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저씨의 빵집을 나서며 방법을 찾아보겠다 자신 있게 말했건만 역시나 인생은 생각처럼 흘러가는 법이 없었다. 몽멜리앙에서 요양원으로 돌아간 후 얼마간은 알렉시스와 머리를 모아 브라운 씨를 도울 수 있는 방법을 열심히 고민해 보았지만 답은 쉽사리 찾을 수 없었다. 그렇게 한번 기세가 꺾인 이후로는 이렇다 할 성과 없이 시간만 축내는 것의 연속이었다.
멈춰버린 우리의 고뇌와 다르게 시간은 꾸준히 흘러 순식간에 2주가 지났고, 우리는 남아있던 열의조차 잃어버렸다. 알렉시스는 그나마 나보다는 나은 환경이었는데, 아침마다 식당에서 올라오는 빵을 매일 먹어야 하는 처지인 나는 매일매일 일말의 부담감을 느껴야 했다. 룸서비스로 빵을 받을 때마다 아저씨와 나눴던 이야기가 떠올랐고, 빵을 한 입이라도 뜯으면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나도 모르게 식당 출입을 피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사실 그렇게 죄책감을 느낄 일은 아닌데 말이지. 우리가 호언장담한 것도 아니고 한번 생각해 보겠다고 말한 것뿐이니까.
나는 그렇게 자위하며 크루아상을 한입 물어뜯었다.
그러나 거짓말처럼 약속을 지킬 기회는 찾아왔다. 어느 날 평소처럼 별것 없는 의무실 일을 마치고 돌아온 저녁, 방에서 답답함을 느낀 내가 로비로 나왔을 때였다. 로비의 라운지 공간은 자주 찾지는 않지만 나와 세상을 이어주는 유일한 소통 공간이었다. 라운지의 대형 텔레비전은 가끔 뉴스 채널에 맞춰져 있었다. 방에 있는 텔레비전은 건드리지 않는 나도 이 공간을 통해 세상 돌아가는 소식을 간간히 들을 수 있었다. 오늘은 마침 BBC가 틀어져 있었다. 그리고 뉴스의 앵커는 속보를 보도하고 있었다. 무심결에 헤드라인을 읽었다.
[멕시코, 쿠데타 내전 발발]
입이 쩍 벌어졌다. 모르싸가 드디어 일을 벌인 것이다. 나를 여기로 보내고 바로 일이 나나 싶었는데 몇 개월이 지나도 잠잠하더니 드디어 준비를 마치고 전면전을 시작한 것 같았다. 간간이 나오는 자료 화면에는 세 번째 카타리나의 사진과 그녀가 정글에서 헬기에 오르는 영상이 반복적으로 나왔다.
세 번째 카타리나는 확실히 그 전의 카타리나들과 비슷한 외양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내 눈에는 흐린 화질의 자료화면에도 그녀가 내 카타리나와 다른 점들이 잘 보였다. 확실히 둘은 다른 사람이었다. 인종을 제외하면 오히려 알렉시스가 내 카타리나와 더 비슷할 정도.
영상에는 헬기에서 그녀의 손을 잡고 끌어올려주는 안젤리카도 보였다. 그녀는 역시 평범한 전투원 중 하나로 보였다. 사람들은 저들의 비밀을 꿈에도 모르겠지. 당연히 방송의 모든 포커스는 누가 봐도 주인공 같은 모습의 카타리나에게 맞춰져 있었다.
묘한 느낌이 들었다. 나도 저들 소속이었다면 소속이었다고 할 수 있는데, 이렇게 대서양 건너 멀리 떨어져 보니 남의 일처럼 느껴졌다. 그래도 대단한 경험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는 사건에 간접적으로나마 연루되어 있는 인물이 되다니! 나중에 손주들에게 이야기해 주면 할아버지는 허풍쟁이, 거짓말쟁이라는 소리를 하겠지.
로비 소파에 한 자리를 잡고 음료를 주문했다. 어느덧 내게 재미난 구경거리가 되어버린 모르싸의 쿠데타 뉴스를 음료와 함께 여유롭게 즐기고 싶은 마음이었다. 푹신한 소파에 뭄을 누이고 음료를 기다리는데 프런트 데스크 앞에 직원들이 모여 즐겁게 떠들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뭐 좋은 일이라도 있나?
연말 보너스라도 나온다는 소문이라도 도는 걸까. 조금 흥미가 생겨 귀를 기울여 보았다.
“그냥 쉽게 작년처럼 가는 건 어때요?”
“’작년처럼’이 쉬운 거라고요? 그거 준비하는 데 얼마나 손이 많이 들어갔는지 잊었어요?”
“그렇긴 한데 아이디어 고민은 안 해도 되잖아요.”
“작년 물품들 지배인님이 이미 다 처분했어요.”
“하, 정말 일 처리 깔끔한 것은 대단하시다니까.”
“비꼬는 거 아니죠?”
“존경의 표시예요, 하하.”
무슨 이야기지?
더 크게 듣고 싶었지만 내가 성큼성큼 다가갔다가는 그들이 고객 접대라는 본연의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잡담을 멈추고 내게 필요한 것이 있냐고 물을 게 뻔했다. 내 자리와 그들이 서 있는 프런트 사이에 도청의 거점으로 삼을 만한 다른 의자도 없었기에 나는 귀를 최대한 쫑긋 세웠다.
“그렇다면 드디어 제 아이디어가 채택될 차례인가요?”
“미쳤어요? 그 순록 대가리를 여기저기 걸어두자는 미친 아이디어를 또 꺼낼 생각이에요?”
“순록 대가리라뇨! 헌팅 트로피라는 멋진 단어가 엄연히 존재하는걸요.”
“그놈의 헌팅 트로피는 우리 요양원 벽에 이미 걸려있는 것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해요.”
“제 아이디어는 그거랑은 또 다르다니까요! 산타의 썰매처럼 썰매를 하나 구해서, 썰매 앞에 헌팅 트로피들을 대열 맞추어 허공에 걸어 놓는 거죠. 맨 앞의 대장 자리 순록의 코는 빨갛게 칠해서…”
“그만!”
브라운 슈거를 홍보할 수 있는 실마리를 찾은 것 같았다. 생각해 보니 이제 곧 크리스마스 시즌이었다. 그들은 크리스마스 시즌 맞이 요양원 단장에 대한 아이디어를 토론하고 있었다.
하긴 크리스마스는 서구권에서 엄청나게 중요한 기간이니까. 동양에서도 겨울철이 되면 여기저기 장식들을 하는데 본토인 여기는 오죽하겠어?
아이디어 뱅크를 자처하는 나도 저들의 미팅에 참여해서 아이디어를 내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과거에 라바나에서도 전 임직원(몇 안 되지만)의 열 띈 토론으로 크리스마스 데코레이션을 정하곤 했었지.
올해는 나 없이 잘하려나? 차메로가 냈던 우스꽝스러운 아이디어가 생각났다. 크리스마스트리 꼭대기에 별 대신에 잘 익어 온통 빨개진 문어를 올려놓자는 미친 소리였지. 바로 띠또에게 제압당한 아이디였지만 웃기기는 했어. 8각의 붉은 별, 문어별.
그때 벼락 같이 내 머리를 스치는 생각 하나. 음식과 트리. 빵도 음식이었다. 케이크 중에 ‘부쉬 드 노엘’ 케이크라고 크리스마스 시즌의 유럽에서 주로 소비되는 통나무 모양 케이크도 있다.
통나무 한 조각이 아니라 아예 빵으로 트리 전체를 만드는 건 어떨까? 거기다 크기는 모두가 탄성을 뱉을 정도로 거대하게 만드는 거지! 확실히 이슈가 되지 않을까? 중요한 것은 크기. 크기는 무조건 거대해야 했다. 미술 작품도 거대한 크기의 캔버스가 주는 본능적인 압도감이 있었다.
문제는 빵으로 거대한 트리를 어떻게 만드는가였지만 그것은 브라운 아저씨가 고민할 일이다. 디자이너와 기술자의 관계라고나 할까. 일단 아이디어를 제시하면 가능성 검토는 엔지니어가 하는 것이다.
이제는 이 아이디어를 요양원의 실무진들에게 투척해야 한다. 가능여부를 브라운 아저씨에게 먼저 물어보는 것이 순서이기는 하지만 가볍게 아이디어 회의를 하는 직원들이 있으니 완벽한 타이밍이다. 아직 추상적인 수준의 아이디어이니 실현 불가능하다는 답변을 받아도 문제없겠지. 아직도 열심히 토론 삼매경에 빠져 있는 그들은 내가 근처에 다가가도 눈치채지 못했다.
“안녕하세요!”
내가 먼저 인사를 건네고 나서야 그들은 나를 인지할 수 있었다. 그들은 화들짝 놀라며 업무 모드로 돌아왔다. 뭉쳐 있던 세 명은 뿔뿔이 흩어졌다.
“네, 안녕하세요! 무엇이 필요한가요, 미스터 정?”
나는 자초지종을 말했다.
“제가 방금 우연히 듣게 됐는데 혹시 크리스마스 장식이 고민인가요?”
“이런, 혹시나 저희가 너무 크게 떠들었을까요. 죄송합니다.”
“아뇨, 사과를 요구하려 온 건 아니에요. 마침 저에게 아이디어가 하나 떠올라서요.”
직원이 재미있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얼굴에 진지함은 없었다.
“흥미롭군요! 그럼 들어봐도 될까요?”
그래요, 그 말을 해주기만 기다렸다고요.
전달되는 내용과 달리 별 기대가 없어 보이는 직원의 얼굴. 그의 표정에서는 그저 떠들고 싶어 하는 손님에게 맞춰주기 위한 가벼운 스몰토크의 일환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이 티가 났지만 나는 개의치 않았다.
기다란 테이블. 테이블을 둘러싸고 있는 갈색 가죽의 의자들. 거대한 화이트보드. 지금 내가 와있는 곳은 본관 2층의 회의실이었다. 요양원에 이런 장소가 있는지도 몰랐다. 손님의 신분으로 이런 곳에 정식으로 초대되어 들어오니 기분이 묘했다. 그간 알렉시스와 함께 돌아다닌 관계자 지역들은 모두 몰래몰래 다녀온 것으로 이렇게 정식 초청된 것은 느낌이 확실히 달랐다. 당당함이 다르달까.
긴장을 전혀 하고 있지 않은 나와는 달리 내 옆에 앉아있는 브라운 아저씨는 이 방의 누구보다 긴장하고 있었다. 그는 불안하게 계속해서 콧수염을 꼬아대고 있었는데, 한 방향으로 끝까지 꼬아서 뿌리가 뽑히기 직전이 되면 다시 반대 방향으로 꼬는 것을 반복하는 식이었다.
그때 방의 문이 열리며 우리가 기다리고 있는 마지막 인원이 등장했다. 이 미팅의 마지막 퍼즐인 프란시스였다. 그는 문을 닫고 들어와 자연스레 테이블의 상석에 앉았다.
“다 오셨군요. 그렇다면 회의를 시작하겠습니다.”
옆에서 이번 회의의 간사 정도의 역할을 하는 것 같은 부지배인 크리스티나가 브리핑을 시작했다.
“자 그럼 올해 크리스마스 장식에 대한 회의를 시작하겠습니다. 이번 회의까지 올라온 안건은 최종 한 건 뿐입니다. 그렇다면 해당 프로젝트인 ‘슈거 원더랜드’의 주체자이자 저희 식당의 파티셰인 브라운 씨의 발표가 있겠습니다.”
크리스티나의 소개가 끝나자마자 옆에서 삐걱거리며 브라운 씨가 벌떡 일어났다. 그는 여전히 삐걱삐걱 움직여 화이트보드 앞에 섰다. 요양원 측은 평생을 시골의 제빵사로 살면서 한 번도 비즈니스 프레젠테이션 작업을 해보지 않은 그를 배려하여 컴퓨터 자료를 보지 않고 직접 화이트보드에 발표를 진행하는 것으로 배려를 해주었다. 컴퓨터와 거리가 먼 생활을 살고 있는 브라운 아저씨가 디지털 발표 자료를 직접 만드는 것은 불가능한 수준이었다. 설명을 도와줄 이미지 자료는 출력물로 대체하여 각자에게 나누어졌다.
“그렇다면 프로젝트 ‘슈거 원더랜드’에 대한 발표를 시작하겠습니다.”
드디어 운을 띄운 그의 목소리에는 잔뜩 힘이 들어가 있었다. 마커펜을 쥔 손과 쥐지 않은 손 모두에 힘이 가득 들어가 있는 것이 보이는데, 아저씨의 생김새 때문에 그 모습이 마치 귀여운 장난감 캐릭터 같았다. 나만 그렇게 느끼나 싶어 회의실을 다른 사람들의 얼굴을 살폈지만 모두 진지하고 엄숙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일단은 나만 그렇게 느낀 것 같았다. 유머 감각이 이렇게나 없어서야!
다행히 긴장한 상태에 비해 그의 발표는 순탄히 진행되었다. 알렉시스가 옆에 붙어서 발표 준비를 도와줬다고 했는데, 회의 참석자들에게 배포된 핸드아웃이 그녀의 작품이라고 했다. 그것에 담겨 있는 참고 이미지나 디자인 기획을 대략적으로 보여주는 비주얼 작업이 꽤나 훌륭해서 브라운 아저씨가 머릿속에 어떤 그림을 그리고 있는지 충분히 전달되었다. 21세기 파리의 대학생으로 생활한 노하우가 여기서도 빛나고 있었다.
그의 발표가 끝나고 프란시스가 가장 중요한 부분을 짚었다.
“발표 잘 들었습니다. 대체적으로 마음에 드는 프로젝트라고 생각합니다. 지금껏 저희 요양원에서 해본 적 없는 테마이기도 하고요. 무엇보다 베이커리라는 단어가 주는 따뜻한 느낌이 마음에 들어요.
그런데 가장 중요한 제빵으로 만든 대형 트리 말입니다. 확실히 실현할 수 있습니까? 보존 방법이나 제작 방법에 대한 설명은 일단 다 이해를 하기는 했는데 실제로 그런 것을 본 적이 없어서 말이죠. 제가 유일하게 본 것은 동화 ‘헨젤과 그레텔’에 나온 과자로 만든 집뿐입니다. 물론 그것도 실제로 본 것은 아니죠. 일러스트와 텍스트로, 베드타임 스토리로 듣는 어머니의 목소리로 간접적으로 본 것이니까요.”
프란시스의 냉정한 의문에 브라운 아저씨는 다시 잔뜩 얼어붙었다. 발표가 문제없이 진행되며 자신감을 점점 얻는 것처럼 보이던 아저씨는 질문이 들어오자 다시금 처음의 굳은 자세로 돌아와 있었다.
기회예요, 아저씨! 밀어붙여요!
“예, 가능합니다!”
긴장으로 몸에 잔뜩 힘이 들어간 탓에 막혔다가 한 번에 뚫리는 배관처럼 우렁찬 대답이 터져 나왔다. 당연히 가능하다는 답변을 예상한 프란시스는 흐뭇한 미소로 회의를 마무리 지었다.
“알겠습니다. 이전에 저희가 해본 적 없는 새로운 시도라 더욱 마음에 드는군요. 훌륭한 발표 감사드립니다. 이번 크리스마스의 부르기뇽 요양원은 이 아이디어로 진행하겠습니다. 혹시나 필요하시면 파리의 젊고 유망한 조소 예술가나 공간 디자이너를 추천받아 불러드리겠습니다. 큰 도움이 될 겁니다.
그럼 실행 계획서를 작성해서 요양원 측에 전달해 주세요. 혹시나 서류작성에 필요한 양식은 여기 크리스티나가 제공해 드릴 겁니다. 그럼 미팅은 여기까지로 모두들 수고하셨습니다.”
마무리 인사를 한 프란시스는 미련 없이 회의실을 나갔다. 그의 퇴장을 끝까지 지켜본 후, 나는 발표를 마친 아저씨의 상태를 살폈다.
해냈어요, 아저씨!
브라운 아저씨는 맥이 탁 풀린 것 같았다. 저대로 두면 바닥에 녹아내릴 것 같은 모습이었다. 그래도 나는 아직 할 일이 남아 있었다. 알렉시스가 아저씨의 발표 준비를 도왔다면 나는 아저씨가 날아오를 수 있는 다음 발판을 마련해야 했다.
나는 연신 이마에 흐른 땀을 훔치고 있는 아저씨를 내버려 두고 프란시스를 따라 회의실을 나갔다. 저 멀리 프란시스가 아직 복도를 벗어나지 않은 것이 보였다. 나는 후다닥 달려가 그를 붙잡았다.
“아, 미스터 정! 무슨 일인가요? 발표는 참 훌륭했습니다. 이번 프로젝트에 크게 기여했다고 들었는데, 과연 기대해 봐도 되겠더군요. 의무실에서의 일도 있고, 이렇게 자신의 일도 아님에도 우리 요양원을 위해 이렇게 힘써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고마워요. 그런데 하나 중요한 또 다른 안건이 있어서 말이죠.”
노련한 프란시스는 내 한 마디에 바로 꿍꿍이가 있음을 느낀 것 같았다.
“그게 뭐죠? 지금 들어봐도 될까요?”
“이번 슈거 원더랜드 프로젝트 말인데요…”
엄격한 상사가 듣기 싫어하는 말을 보고해야 하는 신입 사원의 심정이 지금의 나와 비슷하지 않을까. 그가 풍기는 위압감에 나도 모르게 바로 본론을 꺼내지 못하고 말을 흐렸다. 프란시스는 조금 더 짙은 눈으로 추궁했다.
“예, 프로젝트에 대해서 어떤 걸 상의하고 싶나요?”
“프로젝트를 매스컴을 통해 홍보하는 건 어떨까요?”
선뜻 말이 나오지 않았지만 어차피 해야 할 말이니 냅다 질렀다. 프란시스는 절대로 손님의 말을 자르지 않았지만 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단호히 거절했다.
“죄송하지만 그건 안 됩니다. 저희 요양원은 고객들의 비밀로 운영되는 곳이란 것을 아시잖아요? 더욱이 관련된 카테고리 안에 속하신 미스터 정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테고요. 혹시 최근에 뉴스를 보셨을지 모르겠지만 미스터 정의 뒤를 봐주는 분이 커다란 사고를 치고 계시던데요? 이런 때일수록 최대한 조용히 엎드려 있는 게 보통 맞지 않을까요.”
“그렇죠, 그건 잘 알고 있어요. 요즘 시끄럽더라고요. 그런데 요즘에 요양원 운영이 조금 침체기를 맞고 있다고 하지 않았나요?”
“그랬죠. 제가 그때 괜한 소리를 했었군요. 앞으로는 요양원 운영에 관한 사담을 고객과 나누는 것을 스스로도 철저히 금해야겠습니다. 그럼 저는 이만.”
프란시스는 냉정한 표정으로 돌아섰다. 그를 붙잡아야 했다.
“슈발 블랑! 아만! LVMH!”
프란시스의 발걸음이 딱 멈추더니 휙 하고 나를 돌아봤다. 처음 보는 날카로운 그의 눈빛에 나는 숨을 ‘헉’하고 들이켰다. 아래 부하직원들을 교육하거나 질책할 때 저런 표정을 지을 것 같았다. 그의 얼굴은 냉정하다 못해 그가 쳐다보는 것을 모조리 얼려버리려는 것 같았다.
고객한테 저런 표정 지어도 되는 거야? 요양원의 일을 도와주고 있다지만 나는 손님이라고!
하지만 나는 그와 나의 위치를 다시 상기시켜 주는 것보다는 얼른 그를 진정시키고 계속해서 설득하기로 했다.
“그 빌어먹을 놈들로부터 요양원을 지켜야죠! 그리고 이 요양원을 프란시스의 손으로 한 단계 더 진화시키는 겁니다. 한국의 한 기업은 아버지가 왕국을 만들어 아들에게 물려주었는데, 아들이 그 왕국을 제국으로 만든 사례가 있어요. 당신도 충분히 그런 신화를 쓸 수 있는 사람이잖아요.”
그 답지 않은 한동안의 정적이 흐르고 프란시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제 사무실로 가시죠. 여기는 그런 이야기를 하기에 적합하지 않네요.”
프란시스의 말처럼 뒤에서 회의실을 정리하고 나오는 직원들이 복도에 보였다. 그리고 이곳은 다른 투숙객들이 언제든지 나타날 수 있는 곳이었다. 나는 얌전히 그를 따라 그의 사무실로 향했다.
“홍보를 하라고요?”
그의 개인 사무실에 도착한 프란시스는 길게 끌 것도 없다는 듯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그는 자신의 거대한 업무용 의자에 앉아서 빙글 한 바퀴 돌았다.
“네, 맞아요. 그러나 감출 것은 잘 감추자는 말이에요.”
“어떻게요?”
“지금도 저 같은 손님이나 일반적인 손님이나 모두 섞여 있잖아요? 그냥 손님 관리만 나눠서 하면 되지 않을까 하는 거예요.”
“그렇게 단순할까요?”
“지금과 크게 다르지 않을 거예요. 다만 손님이 늘고 눈과 귀가 늘어날 뿐이죠.”
“그게 문제예요.”
“그냥 음지의 것은 더욱 음지로 파서 넣자고요. 아예 체크인부터 다르게 진행하고 관리하는 직원들도 이원화해서 관리해 봐요.”
프란시스는 대답하지 않고 다리를 꼬더니 깊은 고민에 빠졌다. 불편한 기다림. 그의 대답을 기다리다 조금 지루해져 혼자 발가락으로 장난을 치기 시작할 때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저희 요양원은 전설 속 엘도라도 같이 숨겨진 장소는 아니지만 충분히 일반인들 눈에는 잘 보이지 않는 곳입니다. 보통 손님들은 기존 손님들의 추천을 통해 알음알음 찾아옵니다. 그것이 저희 요양원의 정체성이지요. 프라이빗을 중요시하는 스위스식 인간 은행.
어째서 미스터 정은 제가 이 요양원을 더 키우고 싶어 한다고 생각하나요?”
“그저 현상유지만 바라는 사람이라면 LVMH나 다른 경쟁사들에 대해 그렇게 민감하게 반응하지 않을 것 같았어요. 나중에 요양원이 쇠퇴해서 폐업하게 된다 하더라도 프란시스 본인은 폐업 정리 후에 쌓은 어마어마한 부로 잘 먹고 잘 살아가면 되겠죠. 아마 앞으로 3대는 더 떵떵거리며 살 수 있지 않나요? 그러나 그걸 바라는 게 아니잖아요? 이 요양원을 잘 가꿔서 프란시스의 자손에게 물려주고 싶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이 훌륭한 요양원을 더 대단하게 만들어서 물려줄 수 있다면요?”
나의 말은 그의 내면을 두드렸다. 그는 잠시 마음속의 자신과 대화하는 시간을 가졌다. 또 한 번의 기다림. 또 한 번의 발가락 놀이가 시작되었을 때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홍보가 실질적으로 효과가 있으려면 아이템이 확실해야 하겠죠.”
긍정 신호였다. 이를 놓치지 않고 재빨리 맞장구쳤다.
“물론이죠! 아예 매스컴에 제보할 때 엄청난 트리가 제작 중이라고 말하죠.”
“그러려면 빵 트리의 크기가 기네스에 도전하는 급은 되어야겠네요.”
“무조건이죠.”
물론 내가 자신 있게 주장하는 이 내용은 사전에 브라운 아저씨와 상의된 것이 아니었다. 프로젝트 자체를 가뜩이나 부담스러워하고 있는데 기네스 기록을 경신하라는 말을 전해주면 까무러칠 아저씨가 그려졌다. 그래도 기네스 정도는 도전해야지 작업에 더 열의가 생기지 않겠어?
“그리고 취재진에게는 스위트를 하나씩 내주겠다고 해야겠습니다. 저는 어느 매체가 적합할지 알아보겠습니다.”
“그렇게 하면 이곳 취재를 따내려고 기자들이 아주 달려들겠는걸요?”
“좋아요, 한번 해봅시다. 또 한 번, 좋은 생각을 나눠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야기를 들어주셔서 제가 감사하죠.”
프란시스의 사무실을 나와 문을 조용히 닫았다. 문이 닫힌 것을 확인하고 나는 소리 없이 주먹을 불끈 쥐고 허공에 내질렀다. 브라운 아저씨와 알렉시스에게 이 소식을 알릴 생각에 걸음은 거의 달릴 듯 빨라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