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소설, 그리고 이안의 영화
대만의 이안 감독은 <음식남녀> 등을 만들며 주목받은 뒤 곧바로 할리우드에 진출하여 <센스 앤 센서빌리티>, <브로크백 마운틴>, <라이프 오브 파이> 등을 만들며 세계적인 거장으로 우뚝 섰다. 그가 2007년 중화권으로 다시 돌아와 만든 영화가 [색,계]이다. [색계]는 이안 감독에게 [브로크백 마운틴]에 이어 또 한 차례 베니스국제영화제 황금사자상을 안겨준 영화이다. 이 영화는 중화권에서는 아카데미 4관왕을 차지했던 [와호장룡]보다 더 높은 인기와 화제를 불러 모으고 있다. 물론 [색계]는 이안 감독 작품이라서, 그리고 장애령 소설이 원작이라는 이유 때문에 이런 관심을 불러 모았을 것이지만 역시 양조위와 탕유의 상상을 초월하는 정사 씬 때문에 화제를 이끈 측면도 있다. 영화 [색계]는 일본 앞잡이를 암살하기 위해 ‘몸’을 기꺼이 내던지는 한 미모의 여대생의 멜로드라마로 소개되고 있다. 그러나 중국인에게는 이 영화가 결코 그렇게 한두 줄로 끝날 수 없는 아픈 역사와 슬픈 개인사를 빼곡하게 들어차 있는 무거운 영화이다.
장애령의 소설
1920년 중국 상해에서 태어난 장애령(張愛玲)의 생애는 중국 근현대사의 아픔이 고스란히 투영된 드라마틱 그 자체이다. 조부는 청나라 관료였고 조모는 이홍장의 딸이었다. 2살 때 그의 어머니는 유럽으로 유학을 떠났고 열 살이 되기 전에 부모의 이혼, 계모와의 불화 등 순탄치 않은 삶이 시작되었다. 그녀도 개화기 선각자였던 어머니처럼 영국으로 유학을 떠나려던 찰라 전쟁의 불길은 그를 중국에 눌러 앉힌다. 그리고 당시 일본 앞잡이라고 불리던 호란성(胡蘭成)과의 결혼은 그녀를 중국사가 낳은 가장 드라마틱한 여인으로 만들어버린다. 의외로 그녀의 소설 작품은 한국에 거의 소개되지 않았다. 그녀의 작품 중에는 [첫 번째 향로]와 [경성지련]이 번역 출판되었다. 장애령 소설은 젊은이들을 들뜨게 하는 열정이 있다. 그와 함께 여전히 페미니스트의 숨결과 아나키스트의 칼날이 묻어난다. 최근 들어 그녀의 소설이 새로 발견되고 그녀의 개인사와 함께 소설이 재해석되면서 새로이 각광받는다.
이안의 영화
대만 출신의 이안 감독은 일찌감치 코스모폴리탄이 되어버렸다. [쿵후선생]이나 [결혼피로연], [음식남녀]에서의 깜짝쇼는 전혀 새로운 스타일의 감독의 존재를 알린 셈이다. 그가 민국 초기 중국에서 인기를 끌었던 왕도려의 비교적 덜 알려진 무협지 [와호장룡]을 영화로 만들었을 때 많은 중국인들은 혼란스러웠다. 소설과 다르다고 할 수도, 같다고 할 수도 없는 이안식 무협물에 당황스러울 수밖에. 그리고 애니 프루의 [브로크백 마운틴]에서는 미국인마저 깜짝 놀라게 된다. 동양 영화인이 와이오밍 카우보이의 동성애 이야기를 눈물 나게 만들 수 있었다는 사실에 대해서 말이다. 그리고 이안 감독은 이번에는 장애령에 도전한 것이다. 장애령의 [색계]는 1만자 내외의 단편소설이다. (인터넷에 다운받은 중문판의 경우 정확히 14,235자이다. A4지에 13쪽 분량이다) 장애령이 1950년대에 처음 쓰기 시작하여 1980년대에 탈고한 30년에 걸친 작품이란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짧은 소설이다. 이안 감독이 영화로 만들기 전까지 [색계]는 그다지 주목 받는 작품은 아니었다. 워낙 짧은 문장에 건너뛰는 구성이기 때문에 이해하기가 쉽지 않은 소설에 속한다. 그런데 이안 감독은 이 짧은 작품을 마치 시놉시스 삼아 완벽한 157분짜리 멜로드라마를 만들어낸 것이다.
특무(特務)들의 영화
소설은 1940년대 상하이의 유한마담들의 한가한 마작 장면에서 시작된다. 이들 유한마담들은 남편의 일상에 대해서는 관심을 둘 수 없다. 그들은 마작 판에서 세상을 읽거나 세상을 잊는 비법을 이미 깨우친 것이다. 그 마작판에 왕가지(王佳芝,왕지아쯔)라는 미모의 스파이가 끼어드는 것이다. 이 여자, 중국말로는 특무(特務)이다. 당시 중국은 장개석의 국민당군과 모택동의 공산당군만 세력다툼을 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국민당 내부에는 당시 중국 상황(일본군의 중국점령)에 대한 뚜렷한 이견이 존재했다. 중국의 힘을 길러 일본을 몰아내야한다는 장개석의 중경정부(중경에 위치했기에 중경정부라 부른다)와 현실적으로 일본과의 평화교섭을 통해 중국의 힘을 길러야한다는 왕정위(汪精衛,왕징웨이)의 남경정부가 건곤일척의 살육전을 펼치고 있었다. 이후 역사는 왕정위의 남경정부는 일본의 앞잡이 괴뢰정권이라고 낙인찍는다!!! 중경정부와 남경정부는 치열한 스파이전을 펼친다. 하루도 조용할 날이 없을 만큼 끔찍하고 비밀스런 상호 암살전을 전개한다. 특히 외국조계지였던 상하이에서는 고위관리들이생명의 위협에 노출되어 쥐새끼보다 더 민감하게 자신을 숨기는 것이다.
왕가지는 중경정부의 특무, 이(易)선생은 남경정부의 요인이다. 당시 중국인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던 76호 책임자이다. (당시 남경정부의 특공총부가 상하이 제스필드로 76호에 있었기에 그런 식으로 불렀다) 왕가지는 이 선생을 죽이기 위해 가장 원시적이며 확실한 방법을 선택한다. 미인계! 이안 감독은 미인계의 리얼함을 위해 치밀한 심리전을 펼친다. 그것은 마작 판의 마작 위에서, 손가락의 반지로 구체화되고 결국 3번의 섹스 씬으로 화려하게 만개한다.
역사와 영화
극중에서 양조위가 연기한 이 선생의 이름은 두 차례 나온다. (보석상에게 건네지는 명함과 마지막 처형문서 서명에서) 이름은 이묵성(易黙成). 대만에서는 금새 이 이름에 대한 해석이 나왔다. 정묵촌(丁黙邨)과 호란성(胡蘭成)의 조합이라는 것이다. 정묵촌은 76호 특무공작대 책임자였으며, 호란성은 장애령의 남편이자 괴뢰정권인 왕정위 정권에서 문화차관 등을 지낸 한간(漢奸,일본에 부역한 역적이란 의미)이었다. 그리고 여기에 정빈여(鄭蘋如)라는 실존인물이 등장한다. 아버지는 상해고등법원 수석검찰관이었고 어머니는 일본사람이다. 정빈여는 19살에 중경 특무가 되어 정묵촌 암살 작전에 투입된다. 결국 뜻을 이루지 못하고 영화에서처럼 야심한 밤에 외딴 곳에서 비밀스럽게 처형된다. [색계]가 공개되면서 이 영화가 정묵촌과 정빈여의 이야기라는 것이 백일하에 드러난 셈이다. 장애령은 특무암살공작에 얽힌 이야기를 남편 호란성에게서 들었을 터이고 그 이야기를 30년 동안 갈고닦아 단편소설로 엮은 것이다. 영화 [색계]가 공개된 뒤 미국에서 살고 있던 정빈여의 여동생(이미 80이 넘은 할머니!)이 원한에 차서 기자회견을 연다. 언니 ‘정빈여’는 조국과 민족을 위해 청춘을 바친 애국투사라고. 영화에서처럼 미인계로 묘사될 그럴 인물이 결코 아니었다고. 실제 알려지기로는 정빈여가 체포된 뒤 정빈여는 가족을 살리기 위해 입을 다물었다. 정빈여의 아버지는 이듬해 병사했고, 남동생은 전투기 조종사로 일본군과 싸우다 격추당해 죽는다.
소설과 영화
이야기했듯이 장애령의 [색계]는 단편소설이다. 그러나 장대한 [와호장룡]을 2시간에 줄이는 수완을 발휘했던 이안은 이번에는 13쪽짜리 단편을 157분짜리 영화로 만들어낸다. 소설의 모호함과 텍스트의 불완전성(?)을 극복하고 자신만의 색채로 유려하게 영화로 만들어낸 것이다. 많은 중국인들은 장애령 소설보다 이안 영화에 훨씬 후한 점수를 주는 이유가 아마 이런 이유일 것이다. 이안 감독은 (장애령이 무슨 이유인지) 똑 끊어버린 단락에 살을 붙이고 호흡을 집어넣어 더욱 화려하고 숨 막히는 그림을 만들어낸 것이다. 영화에서처럼 소설에서도 마작이, 반지가 중요한 의미를 보여준다. 그럼 소설에서도 왕가지의 섹스 훈련(경험)이 묘사되었을까. 장애령은 단지 한 줄로 묘사한다. 영화에서 암살계획이 좌절되고 왕가지가 정신없이 인력거를 타는 장면이 꽤나 흥미롭다. 거리가 봉쇄되는 장면에서 한 중국인 여인네가 “집에 가서 밥 해야 하는데..” 라는 대사도 고스란히 영화에서는 살아있다.
영화에서 가장 극적인 장면은 6캐럿짜리 다이어 반지를 손가락에 낀 왕가지가 저도 모르게 이 선생에게 속삭이듯, 그러나 내면의 애원이 분명한 대사 “가요..”라는 대사이다. 소설에서는 “快走”(어서 가요)라고 단 한번 말한다. 그런데 영화에서는 두 번 말한다. 훨씬 간절한 음성으로. 이 미세하지만 분명한 차이는 이 영화를 암살 음모극에 실패한 여자스파이의 슬픈 멜로물임을 분명히 보여준다.
탕유의 색계
이안은 왕가지 역에 딱 맞는 배우를 찾기 위해 중국과 대만, 홍콩의 많은 배우들을 대상으로 오디션을 보았다. 그리곤 그다지 알려지지 않은, 아니 거의 알려지지 않은 중국의 탕유(湯唯,탕웨이)를 캐스팅했다. 이안 감독은 배우에게 남아있는 마지막 한 방울 진까지 뽑아내는 연금술을 보여준다. 탕유의 연기가 워낙 눈에 띠어 오히려 양조위의 연기가 초라해 보일 정도이다. 이 영화를 극장에서 2번 보았다. 앞으로 몇 번을 더 보게 될지 모르겠다. 역사 드라마로, 비운의 소설가 이야기로, 낭만적 혁명가 이야기로, [색계]는 너무나 매혹적인 드라마이다. 이안 만세! 장애령 만세! ⓒ박재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