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북 MD의 일 06화

성장이 멈춘 시대, 과잉이 만연한 시대의 소매업과 MD

1장_MD의 일 ④ 자세 잡기

by 머큐리


1) 태세 전환 : 포식자가 아닌 채집자로

고대로부터 상인이라는 집단이었고, 근대에 들어 소매업의 중흥을 이끌기도 했으며, 현대에 들어서 MD라는 생소한 명칭으로 불리는 이 직업은 최근 전자상거래에서도 매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해 왔다.

하지만 전자상거래의 발전과 기술 혁신이 빠르게 진행되면서 직업으로서의 위상을 정립하기도 전에, 어려운 과제 앞에 서있다. 벽을 넘지 못하면 농업인구가 수십 년 만에 급속도로 사라진 장면과 그대로 겹치게 될 것이다. 살아남는다고 해도 플랫폼의 작은 부속기관으로 전락할 가능성이 높다.


MD라는 직업이 중대한 변화를 맞이한 것처럼 소매업도 마찬가지의 상황이다. 19세기 백화점으로부터 현재의 전자상거래 플랫폼에 이르기까지 쉼 없이 달려오면서 앞으로도 엄청난 성장과 번영을 앞두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장담하기 어렵다. 빠르게 발전했지만 전자상거래 역시 침체기가 올 것이다.


ⓐ경제 성장은 서서히 속도를 줄이고 있다. 우리는 이미 지구가 감당할 수 있는 능력을 훨씬 넘어서서 살고 있기 때문이다.

ⓑ소비자들은 늙어가고 있다. 성인이 되어 자립하면서 가구를 구성하고, 결혼으로 가족을 구성하여 의식주의 모든 형태가 변화를 맞이할 때, 인간이 가장 왕성하게 활동하는 약 20년의 기간에 역시 가장 왕성하게 소비한다. 이 시기가 지나면 사람들은 변화와 감축을 동시에 진행하게 마련이다. 세계 경제 성장을 이끌었던 이른바 선진국의 중산층들이 늙어가는 상황은 소매업 플랫폼에 가장 중요한 변화를 초래할 것이다.

ⓒ알라딘의 램프 같던 기술도 마찬가지다. 기술은 여전히 눈부시게 발전하고 있지만, 그 기술을 사용하는 인간들의 적응력이 함께 빨라지는 것은 아니다. 인간은 태어나서 스스로의 일을 능숙하게 해나갈 때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리며, 약 20년 정도의 젊은 시기에 습득한 지식과 기술을 늙어서도 유지한다. 인간이 새로운 문화를 받아들이고, 자연스럽게 체득하기까지는 시간이 소요될 뿐 아니라, 급격하게 변화를 주지도 않는다는 말이다. 결국 기술의 상용화는 인간의 적응 속도에 따라 보조를 맞춰가게 될 것이다. 태동한 지 약 25년. 전자상거래의 발전이 모바일에 들어서 완전한 성숙 단계에 이르기까지 소요된 시간이다. 그 다음으로 넘어가는 데까지는 또 얼마간의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우리가 마주한 과제_성장이 멈춘 시대, 과잉이 만연한 시대에 소매업의 인간 관리자로서의 직업적 위상을 세우는 과제_를 해결하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다.


나는 우선 우리(MD라는 직업을 가진 자들) 내면에 있는 채집자의 자아가 포획자의 자아보다 더 큰 목소리를 내기 바란다. 결핍의 시대에는 승부 근성으로 무장한 배고픈 포획자들이 대세를 이루었지만, 우리의 시대는 과잉의 시대이며 성장이 멈추고, 나이듦이 익숙한 시대이다. 포획에 나선 야수들은 먼저 뛰어서 물어 뜯어야 산다. 110km의 엄청난 속도를 자랑하는 치타도 영양을 잡는데 실패하는 경우가 많다. 사자는 영양의 속도를 아예 따라잡을 수 없어 집단 사냥을 택한다. 하지만 채집자들은 더 넓은 반경을 활동범위로 움직이면서 찾아가거나, 기다리면 살 것을 구한다. 자연 재해가 아니라면, 사냥보다 채집의 성공율이 훨씬 높다. 더군다나 현대의 채집자들은 그리 멀리 가지 않아도, 그리 오래 기다리지 않아도 많은 것을 구할 수 있다.


우리는 공존과 상생, 연대의 길을 찾아야 한다. 이익을 최우선으로 하는 상업(소매업)의 세계에서, 특히 성장만이 진리인 기업들의 경쟁이 여전히 살벌하게 벌어지는 시장에서 공존, 상생과 연대가 과연 가능할까?

그러나 나는 경쟁 전략의 관점에서도, 경쟁에서 빠져 나오는 것만이 유일한 해결책이라고 생각한다.


알베르 카뮈

“앞선 세대가 세계를 개조하는 숙제를 풀어야 했다면,
현재 세대는 세계의 해체를 막아야 하는 훨씬 더 막중한 임무가 있다.”


2) 착각 탈피 : 쇼핑은 모바일 활동의 8%에 지나지 않는다


직업이 이렇다 보니, 마트에 개인적인 용무로 장을 보러 가도 마치 시장조사 하듯이 살펴보는 버릇이 있다. 쇼핑을 하는 과정이 온전히 쇼핑으로 이루어지지 않는 것은 아마 MD라는 직업을 가진 이들이 대개 비슷할 것이다. 하지만 한 곳을 집중해서 응시하다 보면 또렷한 것이 오히려 흐릿해질 때가 있다. 착각에 빠지기도 한다. 바라보는 곳이 세상의 중심이라도 되는 것처럼 느낀다.

하지만 당연하게도 쇼핑은 세상의 중심이 아니다. 사람들은 그보다 훨씬 다양한 활동을 하며, 쇼핑에 할애하는 시간은 아주 조금뿐이다.


온라인에서 가장 많은 시간을 소비하는 것이 무엇인지 조사한 결과를 보면

- 콘텐츠를 보거나 읽는 활동이 55.9%(동영상 시청 16%, 뉴스기사확인 16.8%, 음악감상 7.4% 등),

- 커뮤니케이션(SNS, 커뮤니티, 카페 등) 26.7%,

- 상거래(모바일 쇼핑)가 8.3%,

- 모바일 게임 8.6%로 나타났다.

(source : 오픈서베이, “온라인동영상 시청 트렌드 리포트 2019”, 2019.06.10)


MD들이 쇼핑, 혹은 거래에만 온통 집중하다보면 잘 팔릴 상품 외에는 보이지 않게 된다. 경쟁사가 어떤 상품을 팔고 있는지 곁눈질하는 시간이 길어지고, 요새 뜨는 상품이 무엇인지 실시간으로 흩어지는 모래알 같은 정보를 잡아채느라 마음이 바빠진다. 상품 기획의 여러 단면 중에서도 가격할인, 사은증정품과 같은 판촉 요소에 집착하게 된다.

하지만 판촉은 MD의 상품 기획이 거쳐야 하는 기나긴 과정(어떤 상품을 보유할 것인지, 어떻게 안정적인 공급처를 확보할 것인지, 어느 위치에, 어떤 식으로 진열할 것인지 등의 과정) 중 가장 마지막 단계이다. 경쟁 상황과 소비자 동향 역시 매우 중요한 정보가 틀림없지만 충분조건은 아니다.


MD의 일은 사람들이 활동하는 8%의 쇼핑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나머지 92%의 영역을 두루 살펴보는 데서 출발해야 한다. 다행스러운 것은 쇼핑 영역의 알고리즘은 사람들이 뭘 검색해서 구경하고, 어떤 상품을 구매하는지에 대한 방대한 데이터만 분석하기 때문에 인간 MD의 역할도 있다는 사실이다.

인간은 인간의 일을 하면 된다. 주변 이웃을 둘러보고, 동료들과의 대화가 다양한 주제로 넓어질 수 있도록 배려해야 한다. 대개의 경우 말하기 보다 듣는 시간을 늘리면 주제는 넓어지게 마련이다.



3) 관점 전환 : 변해버린 사람들, 예정된 미래


MD의 시선이 상품에서 사람으로, 혹은 거래에서 이야기로 이동해야 하는 이유는 또 있다.

바로 얼마 전까지 사람들은 하루 종일 열심히 일하다 들어와 TV 앞에 철퍼덕 주저앉았다. 드라마 속 라이프 스타일에 빠져들었고, 광고의 유혹을 온전히 기억했다가 쇼핑하러 나가곤 했다. 쇼핑을 즐기기 위해 더 열심히 일했다. 오랜 시간 일하고 잠깐 쉬면서도 더욱 노력하고, 앞만 보고 달리는 것이 당연했다. 일하고 TV보고, 잠깐의 쇼핑이 끝나면 또 일했다.

하지만 최근 들어 사람들이 변했다. 더 적은 시간 일하고, 더 긴 휴가를 가고 싶어하며, TV를 소유하지 않으며 휴대폰을 탐닉하지만 휴대폰 메신저를 꺼놓는 시간을 갈구한다.

마음에 맞는 절친과 함께 시간을 보낼 수 없다면 차라리 혼자 있는 시간에 위안을 느낀다. 자신만의 취미는 인격 그 자체로 여겨지기도 한다.

노력만 하면 성공, 혹은 성장할 것이라는 기대가 빛바랜 희망이던 터널을 거쳐오면서 노력의 불공정에 분노하여 '노오력'이라 비아냥거리고, 꼰대스러움에 치를 떤다. 그만큼 공정함에 대한 갈망은 크다.

이것은 단순히 세대의 변화라고 보기엔 규모가 훨씬 크다. 인간 역시 동물적인 감각으로 위기를 포착한 것이다.

위기를 예민하게 감지한 사람들은 어디를 바라보고 있을까?

헝그리 정신으로 성장을 갈구하던 시대가 종말을 고하고 경제 성장 역시 후퇴하고 있는 이 때, 절제하거나 공유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은 사람들은 (특정 분야의) 소비를 줄이거나 소비 방식에 변화를 주고 있다. 친환경, 재생 에너지, 바이오 농업 등의 산업이 미래를 여는 열쇠로 꼽히며 익숙하게 회자되고 있다. 이러한 변화가 완전한 주류로 자리잡아 친숙한 일상이 되기까지는 시간이 더 필요하겠으나 예정된 미래가 바뀌지는 않을 것이다.

인간들의 상거래에서 인간 MD들이 해야할 일은 지금 당장의 성장이 아니다. 예정된 미래로 이웃과 함께 손잡고 가야한다. 이웃과 연대하려면 유연한 태도, 상상력, 다른 방식으로 일하는 능력을 가져야 한다.


가령 최근 소매업에서 가장 성장율이 높은 분야인 간편식 카테고리를 보자. HMR(Home Meal Replacement)라고 불리며 지난 20여 년간 차세대 성장 카테고리로 손꼽혔다. 이제는 완전히 대세가 되었다. 도시락은 물론이고, 데우기만 하면 섭취할 수 있는 다양한 식품이 손만 뻗으면 바로 닿을 거리에 완벽하게 준비된 상태이다. 최근 가장 큰 규모의 M&A대상이었던 배달 음식까지 포함하면 먹거리, 식재료 분야에서 간편식은 시대의 흐름을 이끄는 주류가 되었다. 그러나 바로 이러한 때, MD의 유연성, 상상력, 다른 관점이 필요하다.

학생, 직장인들에게 혼밥의 필수품으로 도시락의 다양성을 제공하는 주류의 흐름에 매몰되지 않고, 혼자하는 식사가 인간에게 주는 정서적 황량함을 다소나마 완화시킬 수 있는 상품을 기획할 수 있기를 바란다. 이러한 관점의 변화는 사회운동가나 시민단체에게만 한정된 역할이 아니다.

한 세대보다 더 큰 규모로 변화를 선택한 사람들에게 다른 관점의 상거래를 제시할 수 있다면 여전히 시장을 주도하는 독과점의 욕망에서도 훌륭한 생존 조건을 만들어낼 수 있을 것이다. 예정된 미래에서 삶의 행복은 우리가 우리 자신, 타인, 세상과 맺는 관계의 질에 달려 있다는 관점(프레데릭 르누아르, “네오르네상스가 온다”, 김수진 옮김, 생각의길, 2013.12, 320쪽)에 동의한다면, 우리는 일하는 방식을 바꿀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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