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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술사가 나리 Jun 05. 2023

내 인생에서 만난 고마운 여인

인생의 고마운 분들을 생각하다가


   

    “이거 우리 나리한테만 주는 거니까…. 오빠들 보기 전에 얼른 방에 가져다 놔라.”


  외할머니는 텔레비전 모양으로 만들어진 귀여운 플라스틱 저금통을 고사리 같은 내 손에 꼭 쥐어주시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또 어떤 날은 앙증맞은 크기의 표주박을 어디서 구하셨는지, 집에 들어서자마자 나에게 건네어주시면서 “아이고, 이거 꼭 우리 나리처럼 귀엽게 생겼지?” 하시기도 했다.


    위로 오빠가 둘이나 있고, 딸이 귀한 집안의 막내딸로 태어났어도 친할머니는 손녀들에게는 그다지 큰 애정을 보이지 않으셨다. 가부장적 사고방식으로 굳어져있던 대구 시골 분들이었던 친가 어른들과는 달리, 항상 나를 제일 이뻐하시며 애지중지 돌봐주신 분은 바로 외할머니셨다.


    우리 엄마는 오빠가 둘, 언니가 둘이나 있는, 2남 3녀 중 막내로 태어나 온 가족의 사랑을 한 몸에 받는 막내딸이었다. 외할아버지는 독립운동을 하시다 젊은 나이에 돌아가셨고, 그 때문인지 외할머니께서는 우리 엄마를 남달리 예뻐하시며 키우셨다고 한다. 그런 외할머니에게 나는, 그 소중하고 사랑스러운 막내딸이 낳은 막내딸이었다. 더 이상 무슨 설명이 필요하겠는가.


    물질적인 혜택을 내가 독점하였다는 이유로만 외할머니를 고마운 분이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다.  어스름한 새벽녘, 나지막이 성경을 읽는 소리에 잠을 깬 적이 여러 번 있었다. 또박또박 조용히 성경을 읽으시는 따뜻한 목소리는 우리 가족 이름을 한 명 한 명 부르시며 기도하는 소리로 이어지곤 했다.  

   “아, 할머니가 또 새벽에 기도를 하시네.”  나는 작은 손으로 눈을 비비며, 잠을 깬 김에 화장실을 다녀오기로 했다. 살금살금 발소리를 죽이며 거실로 나가보면 어김없이 외할머니는 마루에 무릎을 꿇으신 채, 나지막한 소리로 기도를 하고 계셨다. 내가 깨었던 날 뿐 아니라, 곤히 잠들어 있을 때에도 외할머니의 성경 읽기와 가족과 나라를 위한 기도는 계속 이어졌다.


   내가 지금까지 하나님의 사랑과 인도하심을 느끼며 살 수 있게 된 것은 많은 사람들의 기도가 쌓이고, 자라나서 열매 맺은 결과일 것이다. 그 많은 사람들 중에 가장 나를 위해 기도를 많이 해주셨던 분은 외할머니이셨을 것이라 생각한다. 나를 위해 무슨 기도를 하셨는지는 모른다. 외할머니는 나를 향한 커다란 사랑의 크기만큼 마음을 다해 기도해 주셨을 것이 분명하다. 내가 갖고 있는 신앙은 외할머니로부터 3대째 이어져 온 것이다.


   보통 신앙이 있는 사람들은 ‘기도받고 자란 자녀는 망하지 않는다.’라고 믿는다.  물론 여기서 성공과 실패의 기준은 세상 사람들의 그것과는 다른 것이다. 외할머니의 물질적, 물리적 사랑에도 난 감사함을 느끼지만, 그 보다 매일매일 나를 위해 기도로 쌓아주신 정신적인, 영적인 사랑에 더 큰 감사함을 느낀다.


   내가 좀 더 자라 초등학생이 되었을 때, 외할머니는 일찍 세상을 떠나 천국에 가셨다. 엄마와 나는 할머니가 천국에 가셨다는 사실을 머리로는 알았지만, 우리의 가슴은 너무 일찍 하늘로 가버리신 할머니 생각에 슬픔으로 가득 차 있었다.

    사실 그 당시 내 어린 눈으로 보기에 우리 엄마는 외할머니와는 좀 다른 캐릭터라고 생각되었고, 새벽에 기도하시는 엄마의 모습을 본 기억은 별로 없었다. 그런데, 그런 엄마도 시간이 흐르면서, 점차 새벽에 깨셔서 성경을 읽고, 기도하는 엄마의 모습으로 변해가시는 게 아닌가.  우리 집안에서 모계혈통으로 흐르는 신앙의 유전자 탓인지도 모른다.


    내 인생에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셨던, 내 눈에는 최고의 미녀로 보였던 우리 외할머니,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찬송가를 가장 좋아하셨던 우리 외할머니는  어느덧 어른이 되어버린 나에게 내 인생에서 만난 가장 고마운 여인으로 기억되는 그런 멋진 분이시다.


   할머니, 오늘 밤 할머니가 많이 보고 싶어요.  

정권사님, 사랑해요. 나중에 천국에 가면 만나요.

꼭 안아드릴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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