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계의 사람들
타즈마니아(Tasmania)는 호주의 멜버른 아래쪽에 위치한 섬으로 6개 주 중 하나인데 내가 꼭 가보고 싶었던 곳이기도 했다. 크라이스트 처치(Christ Church: 뉴질랜드 남섬의 도시)에서 타즈마니아의 주도인 호바트(Hobart)에 가기 위해 멜버른 공항에서 환승했다.
호주와 뉴질랜드 최초 입국할 때 심사에서 워낙 사람 진을 빼놓아서 난 의례히 또 그러겠구나 싶어 내가 소지한 모든 것을 신고(declare)했다. 또, 일부러 맨 마지막에 입국심사를 했는데 이유는 호주 공무원들도 칼퇴근에 목메는지 알고 싶어서였다. 역시나 그들이, 마음이 급해지기 시작했는지 나를 재촉하는데 내가 느릿느릿 모든 아이템을 상세하게 신고하려고 하니 오히려 그들이 그냥 대충대충 심사를 마치는 것이었다. 나름 통쾌한 복수였다.
타즈마니아에선 처음부터 좋았다.
공항에서 직원으로 보이는 분한테 시내로 히치하이킹 할 수 있는지 대놓고 물어봤는데 어디에서들 하는지 세세하게 가르쳐 주면서 잘될 거라고 하더니 실제로 타즈마니아에선 히치하이킹이 잘 됐다. 어쩔 땐 사인보드를 내걸거나 엄지손가락을 올려 히치하이킹을 시도하기도 전에 벌써 라이드(ride)가 필요하냐고 물어보는 경우도 몇 번 있었다. 심지어 집으로 초대해서 커피나 음료, 식사는 물론 잠자리까지 제공하는 사람도 있었는데 공항 근처에서 만난 로빈(Robyn)도 그 중 하나였다.
로빈은 캠핑장을 찾는 내게 그녀의 집 앞 정원에 텐트를 치는 건 어떻겠냐고 제안을 했고, 난 흔쾌히 받아들였다. 그곳은 패디멜론(Pademelon-덤불왈라비속. 캥거루류 중 가장 작음)이나 왈라비(Wallaby-오스트레일리아, 뉴기니에서 볼 수 있는 캥거루과 30여 개 종의 하나) 같은 야생동물이 노니는 숲이었다.
그녀에게 양해를 구하고 조그만 모닥불을 지펴 달빛을 안주 삼아 미리 준비해온 와인을 마시는데, 로빈이 맥주 몇 병을 들고 와 같이 조인(join)했다.
붉은 그림자가 달을 잠식하는 특별한 월식의 날이었다. 우린 별다른 말없이 달만 쳐다보았지만, 이미 서로에게 유대감 같은 것이 생겨났다는 걸 알고 있었다.
우린 다음을 기약했다. 백패커(backpacker)로 몇 년을 살아오면서 ‘다음을 약속한다’는 게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으나 내가 틀렸다는 건 나중에 알게 되었다.
타즈마니아를 한 바퀴 돌고 소렐(Sorell)이란 곳에서 뉴 카인드(New Kind: 신종, 신인류)라는 페스티벌캠프에 합류했다. 한 달 반 전쯤 나를 리프트(lift: 라이드) 해준 일란(Ilan)이란 친구가 나를 초대했다. 그는 내가 여러모로 편하게 지낼 수 있도록 배려해주었다. 뉴 카인드 캠프의 취지는 지속가능한 생활(Sustainable Life)*과 대안적인 라이프스타일의 소개와 그 실습이었는데 뭔가 자꾸 전문적으로 말하는 걸 잘 알아듣기 힘들어서 사진 찍으러 돌아다니거나 풀밭에 누워서 쉬었다.
어둑어둑해질 무렵, 소나기가 한차례 쏟아지고 난후 달빛을 받아 무지개가 떴다. 사람들은 그것을 문보우(Moonbow)라고 불렀다. 달빛 무지개.
저녁엔 안에서 라이브 연주하는 캠프가 있어 들어가 보았는데 소울 넘치는 목소리로 노래 부르는 가수가 매력적으로 느껴져 팬심으로 사인을 청했더니 쑥스러워하며 고마워했다. 다음 날 아침에 날 알아보고 인사하는 이가 있어 누군가 봤더니 그 가수였다. 저녁과 아침에 여자의 얼굴이 달라 보이는 건 어느 나라나 비슷한 것 같다. 그녀의 이름은 랫차일드(Ratchild: 새끼들쥐)였다.
로빈의 집이 가까운 듯해서 연락을 해봤더니 한걸음에 달려왔다.
로빈의 제안으로 포도 따는 일을 하며 그녀의 집에서 며칠간 신세를 졌고, 이후에는 타즈마니아를 떠나기 전까지, 급하게 움직이느라 들르지 못했던 몇몇 관광지와 캠핑장에서 시간을 보냈다.
호바트 공항에서 에이들레이드(Adelaide: 남호주의 주도) 공항으로 넘어와, 일곱 달 전쯤 머물렀던 라일(Lyle)의 팜에서 며칠 있다가 시드니로 히치하이킹 했다. 시드니에선, 뉴질랜드에서 캠핑카를 개조해서 되파는 일로 경비를 충당하며 호주와 뉴질랜드를 오가는 이탈리아 친구의 도움으로 그의 친구가 못 팔고 남기고 간 여분의 캠핑카에서 며칠 묵을 수 있었다.
전에는 백패커(backpacker)에게 다음은 없다고 생각했다. 한번 지나면 다시 돌아올 수 없을 거란 안타까움에 매 순간 후회를 남기지 말자는 신념을 가지고 살아왔는데, 길에서 자꾸 다시 만나게 되는 사람이 생기는 건 내가 노마드(방랑자)가 되었기 때문일까? 다시 만날 수 있을 거란 기대감이 마음을 채워준다.
히치하이킹을 하면서 나를 태워준 운전자중 대다수가 과거에 히치하이킹을 했던 사람이었는데, 그들이 자주 하는 말이 페이 포워드(Pay forward)*이다.
내가 받은 도움을 다른 사람에게 돌려준다는 말이다.
난 이게 무슨 행복전파 다단계시스템인 것 같아서 널리 알려졌으면 좋겠다.
원래 계획은 여행비자 3개월 동안 타즈마니아 1개월, 퀸즐랜드 1개월, 노던 테리토리 1개월을 보낼 생각이었는데, 타즈마니아가 기대이상이라 2주일을 남기고 다 써버리고 나니 비자 연장을 위해서 뉴질랜드로 가야 했다. 호주의 나머지도 포기하기 어려운 선택지이기도 하고.
나에게 타즈마니아는 늘 그리운 곳이고, 타즈마니아가 그리운 곳이 되게 만들어준 친구들도 언젠가 다시 만날 수 있을 거라고 믿는다.
*Sustainable living: 지속 가능한 생활은 개인이나 사회가 지구의 천연 자원과 개인 자원을 사용하는 것을 줄이려고 시도하는 생활 방식을 설명합니다. 그것은 종종 "지구 조화 생활" 또는 "순 제로 생활"이라고합니다.-위키백과
*Pay forward: Pay it forward는 선행의 수혜자가 원래의 수혜자 대신 타인에게 친절을 보답하는 표현이다.-위키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