운한 마음이 들었다. 렌즈나 안경 따위 필요없다며 그렇게 일 잘하는 능력자인 척하더니, 마음의 준비를 할만한 공지 한번 없이 이렇게 갑자기 배신을. 아래와 같이 미리 알려주기라도 했더라면 이렇게 무방비 상태에서 슬퍼하진 않았을 텐데.
1. 관련: 노화수용정책과-3528(2024.11.10)
2. 수정체와 모양체근이 점차 탄력을 잃고 있습니다. 노안으로부터 오는 정신적 충격을 사전에 대비하기 위해, '노안 수용 종합 대책'을 붙임과 같이 수립하여 알려드리니 노안 대비·대응 및 정서적 회복에 만전을 기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붙임 노안 수용 종합 대책 1부. 끝.
시력 감퇴 대응을 위한 TF팀 구성까진 바라지도 않는다. 예고도 없이 너무 갑자기 들이닥친 것이 원망스럽다는 말이다. 이런 이유로 노안은 나에게 또 다른 불안감을 안겨줬다. 별안간 들이닥친 노안처럼 내 몸의 어느 부분이 예고도 없이 갑자기 나빠질지 모른다는 불안감. 이 불안감이 나를 헬스장으로 계속 이끄는 데 큰 역할을 했을 것이다.
그러니 나는 볼살이 더 빠질까 봐 걱정되는 마음을 밀어내고 선생님이 시킨 마지막 한 세트를 열심히 해낸다. 그 뒤로 이어지는 레그 익스텐션에도 최선을 다한다.
"네? 4세트나요? 아, 아니요. 열심히 할 거예요. 4세트 해야죠. 그럼요."
당연하게 여기던 좋은 시력을 잃는 순간부터 내 몸의 모든 기능이 이제는 당연하지 않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별안간 서러워지는 일을 대비하기 위해서라면 4세트가 무어랴, 400세트라도 해야지. 40대 중반에 돋보기 유저가 된 나는 지팡이 유저가 되는 시기만큼은 최대한 늦추고 싶다. 이 마음이 내가 꾸역꾸역 운동을 이어가는 동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