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차 세계대전이 연합국의 승리로 마무리되던 1945년 6월, 독일군의 폭격으로 시내 곳곳이 폐허로 변해버린 영국 런던에 스물여덟 살의 젊은 미국 기자 한 명이 도착한다. 183㎝의 호리호리한 체격에 푸른 눈과 금발이 매력적인 청년이었다.
미국 허스트지 소속 특파원이었던 그는 전쟁의 시뿌연 포연이 채 가시지 않은 유럽 대륙의 모습과 이곳에서 앞으로 펼쳐질 미래의 모습을 독자들에게 알리기 위해 대서양을 건넜다.
나이는 젊었지만 그의 경력은 이미 화려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해군 장교로 복무했던 그는 고속어뢰정 PT109의 정장으로 임명돼 태평양 전선의 최일선에서 일본군과 맞서 싸웠다.
일본군 구축함과의 기습 공격으로 배가 격침되는 위기를 겪었지만 위험을 무릅쓰면서 부하들을 구출해낸 공로로 무공훈장을 받았던 전쟁 영웅이었다. 정신을 잃은 부하 병사를 구출하기 위해 부하의 허리띠를 입에 문 채로 6㎞가 넘는 바다를 헤엄쳤던 덕분이었다.
대학 졸업 논문으로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다
그는 널리 알려진 베스트셀러 작가이기도 했다. 하버드대학교 4학년이던 1940년에 그가 쓴 <영국은 왜 잠자고 있었나>(Why England Slept)는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입체적이면서도 생생하게 풀어낸 덕분에 전쟁이 터진 뒤 수많은 이들에게 읽혔다.
스무 살이던 1937년 여름에 유럽 각국을 돌아다니며 각 나라의 정치 지도자, 고위 장성, 관료들과 나눴던 대화 내용과 직접 눈으로 확인했던 급박했던 정세를 바탕으로 전쟁의 발발 원인을 치밀하게 분석해낸 책이었다. 그가 처음으로 세상에 이름을 알렸던 순간이었다.
실제로 이 젊은 기자는 전쟁 발발 전에 전쟁이 곧 닥칠 것임을 미국 정부에 공식적으로 알렸던 인물이었다. 1939년 8월 친구와 함께 나치 독일의 베를린을 여행하다 독일군에게 체포당할 뻔했던 위기를 겪었던 그는 온 나라가 전쟁의 광기에 휩싸여있던 독일의 분위기를 감지하고
‘독일이 일주일 안에 전쟁을 일으킬 것’이라는 비밀 메시지를 주영 미국대사이던 아버지에게 전달한다. 그리고 9월 1일 나치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하며 유럽 대륙은 6년 동안의 전쟁에 휩싸이게 된다.
그가 군대에서 예편하자마자 곧바로 특파원으로 유럽을 찾았던 건 잿더미에 파묻힌 유럽의 미래를 예측하는 데 그만큼 뛰어난 능력을 갖고 있는 인물을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전쟁을 예견하는 데 사용했던 식견과 판단력을 이제는 미래의 큰 흐름을 내다보는 데 쓸 시간이었다.
영국을 시작으로 독일, 프랑스, 아일랜드 등 유럽 각국을 돌아다니며 취재한 그는 본국에 보낼 기사와는 별도로 자신만의 견문록을 작성하기 시작했다. 객관적인 사실과 매일 벌어지는 사건들을 전달하는 기사와는 달랐다.
이 글에는 종전 이후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혼란에 빠져들었던 당시의 국제정세에 대한 그의 솔직한 전망들의 그대로 담겨있었고 그의 예측 대부분은 현실이 됐다.
종전을 계기로 창설된 UN(국제연합)이 결국 말잔치만 난무하는 자리가 될 것이라는 회의적인 시각과 얼마 뒤면 핵무기를 갖게 될 미국과 소련 사이에 벌어질 냉전에 대한 예측이 그의 선견지명을 잘 보여준다.
“마지막으로 훨씬 더 중대한 문제는 강대국 중 어느 나라도 최종 분석에 따라 전쟁이냐 평화냐를 결정하는 일을 안전보장이사회에 파견된 대표의 손에 맡기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이사회의 권한이 겉돌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점이다.”
“미소 분쟁은 너무나 끔찍해서 글자 그대로 그것을 사용하는 모든 나라의 파멸을 불러올 수도 있는 무기(당시 맨해튼 프로젝트를 통해 비밀리에 개발되고 있었던 원자탄을 가리킴)를 마침내 개발함으로써 무한정 지연될 가능성도 있다. 따라서 전쟁의 공포에 지대한 공헌을 해온 과학은 전쟁을 억제하는 수단으로도 여전히 유효할 것이다.”
50년 뒤에야 출간된 책, <대통령이 된 기자>
이 젊은 기자가 남겼던 견문록이 책으로 출간되는 데는 정확히 50년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그가 세상을 떠나고도 수십 년이라 흐른 뒤였다. 이 기자는 유럽에서 돌아온 지 1년 뒤 하원의원에 당선되며 정치에 입문했는데 유럽 취재 동안 작성했던 육필 원고를 자신의 보좌진이었던 디어더 핸더슨에게 맡긴다.
1995년 노년에 접어든 핸더슨 여사는 보관하고 있던 원고를 묶어 한 권의 책을 펴낸다. 제목은 <리더십의 서곡>(Prelude to Leadership)이다.
훗날 세계 최고의 리더가 되는 인물의 젊은 시절의 기록을 담아냈다는 뜻이다. 한국어 번역판의 제목은 <대통령이 된 기자>다. 지금까지 말했던 스물여덟 살의 젊은 기자의 이름은 존, 그는 미국의 35대 대통령 존 F. 케네디다.
에이브러햄 링컨, 시어도어 루스벨트처럼 글로써 명성을 떨쳤던 백악관의 앞선 주인들처럼 케네디 역시 글솜씨로는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인물이었다.
스물세 살에 졸업논문으로 썼던 글이 베스트셀러가 됐고, 대통령이 되기 전에 <용기 있는 사람들>(Profiles in Courage)란 책으로 최고의 작가들에게 주어지는 퓰리처상을 손에 쥘 수 있었으니 말이다.
사실 인생이 원하는 대로 흘러갔다면 우리는 그를 정치인이 아닌 뛰어난 작가나 역사학자로 기억하고 있을지도 몰랐다.
젊은 시절 그의 꿈꿨던 미래의 모습이었으니 말이다. 미국에서도 알아주는 대부호 가문의 둘째 아들로 태어난 그는 원래 세상과 한걸음 떨어져 문장과 문장, 단어와 단어 사이를 여행하는 작가로서의 삶을 꿈꿨었다.
하지만 2차 세계대전에 폭격기 조종사로 참전했던 그의 형이자 집안의 장남인 조셉 케네디가 1944년 작전 중에 사망하면서 그는 인생의 항로를 돌려야만 했다. 반드시 자신의 아들을 대통령으로 만들겠다는 아버지의 열망에 충실히 부합하는 삶을 살았던 형이 죽음으로써 아버지와 가문의 기대는 차남이었던 케네디에게로 향한다.
케네디 역시 자신을 향한 아버지와 가족들의 기대에 적극적으로 응했다. 대부호이자 주영 미국대사까지 지낸 거물의 아들로 태어나 어린 시절부터 미국은 물론 세계 주요 국가들의 정치 지도자들과 만나왔던 그의 내면엔 정치에 대한 강한 열망이 자리 잡고 있었다.
작가를 꿈꿨던 젊은 이상주의자에게 정치에 입문하는 건 자신이 꿈꿔왔던 이상을 현실 세계에서 실현할 수 기회로 여겨졌다.
38살의 상원의원이 병실에서 책을 쓴 이유
기자로서 유럽에 다녀온 이듬해인 1946년 그는 매사추세츠 주 하원의원에 당선되며 정치인으로서의 삶을 시작한다. 이후 그의 앞에 어떤 인생이 펼쳐졌는지는 대부분의 독자가 알 것이다.
1960년 민주당 후보로 대선에 출마한 그는 공화당 후보 리처드 닉슨을 꺾고 미국의 제35대 대통령이 된다.
대통령을 목표로 한 걸음, 한 걸음씩 나아가던 시기, 정확히는 1956년 그는 한 권의 책을 내놓는다. 1954년 10월, 10대 시절부터 그를 괴롭혔던 고질병인 허리 통증을 치료하기 위해 척추 수술을 받은 그는 덕분에 몇 달 동안 꼼짝없이 병원에 입원해서 지내야만 했다.
그리고 그는 이 시간을 자신이 그토록이나 쓰고 싶었던 글을 쓰는 데 투자한다. 이때 나온 책이 그에게 퓰리처상 수상의 영광을 안겨준 <용기 있는 사람들>이다. 케네디는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 책을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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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인간의 미덕 중 가장 귀중한 것인 ‘용기’에 관한 책이다. 어니스트 헤밍웨이는 용기란 말을 ‘수난 밑에서의 기품’이라고 정의했다. 그리고 이것은 여덟 명의 미합중국 상원의원들이 겪은 고난과 또한 그들이 가진 기품을 바탕으로 이를 극복해 낸 이야기다.”
그의 말처럼 이 책은 존 퀸시 애덤스, 다니엘 웹스터, 토마스 하트 벤튼, 샘 휴스턴 등 미국 역대 상원의원 여덟 명이 걸어온 길과 그들을 만든 결정적인 순간을 담아내고 있다. 용기 있는 사람들이란 제목처럼 이 여덟 명에겐 대중들의 거센 비난과 동료들의 조롱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신념을 꺾지 않았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불과 5년 뒤 세계 최고의 권력자가 되는 서른여덟 살의 야심만만한 젊은 상원의원이 세상을 떠난 지 길게는 150년 가까이 된 앞선 정치인들에 대한 전기를 쓴 이유는 무엇일까?
그 이유는 내적인 동기와 외적인 동기로 나눠서 살펴볼 수 있다. 첫째, 작가와 역사학자를 꿈꿨던 그에게 미국 정치사에 큰 발자취를 남긴 고독한 거인들에 대한 글을 쓰는 일은 그 자체로 큰 즐거움을 주는 일이자 꼭 해내야만 하는 책무였다.
어떤 어려움이 닥치더라도 자신의 신념을 꺾지 않는 정치인이 되고야 말겠다는 열망 역시 그로 하여금 펜을 들게 만들었다. 그에게 글을 쓰는 일은 존경하며 닮기를 바라는 인물들을 떠올리며 그들처럼 살아가겠다고 스스로에게 다짐하는 과정이었다. 글로써 남기지 않으면 기억되지 않고, 기억되지 않으면 배울 수 없기 때문이다.
“그들 사이의 차이가 어떠한 것이었건 간에 여기에 다시 전기가 소개되는 미국의 정치가들은 하나의 영웅적 특질, 즉 ‘용기’를 다 같이 가지고 있었다. 나는 그들의 생애, 그들이 자신들의 생애를 바친 이상, 그들이 내세우고 싸우면서 지켜낸 주의, 그들의 덕망과 그들의 죄악, 그들의 꿈과 그들의 환멸, 그들이 얻은 칭송과 그들이 견뎌낸 비난들을 엮기로 했다. 이 모든 것은 글로써 엮어지는 것이다.”
그에겐 글을 써야만 하는 또 다른 중대한 이유가 있었다. 그는 글을 통해 미국인들, 그중에서도 오피니언 리더라고 불리는 식자층에게 자신이 국가를 이끌어나갈 경륜과 능력, 결단력을 갖춘 대통령감임을 입증하려 했다.
젊고, 훤칠한 외모와 쾌활한 성격으로 대중들의 인기를 얻는 데 성공한 그였지만 때로는 그런 이미지가 대통령이 되기엔 너무 어리고, 가볍다는 인상을 사람들에게 심어줬다.
연륜 있는 지도자를 원하는 사람들일수록 그를 세상 물정 모르는 철부지 부잣집 도련님으로만 바라봤다. 막대한 재산을 갖춘 집안에서 태어난 덕분에 손에 물 한 번 묻히지 않았던 애송이를 세계 최고의 권력자로 만들 수는 없다는 분명 타당한 근거를 갖춘 반대였다.
세상 사람들에게 정치인 캐네디의 자기소개서를 발표하다
케네디의 직전 대통령은 드와이트 아이젠하워였다. 연합군 사령관으로써 2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끈 오성장군 출신 대통령의 후임자로 삼기엔 케네디는 너무 어리고, 경험이 부족하다는 게 정치권과 식자층의 생각이었다.
평범한 정치인이었다면 이런 상황에서 어떤 판단을 내렸을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때가 오기를 기다리며 조용히 자신의 능력과 경험을 쌓는 길을 택했을 게 분명하다.
하지만 케네디는 그러지 않았다. 자신에게 이미 국가를 이끌어갈 충분한 능력이 있다고 확신한 그는 조용히 숨죽이며 기다리는 대신 사람들의 생각을 바꾸기로 결심한다.
사람들에게 그들이 케네디를 과소평가했음을 인정하게 만들려 했다. 글을 통해 자신의 비전과 목표, 국가관, 판단력과 사고력을 공개함으로써 대중과 식자층에게 자신을 검증해줄 것을 공개적으로 요구한다.
글 쓰는 작가는 홀로 링에 올라 상대와 맞서 싸우는 권투 선수와 같다. 권투 선수가 사각의 링 위에서 사투를 벌이듯 작가는 사각의 원고지 위에서 고독한 싸움을 벌인다.
아무리 뛰어난 코치와 트레이너가 뒤에 있고, 수많은 팬들이 자신의 이름을 외친다고 해도 링 위에서는 결국 혼자다. 누구의 도움도 없이 오직 스스로의 힘으로만 싸워나가야 한다. 자신의 두 주먹과 꺾이지 않는 투지 말고는 그 무엇도 그에게 승리를 가져다줄 수 없다.
작가도 마찬가지다. 글 쓰는 일은 누구도 대신해줄 수 없다. 아무리 많은 사람들이 그를 돕는다고 해도 생각을 정리해 문장으로 옮기는 건 결국 작가 자신의 몫이다. 마지막 문장의 마침표를 찍을 때까지 그는 홀로 수많은 밤을 지새워야만 한다.
그렇기에 글쓰기는 자신의 모든 것을 사람들 앞에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일이다. 그가 선택한 단어 하나, 문장 한 줄에 그의 지적 능력과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 판단력이 그대로 묻어 나오게 된다.
자신에 대한 강한 자신감이 있는 자만이 글을 쓸 수 있는 이유다.
그리고 케네디는 사람들에게 작가로서의 자신의 역량은 물론 역사관, 정치관, 사명의식 등 국가를 이끌어가는 지도자를 선택하기 위해 필요한 여러 자질들을 있는 그대로 공개한다.
내가 누구이고,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지 솔직히 말할 테니 ‘내가 지도자가 될 만한 인물인지 아닌지를 평가해달라는 요구였다. 그의 책 <용기 있는 사람들>은 그가 미국 사회에 선보이는 자기소개서와 같은 책이었다.
정치인에게 글을 쓰는 건 적지 않은 위험을 감당하는 일이다. 말은 시간이 지나면 금세 흩어지지만 활자로 고정된 글은 시간이 지나도 변치 않기 때문이다.
자신의 신념과 판단력을 그대로 보여주기 때문에 섣불리 설익은 글을 내놨다간 비웃음만 사게 된다. 자신이 글로써 표현했던 신념을 지키지 못할 경우 많은 이들에게 실망을 안길 수 있다.
하지만 케네디는 썼다. 자신의 신념과 판단력에 대한 자신감과 자신의 소신을 앞으로도 계속해서 지켜나갈 수 있다는 확신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큰 리더는 글을 쓴다.
케네디가 인생의 롤 모델로 삼았던 윈스턴 처칠이 평생 수많은 글을 쓰고 노벨문학상까지 수상했던 탁월한 작가였던 것도 우연이 아니다.
1956년 출간된 <용기 있는 사람들>은 베스트셀러가 되며 이듬해인 1957년 퓰리처상을 수상한다. 잘 생긴 젊은 상원으로만 여겨졌던 케네디가 미국을 이끌어갈 만한 재목으로 인정받기 시작한 순간이었다.
만약 그가 병원에 입원해있던 시기 글쓰기에 몰두하지 않았더라면 우리가 알고 있는 대통령 케네디는 존재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용기 있는 행동에는 뛰어난 자질, 마술적 방식, 시간과 장소와 상황의 특별한 배합 같은 것이 필요하지 않다. 용기는 조만간 우리들에게 제공되는 기회다. 정치란 용기를 특별히 시험하기 위한 경기장을 제공할 따름이다. 인생의 어떠한 영역에서도 누구나 용기의 도전에 직면하게 된다."
"지난날의 용기에 관한 이야기는 우리들을 가르치며, 우리들에게 희망을 주머, 우리를 감동시킨다. 그러나 그것은 용기 그 자체를 제공하지는 못한다. 그렇기에 이를 위해서 우리들은 각자 스스로의 마음을 돌아봐야만 한다.”
(이글은 올해 연말에 출간될 '최고의 리더는 왜 글을 쓰는가'(가제)에 들어갈 원고입니다. 홍선표 기자가 보내드리는 지식 뉴스레터 <홍자병법>을 구독하시면 이번 글처럼 세상을 깊이있게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고급지식을 일주일에 한번 이메일로 받아보실 수 있습니다. 이메일 주소만 입력하시면 바로 구독 가능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