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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한진 Oct 18. 2024

챕터 26. 12월

    26. 12



    마침내 겨울이 찾아왔다. 아침 첫 숨결에 희고 축축한 입김이 나오는 것으로 시작되는 이 계절은, 알렉시스를 위시로 하는 스키 애호가들에게는 기다리고 기다리던 계절일 테고 바다수영을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지옥 같은 계절이겠지.

    반면 나에게는 큰 감흥 없는, 매년 반복되는 춘하추동의 하나일 뿐이었다. 대서양을 건너 맞이하는 첫겨울이었지만 중미에서 보지 못했던 눈을 넘치게 볼 수 있는 것을 빼면, 글쎄? 굳이 의미를 더해보자면 올해 겨울은 쉬지 않고 흐르는 시간의 냉정함을 피부의 냉점으로 느낄 수 있는 계절이었다. 맥락 없이 흘러가던 올해가 벌써 겨울에 접어들고 있다니. 조금은 삶을 천천히 살고 싶은 사람에게 멈출 생각이 없는 시간은 늘 야속하다.


    모르싸의 소식은 개전 이후로 더 이상 찾아보지 않았다. 찾으려 하지 않아도 언젠가는 쿠데타의 결과가 들려올 것이다. 안젤리카, 그녀의 원대한 꿈이 성공했을지, 좌절되었을지. 그 결과를 목도했을 때 나는 어떤 감정을 가지게 될지.

    당장의 나는 여기서의 내 삶이 더 중요했다. 물론 내가 펑펑 쓰고 있는 것이 그녀의 돈이기는 했으나 애초에 그러라고 나를 여기로 보낸 것이 아닌가. 그게 아니라면 애초에 나를 공항에 툭 던져두는 것으로 끝내지 말고 생활 가이드를 만들거나 감시역을 붙여 내 생활비를 통제했어야지.

    그러나 소식을 원치 않는 내 바람과 달리 멕시코에 국가 단위의 전운을 불러온 모르싸 사건은 글로벌 쇼킹 뉴스였던지라, 전 세계의 뉴스 채널에 종종 근황이 보도되고 있었다. 뉴스 내용을 자세히 알고 싶지 않았던 나는 조금씩 진전되는 전쟁 진행 상황이 TV에 나오기라도 하면 고개를 돌려 한 귀로 모조리 흘려버리려 했다. 그랬던 나도, 사건 발발 이후 안젤리카의 쿠데타가 세상에 이슈 되고 있는 방식이 그녀의 의도와는 다르게 조금 독특해져 버렸다는 사실에는 집중할 수밖에 없었다.

    바로 카타리나가 북미와 유럽의 10대 소녀들에게 일종의 어떤 심볼이 되어버린 것이었다. 거친 정글 속 전설의 아마조네스 수호신 같은 비주얼 이미지를 가진 카타리나가 신흥 종교가 된 것은 그녀가 가진 조건들을 나열해 보면 나름 합당하고 자연스러운 결과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녀는 거칠고 쿨한(십 대들의 눈에는) 범죄 조직에 속해 있으며, 심지어 짐승 같은 마초남들이 가득한 그곳의 여성 리더였다. 거기다가 기득권의 대표라고 할 수 있는 정부를 상대로 쿠데타를 일으킨 그녀는 21세기 여성 버전의 ‘체 게바라’가 되어 SNS 계정의 프로필 사진으로 사용되거나, 스티커로 제작되어 많은 여학생들의 맥북 커버를 장식하고 있었다.



    모르싸의 실상을 가까이서 목도한 나는 헛웃음이 나올 수밖에 없었는데, 그들이 자행하는 공포통치가 얼마나 잔인무도하고 고어한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어서였다. 잔인하기로 유명한 멕시코 카르텔 중에서도 가장 잔혹했던 모르싸다. 그들이 뛰는 필드인 중남미에서는 이미 악명이 자자했지만, 그곳과는 완전히 다른, 포근하고 평온한 세계에 살고 있는 북미와 유럽의 청소년들의 침실에는 그런 디테일한 정보들이 잘 알려지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하긴 텍스트나 이미지로 진실을 접했다 해도 실제로 그 세상에 살고 있지 않은 이상 크게 와닿지 않는 것이 사람이었다. 당장 북한과 휴전 중인 한국 사람들이 느끼는 휴전 상태의 긴장감이 외국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느슨하다는 것이나, 종군기자들이 찍은 중동 내전의 잔혹한 사진들을 보고 있지만, 그 사진을 보고 있는 푹신한 침대 위에서는 전쟁에 시달리는 민간인들의 심정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이미 우상화, 아이돌화가 완료된 카타리나는 뭇남성들을 자신의 발아래에 두고 진두지휘하는 당찬 여리더의 모습으로 새로운 페미니즘의 아이콘이 되어버렸다. 미국 보스턴의 한 중학교에서는 카타리나의 추종자들이 모이는 소모임도 생겨 정기적으로 그녀에 대해 토론하는 행사를 치르고 있다는 소식으로 뉴스가 마무리되었다. 개중에 미적감각이 뛰어난 멤버 하나가 그린 도안으로 팔뚝에 그녀의 옆모습 실루엣의 타투를 단체로 새겨 넣기도 했다.


    나와 알렉시스의 관계는 어느 선에 다다르자 크게 진전이 없었다. 같이 있으면 알콩달콩한 것이 느껴졌으나 마지막 한 걸음을 앞두고 관계를 확실히 할 엄두가 잘 나지 않았다.

    어떤 문제 때문인지 나 스스로도 정확한 이유를 진단할 수 없었는데, 몇 가지 문제 후보들은 추려낼 수는 있었다. 그녀 주변을 맴도는 남자들(이곳뿐만 아니라 파리에서도 드글거릴 것이다) 때문이거나, 아직 안젤리카와 카타리나가 내 무의식을 꽉 쥐고 있어서거나. 그것도 아니면 근래에 너무 죽마고우처럼 가까이 붙어 다닌 것이 원인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래서 나름의 처방으로 최근에는 그녀와 만나는 횟수도 의식적으로 줄이고 있었다. 이 좁고 할 것 많지 않은 요양원에서 그녀를 의식적으로 피하기 시작하는 것은 하루하루를 매우 지루하게 만들었지만 도전해 볼만한 가치가 있는 시도였다. 물론 이 새로운 방침에 그녀의 동의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만약 그녀가 내게 나만큼의 관심이 없는 상태라면, 다시 말해 지금까지 그저 일방적인 관계였다면 그녀는 끝까지 이 변화를 알아차리지 못할 수도 있다. 아주 조금만. 조금만 떨어져 본다면 보이지 못한 것이 보이리라.



    요양원의 로비에는 슈거 원더랜드 프로젝트가 성공적으로 진행되었다. 총 공사 기간에 1주일이 소요된 프로젝트는 브라운 아저씨와 파리에서 섭외된 2인으로 구성된 소규모 인테리어 디자인 사무소와 조형 작가 한 명의 협업으로 진행되었다. 디자이너들이 그려준 도안으로 브라운 아저씨는 빵 트리를 제작하는 것에 주력했고, 트리의 오너먼트들과 주변 다른 부수적인 장식들은 프로젝트의 테마에 맞춰 디자이너들이 솜씨를 부렸다.

요양원에 거주하고 있는 만큼 로비의 변화를 매일매일 지켜볼 수 있는 나는 세 명의 작업자들이 확실히 프로는 프로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은 각자 맡은 일을 훌륭하게 성공해 냈는데, 정말로 빵으로 트리를 만들고 있는 브라운 아저씨와 감각적인 디자이너들의 손길이 닿은 공간들은 명품 브랜드 플래그십 스토어에 온 것처럼 아름다웠다.

    그렇게 로비는 프란시스와 임직원들, 그리고 손님들 모두가 만족하는 공간으로 재탄생했다. 한 가지 단점이 생겼다면 로비에 들어서는 즉시 잘 구워진 빵 냄새가 사람들의 코를 맛있는 자극했다는 점이다. 그래서 로비는 공복 상태나 허기진 상태에서는 출입해서는 안 되는 공간으로 불리기도 했다.


    성공리에 작업을 마친 브라운 아저씨도 계속해서 좋은 나날들을 보내고 있었다. 트리를 제작하는 데에는 평소보다 많은 에너지를 쏟아야 했지만 만드는 중이나 만들고 나서나 모두 행복한 표정이었다.

    그의 일일 스케줄 상, 트리 제작은 오후에만 한정적으로 진행될 수 있었다. 새벽부터 오전에는 여전히 자신의 마을과 요양원 두 곳에 빵을 공급해야 한다는 자신 본연의 임무를 수행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오후에 의무실 보조 일을 마치고 로비나 식당으로 내려가면 열심히 제작에 몰두 중인 아저씨를 볼 수 있었다. 필시 하루에 잠을 몇 시간밖에 잘 수 없는 1주일이었을 테지만, 꿈을 위해 애를 쏟는 아저씨는 오히려 더 생기 있어 보이기도 했다.

    아저씨는 트리에 필요한 빵들을 모두 요양원 식당의 오븐으로 만들 수 있는 배려를 받았다. 이 요양원 측의 배려가 정말 다행인 것이 몽멜리에에 있는 아저씨 개인 소유의 오븐과 작업실은 규모도 작았고 트리가 설치될 요양원과도 거리가 멀어서 요양원의 시설을 제공받지 않았다면 프로젝트 진행이 두 배로 힘들었을 것이었다.

초대형 빵 트리는 기둥부터 착실히 제작되었다. 중앙에 철근 콘크리트의 철근 역할을 하는 기둥을 바게트와 비슷한 질감의 빵이 감싸는 형태였다. 바게트와 다른 점은 빵의 표면이 나무껍질과 비슷한 색을 내도록 조금  더 구워졌다는 것과 나무의 결을 살리기 위해 표면 질감에 신경이 쓰였다는 점이었다.

    제작된 트리는 장기 보존을 위해 달지 않은 설탕으로 코팅이 되었고, 벌레를 방지하기 위해 약을 뿌리는 것으로 마감이 되었다. 다행히 벌레가 적은 겨울이기도 했고, 요양원 내부 위생은 항상 관리가 잘 되고 있었기 때문에 벌레가 잔뜩 꼬여 벌레 트리가 되는 참사는 발생하지 않았다.

    행사에는 프란시스가 회의 중에 언급했던 헨젤과 그레텔의 아이디어도 차용되었는데, 크리스마스 이틀 전인 23일에 예정된 크리스마스 전야파티(‘스윗 나이트 인 슈거 원더랜드’로 명명된)에서 아이들과 어른들 모두 뜯어먹어볼 수 있는 작은 트리가 추가 제작되어 공개될 예정이었다. 이번 프로젝트의 가장 핵심인 메인 트리는 약품 처리가 되어 먹을 수 없었기 때문에 식용 트리를 추가 제작하는 것이다.

    본 파티에는 요양원과 슈거 원더랜드 프로젝트의 홍보를 위한 취재진도 초대가 된 상태였다. 그들의 기사와 포스팅으로 프란시스와 브라운 아저씨, 그리고 프로젝트에 참가한 작가들은 원하는 성취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요양원의 홍보, 자신의 꿈을 위한 발판, 자신들의 포트폴리오 확장. 모두에게 중요한 순간이 될 연말 시즌 파티를 모두가 고대했다.


    나도 그들과는 다른 이유지만 파티를 고대하고 있었다. 마침 파티 날에 오전 근무가 잡혀 있는 알렉시스를 저녁 파티에 초대할 참이었기 때문이다. 폐쇄적인 요양원이 개최하는 파티인 만큼 당연히 파티에는 정식으로 초대받은 게스트들과 요양원 투숙객을 제외하면 참석이 불가능했다. 파티장에 있을 수 있는 요양원 직원들이라면 파티의 식음료 케이터링 서비스를 맡은 선별된 웨이터들과 요리사들 정도로 파티 운영과 관련 없는 요양원의 스태프들은 개인적으로 참여가 불가능했다.

    나 홀로 투숙객인 나에게는 개인적인 손님을 초대할 수 있는 여분의 티켓이 있었고 나는 이 티켓을 알렉시스를 위해 사용하기로 했다. 나의 초대를 받는 형식으로 그녀는 크리스마스 전야파티에 올 권한이 생겼다. 이 이야기를 들은 알렉시스는 날듯이 기뻐했다.


    “어쩌죠, 저 여기 올 때 드레스 안 챙겨 왔는데! 일하고 스키만 타러 왔지 이런 럭셔리한 파티가 있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고요!”


    나는 아쉬움에 아예 발을 동동 구르는 그녀를 달랬다. 사람을 진정시키는 가장 확실한 방법을 알고 있다. 바로 해결책을 제시하는 것이다. 간단한 문제였다. 없으면 사면된다.

    그녀에게 요양원 직원들이 고객들이 원하는 물품들을 주로 사나르는 그르노블로의 쇼핑을 약속했다. 편안한 쇼퍼 서비스로 함께 마을에 가서 쇼핑몰을 돌아보다가 괜찮은 드레스를 하나 사는 거다. 그러면서 동네도 구경할 수 있을 것이다. 몽멜리에 빵집 탐사 때와 마찬가지로 함께 여행을 떠나는 기분을 느낄 수 있다고 생각하니 어서 빨리 다음 주가 왔으면 하는 마음이 가득했다. 그녀를 파티에 초대하기로 약속한 다음 다시 거리유지를 위해 그녀를 멀리하기로 한 나지만, 그녀와의 파티를 떠올리면 소풍을 기다리는 초등학생 아이의 동심으로 돌아간 기분이었다.


    이렇듯 12월의 모두가 따뜻한 연말을 기대하고 있었다. 두툼한 털실 양말을 난롯가에 걸어두고 산타가 오기를 바라는 아이처럼 사람들은 행복한 겨울을 소망했다.

    심술궂은 그린치가 크리스마스를 훔치러 알프스에도 찾아오지는 않겠지? 어릴 적 핫초코를 머그컵에 준비하고 마시멜로를 올려 텔레비전 앞에서 본 영화, 짐 캐리의 그린치가 생각났다. 물론 그린치가 이곳 부르기뇽에 올 것 같지는 않았다. 그는 이런 세속적인 때가 잔뜩 묻은 크리스마스를 훔치기보다 동심 가득한 산골 마을 어린이들의 순수한 크리스마스를 훔치는 것을 더 즐길 것이니까.

    대신에 요양원에 찾아온 것은 영화에서 보았던 녹색의 괴물이 아닌 내 새로운 이웃이었다. 그녀는 한밤중 산타의 방문처럼 조용히 내게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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