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에 대해
아내는 새벽 일찍 일어난다. 보통의 직장인과 다른 점은 새벽에 일어나 새벽까지 출근해야 한다는 점이다. 결혼 후 지금껏 휴가를 썼을 때를 빼고는 아침에 아내를 본 적이 손에 꼽는다. 사람의 흔적이 사라진 적막한 길을 홀로 걷는 아내를 상상해 본다. 나라면 그런 생활을 계속할 수 있었을까. 엄두가 안 나는 생활을 벌써 이십 년 가까이하고 있다니 놀랍기도 하고 대단하기도 하다.
우리 아이는 태어날 당시 아내와 같이 산후조리원에 가지 못하고, 바로 큰 병원으로 이송되었다. 엄마, 아빠보다도 코로나 바이러스 검사를 먼저 받았던 아이는 음압병동부터 중환자실에 입원하기까지 수많은 검사를 받아야 했다. 혼자 산후조리원에 가게 된 아내는 모유를 유축하여 팩에 담았고, 나는 그걸 받아 부지런히 병원으로 향했다. 우리 셋은 한동안 떨어져 지내며 슬플 새도 없이 각자의 역할에 최선을 다했다. 의사파업으로 중환자실을 홀로 지키던 센터장님이 "아기들은 정말 아프면 울지도 못하는데, 저렇게 기를 쓰고 우는 걸 보니 금방 나을 것 같다."라고 하신 말씀은 평생 잊지 못할 위로의 말이 되었다.
그때의 일로 아내는 계획을 바꿔 육아휴직을 썼다. 직장의 눈치를 보며 전전긍긍하던 나를 대신해 일 년간 아이의 주양육자가 되기로 결심한 아내는 일밖에 모르던 사람에서 아이가 전부인 엄마로 금세 변했다. 아이는 아팠던 시절, 인큐베이터에서 홀로 지새운 날들을 본능으로 느꼈던 탓인지 한사코 인공젖꼭지는 물지 않았다. 분유를 주면 고개를 확 돌리며 거부했다. 아내는 자의든 타의든 1년의 완모를 달성했다. 시간이 지나 주변의 워킹맘들의 후일담을 들으면서 1년 간 모유수유를 한 사람을 찾을 수 없었다. 아내의 업적에 다시 한번 감탄했던 순간이었다.
나는 집안의 두 번째 결혼이었고, 장녀인 아내는 개혼이었다. 장인어른은 아내의 고향에서 결혼을 원하셨고, 아내의 할머니는 동네에서 가장 장수를 하신 어르신이기도 했다. 우리 부모님은 새로운 지역에서 결혼식을 올리는 것에 내심 기대를 하셨고, 장인어른은 우리 부모님의 생각에 감사한 마음이었다. 비 온 뒤 땅이 굳는 것처럼 지방의 한 리조트에서 보슬비가 내렸고, 우리의 결혼식은 촉촉이 젖은 땅 위에서 치러졌다. 아내는 자신의 고향에서 결혼한 것을 신기하게 생각했고, 나는 결혼식을 끝낸 후 웨딩카도 없이 시외버스를 타고 신혼집에 가는 것을 또 하나의 낭만으로 여기는 그 마음에 감동했다.
그때를 생각하면 가물거리는 기억을 현미경으로 들여봐야 할 정도로 아득하다. 새벽 출근길처럼 어두컴컴한 그 시절을 기억 속에 묻고 살다가 이른 출근과 잦은 회식으로 축 늘어진 아내의 모습을 볼 때면, 내가 더 잘하지 못하고, 능력이 없었던 게 늘 미안하다. 회식이 없으면 초저녁에 집에 오는 아내와 항상 밤늦게 퇴근하는 나는 주말이 되어야 온전히 부부가 되고 가족이 된다. 서로를 볼 시간이 줄어들고, 이렇다 할 대화를 할 시간도 부족해 가끔은 부부로 지내는 시간의 대부분이 아이의 쓰다만 일기의 한 편으로만 남는 것 같아 아쉽다.
우리는 각자가 회사의 허락을 받아야만 닿을 수 있는 평일과 그나마 회사로부터 연결되지 않을 법한 이틀의 주말을 보석처럼 여기며 살아간다. 평일에 누적된 피로로 늦게 일어나는 나의 습관에 아내의 한숨이 늘어난다. 따끔한 원망의 눈초리를 받으며 잠에서 깨지만, 아침을 먹으며 수다를 떨고 있는 모녀를 보는 게 이 삶의 유일한 즐거움이다. 살아서 이 광경을 일상의 한 페이지로 남길 수 있다는 건 우리의 만남과 노력으로 일궈낸 최고의 행복이다.
아내는 십 년은 더 일하고 싶다고 말한다. 꿈이 직업이 되었고, 소명이 되고, 삶의 태도가 된 한 사람의 직업관을 바라보며, 너를 지탱하는 생각들을 훔치고 싶을 만큼 훌륭함을 느낀다. 나의 생김새와 모습을 담고 있는 딸을 보며 나에게서 작은 부분만 떼어가고, 나머지는 꼭 엄마를 닮았기를 간절히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