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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선표 Nov 04. 2020

오프라 윈프리가 3조 원의 부를 일궈낸 두 가지 비결

부모에게 버림받고 홀로 지내야했던 외로운 소녀의 유일한 친구, 책읽기

지금부터 세상을 설득하기 위해 글을 쓴 한 명의 리더를 만나보자. 부모의 보살핌을 받지 못한 채 인종차별이 극심하던 미국 미시시피주의 시골 마을에서 동물들에게 말을 건네며 어린 시절의 외로움을 견뎌야 했던 한 흑인 소녀의 이야기다.


토크쇼의 여왕 오프라 윈프리의 이름을 처음 들어보는 독자는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부유한 흑인 여성이자 오늘날을 사는 그 누구보다 말로서 큰 성공을 거둔 인물이기 때문이다.


십대의 나이에 라디오 방송국 DJ로 방송 일을 시작한 그녀는 서른 살이던 1984년 시카고 지역 방송사인 WLS-TV의 아침 토크쇼인 ‘에이엠 시카고’(AM Chicago)의 진행을 맡게 된다.


이 자리에 오르기까지가 순탄하기만 했던 건 아니다. 지역 뉴스 프로그램의 앵커로 일하던 시절 감정을 실어 뉴스를 전달했다는 이유로 8개월 만에 해고당하는 등 그전까지 그녀의 커리어는 크고, 작은 실패의 경험이 가득했다.  



에이엠 시카고 진행자 자리도 그리 좋은 기회는 아니었다. 바닥을 기는 시청률 탓에 얼마 뒤면 폐지될 게 뻔했던 프로그램이었으니까. 당시 오프라 윈프리의 처지는 패전 처리를 위해 등판하는 불펜 투수와 다르지 않았다.


그리고 오프라 윈프리가 투입된 지 한 달만에 이 프로그램은 시카고 지역 동시간대 시청률 1위 프로그램이 된다. 2년 뒤인 1986년에는 프로그램 이름을 ‘오프라 윈프리 쇼’로 바꿔 미국 전역의 시청자들을 찾아간다.


이후 25년간 방영되며 그녀를 토크쇼의 여왕으로 등극시킨 ‘오프라 윈프리 쇼’는 이렇게 시작됐다.  


대부분의 한국인들이 그녀를 유명 토크쇼 진행자로만 알고 있지만 사실 그녀는 미디어 대기업의 창업자다. ‘오프라 윈프리 쇼’가 큰 인기를 끌기 시작하자 곧바로 케이블 TV 프로그램을 제작하고 잡지를 출판하는, 이후에는 온라인 미디어까지 운영하는 하포 프로덕션을 설립했다.


자신의 이름을 딴 케이블 방송국 OWN(오프라 윈프리 네트워크‧Oprah Winfrey Network)도 소유하고 있다.



토크쇼의 여왕 그리고 3조원대 부를 일군 비즈니스우먼


인기 방송인으로 남는데 만족하지 않고 직접 사업체를 창업해 경영함으로써 엄청난 부호가 될 수 있었다. 자신의 명성을 돈으로 바꿔낸 비즈니스 감각과 경영 능력이야말로 그녀를 3조 원(2018년 포브스 기준 26억 달러)의 재산을 갖춘 세계적인 부호로 만든 비결이다.   

  

그녀는 토크쇼의 여왕이자 비즈니스의 여왕 그리고 기부의 여왕이기도 하다. 2004년 1억 51000만 달러를 기부하는 등 지금껏 수천억 원을 다른 사람들을 돕기 위해 기부했다.


오직 스스로의 힘으로 거대한 기업을 일구고, 막대한 부를 쌓은 데다 이렇게 번 돈을 아낌없이 기부하는 그녀를 최고의 리더라고 부르는 건 당연하다.

  

부와 명예, 영향력, 세상 사람들의 존경과 애정 등 모든 것을 다 가진 것처럼 보이는 오프라 윈프라이지만 그 역시 중대한 결정을 앞두고 고민하고 망설이는 건 다른 사람들과 다르지 않았다.

  

최고의 리더 역시 자신에게 닥친 여러 문제들 앞에서 고민하고, 중요한 결정을 앞두고 망설이는 건 마찬가지다. 최고의 리더와 대부분의 평범한 사람들을 가르는 건 여러 문제들 앞에서 고민하느냐 고민하지 않느냐가 아니다. 항상 최선의 해법을 찾아내느냐 그렇지 못하느냐도 아니다.

  

최고의 리더와 평범한 사람들을 가르는 유일한 기준은 일단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해법을 찾아냈다고 생각될 때 이를 실천으로 옮기느냐 그러지 못하느냐다. 오직 이 기준만이 최고와 평범함을 가르는 기준이다.

  


2003년 인생의 방향을 바꾸게 될 일생일대의 선택 앞에서 오프라 윈프리 역시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방향을 잃고 헤매었다. 옳고, 그름의 기준으로 판단할 수 없는 문제였으며 어떤 결정을 내리느냐에 따라서 앞으로의 펼쳐질 그녀의 인생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는 선택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때 오프라 윈프리에게 열두 살 소년이 쓴 편지가 한 통 도착한다. 이 편지야말로 오프라 윈프리가 그동안의 기나긴 고민에 종지부를 찍는 결정을 내릴 수 있도록 해주는 힘이 됐다. 한 편의 글이 갖는 설득의 힘을 그녀가 온몸으로 느낄 수 있었던 순간이다.

  

2003년 5월, 그녀는 오프라 쇼의 막을 내릴 것인가 말 것인가를 두고 고민에 휩싸였다. ‘에이엠 시카고’ 시절까지 포함하면 벌써 20년째 진행했던 쇼였다. 20년간 매번 새로운 사람들과 만나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가진 것 없던 한 무명의 방송인은 세계 최고의 유명 인사이자 세계적인 부호가 돼 있었다.


오프라 쇼가 없었다면 결코 이룰 수 없었을 결과였다. 그녀에게 오프라 쇼는 무엇과는 바꿀 수 없는, 자기 자신 그 자체였다.

  

인기가 떨어져서 그만두려 한 건 아니었다. 그녀의 쇼는 여전히 전 세계 수천만 명의 사람들이 시청하는 최고의 인기 프로그램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지금이야말로 그만둬야 할 때라고 생각했다. 높이 솟구쳐 정점에 달한 순간이야말로 무대에서 내려오기에 가장 좋은 순간이라고 생각했다.   


  

“오프라 쇼를 25년 동안이나 하게 되리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쇼가 12년째에 들어섰을 때 나는 이제 그만 막을 내릴까 생각하고 있었다. 파티에 너무 늦게까지 머무는 아가씨가 되고 싶지는 않았다. 박수 칠 때 떠나지 않았다간 때를 놓칠 수도 있다는 생각에 겁이 났다.”

  

“그러다가 나는 영화 <빌러비드>를 찍었다. 새로 찾은 자유를 맛보는 해방된 노예에 관한 영화였다. 영화에서 내가 맡은 역할은 일을 바라보는 나의 관점을 바꾸어놓았다. 영화에서 내가 맡은 역할은 일을 바라보는 나의 관점을 바꾸어놓았다."


"나의 조상들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기회를 내가 얻었는데 어떻게 감히 피곤해하며 오프라 쇼를 그만둘 생각을 하겠는가. 나는 계약을 4년 더 연장했다. 그리고 2년 더 연장했다.”

  

“드디어 20주년이 다가왔고, 나는 그날이 오프라 쇼의 마침표를 찍을 시점이라고 거의 확신했다. 매티 스테파넥에게 이메일이 온 것이 바로 그때였다.”         

  

영화 <Beloved>에 출연한 오프라 윈프리


오프라 쇼를 그만두려할 때 찾아온 한 통의 이메일


매티 스테파넥은 그 이전에 오프라 쇼에 게스트로 나왔던 소년이었다. 근육이 점점 힘을 잃어가 결국 죽음을 맞이하게 되는 희귀한 질병을 앓고 있었다. 고통스러운 병에 시달리고 있었지만 언제나 밝은 웃음을 잃지 않았던 소년이었다.


방송에 나와서 사람들에게 자신이 직접 쓴 시를 읽어준 이 소년은 방송 이후 오프라의 친구가 돼 그녀와 자주 메일을 주고받았다.

  

매티가 오프라 윈프리에게 메일을 보낸 건 그녀가 20주년 기념 방송을 마지막으로 오프라 쇼를 마치려 한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이었다. 소년은 방송을 그만두려 하는 오프라 윈프리를 설득했다.

  

그녀의 쇼에 출연해 수많은 사람들의 진심 어린 응원을 받음으로써 병과 맞서 싸울 수 있는 더 큰 용기를 얻었던 이 소년은 아직은 쇼의 막이 내릴 때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오프라 쇼가 계속해서 이어져 자신과 같은 상황에 처한 사람들에게 계속 용기를 줄 수 있기를 소망했다.


열두 살 어린 소년이었지만 오프라 윈프리의 말과 따뜻한 포옹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다시 일으켜 세워 댜시금 나아갈 수 있는 용기를 선사했는지  알고 있었다.

  

오프라 쇼에 출연한 매티 스테파넥


“선생님은 이미 너무나 많은 측면에서 역사적인 인물이세요. 멋지고 아름다운 일을 많이 하셨어요. 이왕 그렇게 된 김에 역사에 더 큰 발자취를 남겨보는 건 어떠세요? 오프라 쇼에는 대단한 존엄성이 있어요. 그런 쇼로 사반세기 동안 정말 많은 사람에게 감동을 주고 영감을 불러일으키는 거예요! 생각할 시간을 좀 드릴게요.”

 

“그리고 이것도 제 의견에 불과하지만, 저는 때때로 이런저런 것에 대해서 감이 올 때가 있는데 이 일에 관해서도 감을 느꼈어요. 오프라 쇼를 더 오래 하신다면 세상을 위해서도 좋고, 선생님을 위해서도 좋을 거 같아요. 저는 선생님을 사랑해요. 선생님도 저를 사랑하시죠?”

  

오프라 쇼는 매티가 이메일을 보낸 이후로도 8년간 더 이어져 2011년에 막을 내린다. 첫 방송이 나간 지 25년 만이었다. 그 사이 모두 4561편의 방송이 전파를 탔고, 145개국의 시청자들의 그녀의 방송을 보며 울고, 웃었다.


2011년 5월 25일 방송된 마지막 방송에서 오프라 윈프리는 분홍색 원피스 차림으로 무대에 올랐다. 역사적인 이날 방송의 게스트는 누구였을까? 무대 중앙에는 단 하나의 의자만 놓여있었다. 25년 동안 1만 명이 넘는 게스트가 다녀간 오프라 쇼의 마지막 게스트는 오프라 윈프리, 그녀 자신이었다.


마지막 오프라 쇼 무대 위에 선 오프라 윈프리


평소와는 달리 화려한 음악과 조명 없이 무대 위에 오른 오프라 윈프리의 뒤쪽 화면에서는 1986년 9월 8일 방송된 오프라 쇼의 1회 방송 장면이 흘러나왔다. 두툼한 황색 모피 코트를 입고, 구불구불한 파마머리를 한 오프라 윈프리의 모습이 나오자 방청객들 사이에선 폭소가 터져 나왔다. 오프라 윈프리 역시 함께 웃었다.   

 

“저때 나에게는 경험도, 스타일리스트도, 분장사도 없었어요. 내가 가진 거라곤 오직 아줌마 파마컬과 촌스러운 모피 코트였죠.”

  

방청석을 가득 채운 404명의 청중들은 오프라 쇼 최종회 방청을 신청한 140만 명 중에서 선발된 이들이었다. 25년간 이어져온 길고 긴 여정을 마무리하는 그 순간에 함께하기 원했던 사람만 100만 명이 넘었다.


마지막 무대에 404명의 방청객을 초대한 건 ‘404’가 인터넷 상에서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웹페이지를 의미하기 때문이었다.  

  

아쉽게도 오프라 쇼의 25주년 방송이 가능하게 만들어준 숨은 주인공, 매티 스테파넥의 모습은 이날 보이지 않았다. 메일을 보내고 1년 뒤 세상을 떠나지 않았더라면 매티 역시 그 자리에서 오프라 윈프리의 새로운 출발을 응원했을 게 분명하다.


‘역사에 더 큰 발자취를 남겨보는 게 어떠냐’며 오프라 윈프라를 설득한 이 소년이 없었더라면 쇼의 막은 훨씬 더 일찍 내려졌을 것이다.

 

(이 글은 2021년 1월 출간 예정인 <최고의 리더는 글을 쓴다>(가제)의 원고입니다. <홍자병법>을 구독하시면 지금 이 글과 같은 고급지식을 매주 한 편 이메일로 편하게 받아보실 수 있습니다. 이메일 주소만 입력하시면 바로 구독하실 수 있습니다.)

매티 스테파넥


부모의 보살핌을 받지 못했던 외로운 소녀


최고의 리더들이 다른 이들을 설득하기 위해 컴퓨터 앞에 앉아 키보드를 누르고, 종이 위에 한 글자씩을 적어 내려 가는 건 그들 역시 누군가가 쓴 글을 읽고 인생을 방향을 바꿨던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한 사람이 쓴 글이 시대와 장소를 뛰어넘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삶에 강렬한 영향을 미쳤는지를 직접 경험한 그들이기에 사람들에게 자신의 생각을 전하기 위해 글을 쓰는 걸 망설이지 않는다.

  

오프라 윈프리 역시 마찬가지다. 그녀는 부부 사이가 아니었던 두 젊은 남녀의 단 한 번의 동침으로 태어난 누구도 원치 않았던 아이였다. 그녀의 어머니는 그녀가 세상에 나오는 그 순간까지도 자신의 임신 사실을 숨겨왔다.


그 누구의 축복도 받지 못한 채 태어는 그녀는 어린 시절을 치매에 시딜리던 외할아버지와 남편을 돌보는데 지쳐있던 외할머니와 함께 미시시피주의 외딴 시골 마을에서 지내야만 했다. 외로운 소녀에게 책은 유일한 친구였다.

  

어린 시절의 오프라 윈프리


“인근에 어린아이라고는 나뿐이어서 나는 혼자 노는 법을 배워야 했다. 그래서 홀로 지내는 여러 가지 방법을 궁리해냈다. 나는 책을 읽고 집에서 만든 인형을 가지고 놀거나 집안일을 했다. 가끔은 농장에서 기르는 가축들에게 이름을 붙이고 말을 걸기도 했다.”

  

궁벽한 시골 마을에서 홀로 지내야 했던 소녀에게 책은 더 넓은 세상과 만날 수 있는 유일한 통로였다. <왕자와 거지>를 읽으면서는 답답한 궁궐을 뛰쳐나와 사람들이 살고 있는 진짜 세상을 만나려 했던 왕자의 모습에 자신을 이입하고,


<15 소년 표류기>의 책장을 넘기면서는 친구들과 함께 외딴 무인도에서 모험을 펼치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하지 않았을까?

  

<돌리틀 선생 항해기>나 <80일간의 세계일주>와 같은 동화를 읽으면서는 전 세계 방방곡곡을 누비며 이국적인 풍경의 낯선 길거리를 걷는 자신의 모습을 머릿속에 떠올리고,


<엄마 찾아 3만 리>를 읽으면서는 어딘가 저 먼 곳에서 자신을 간절히 기다리고 있을 진짜 부모를 찾아 떠나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했을지도 모른다.    

 

오바마 대통령으로부터 훈장을 받은 오프라 윈프리


그에게 방송계 입문의 글을 열어준 독서 습관


책은 그녀에게 단순히 현실의 외로움을 잊기 위한 도피처가 아니었다. 읽을 수 있는 것이라면 뭐든지 손에 잡히든대로 구해서 소리 내어 읽던 습관, 특히 누구 앞에서든 시를 낭송하던 습관이야말로 그녀에게 방송계로 진출하는 문을 열어줬다.

  

그녀는 고등학생 시절이던 열여섯 살에 미국 내슈빌에 있는 WVOL 라디오 방송국의 디제이로 고용된다. 학교에서 견학을 갔던 그 방송국에서 한 라디오 디제이가 그녀에게 녹음된 목소리가 어떻게 들리는지 한 번 테이프에 녹음해 들어보라고 권했고, 오프라 윈프리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마이크를 앞에 두고 이야기한다.

  

잠시 뒤 그녀의 목소리를 들어본 라디오 디제이는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 “이 애 목소리는 꼭 들어봐야 해요!”라고 자신의 상사에게 외친다. 여왕의 전설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부와 명성을 모두 손에 넣은 오늘날에도 그녀는 ‘내가 하루 종일 열심히 일하는 것은 책 읽을 시간을 마련하기 위해서’라고 말한다.  

  

“한때 책은 내게 일종의 탈출구 역할을 했다. 지금의 내게 좋은 책을 읽는다는 것은 성스러운 즐거움이며, 내가 원하는 곳이라면 그 어디라도 갈 기회와 다름없다. 독서는 내가 제일 좋아하는 시간 사용법이다."


"독서가 우리의 존재를 열어준다는 것을 나는 확실히 안다. 독서는 우리가 자신을 드러내며, 우리의 정신이 흡수할 수 있는 모든 것에 접근할 방법을 선사한다.”


  

“무엇보다 내가 독서를 가장 사랑하는 이유는, 책 읽기를 통해 더 높은 곳으로 향할 수 있는 능력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독서는 우리가 계속 위로 올라갈 수 있는 디딤돌이 되어준다.”

  

세상을 향해 글을 쓰기 훨씬 이전부터 오프라 윈프리는 스스로의 내면을 향한 글을 써왔다. 최고의 자리에 오르기 전부터 매일 꾸준히 일기를 썼다. 그날 하루 동안 있었던 일들을 정리하고,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기록으로 남겼다.


하루에 다섯 개씩 자신을 기쁘게 만들었던 순간들에 대해서도 적어나갔다.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해안을 따라 달린 일, 벤치에 앉아 먹었던 차갑고 달콤한 멜론의 맛, 친한 친구와의 오랜 시간 동안의 수다처럼 사소하지만 삶에 행복을 더해주는 순간들에 대한 감사일기였다.

  

이처럼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 스스로를 위해서 혼자만의 글을 쓰던 그녀가 세상을 향한 글을 쓰기 시작한 건 언제부터였을까? 그녀가 글을 통해 ‘넘어질 순 있지만 계속 쓰러져 있어서는 안 된다’고 세상 사람들에게 말하기로 결심한 건 무엇 때문이었을까?


  

앞서 말했듯 오프라 윈프리의 어린 시절은 외롭고, 고달팠다. 하지만 그런 유년기마저도 그녀가 10대 시절에 겪어야만 했던 끔찍했던 일들에 비한다면 행복했던 시간이었다. 열 살부터 열네 살 때까지 그녀는 친척 남성들에게 반복적으로 성적인 학대를 당했다.


열네 살 때이던 1968년에는 성폭행으로 인해 임신한 아이를 출산해야만 했다. 아기는 얼마 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이 같은 경험은 그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상처가 돼 오프라 윈프리의 가슴 한구석에 자리 잡았다. 가까스로 엄청난 용기를 내 어린 시절에 학대를 당했던 일을 공개했을 때도 아이를 출산했었다는 사실만큼은 끝끝내 말하지 않았다.

  

그리고 어느 날, 한 타블로이드 신문에 그녀의 상처를 다룬 기사가 실린다. 그녀의 한 친척이 타블로이드 신문에 비밀을 폭로했던 것이었다. ‘이 사실을 알게 되면 누구도 나를 좋아하지 않을 거야. 세상 사람 모두가 나를 손가락질하며 욕할 거야’라고 되뇌며 수십 년간 홀로 떨어야만 그녀의 공포가 현실이 됐다.



끔찍한 공포가 현실이 되어 찾아온 날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깜깜한 침실 속 침대에 파묻혀 우는 일밖에 없었다. 그리고 다음날 여느 때처럼 오프라 쇼를 위해 출근을 해야만 하는 아침이 찾아왔다.

  

“월요일 아침이 왔고, 나는 누군가에게 흠씩 얻어맞은 것 같은 기분으로 가까스로 침대에서 기어 나와 출근길에 나섰다. 무서웠다. 거리에서 마주치는 모든 사람이 내게 손가락질을 하며 ”열네 살에 애를 배다니, 세상에! 너는 이제 끝장이야! “라고 당장에라도 고함을 칠 것 같았다.”

  

“하지만 아무도 뭐라 하지 않았다. 내가 모르는 사람들도, 내가 아는 사람들도, 그 어느 누구도, 아무도. 너무나 놀라웠다. 전과 다르게 나를 대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수십 년 동안 머릿속으로 상상해왔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다행히도 오프라 윈프리는 주변 사람들의 진심 어린 보살핌과 이름도 모르는 수많은 사람들의 따뜻한 응원 덕분에 절망의 시간을 이겨내고 다시금 일상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리고 이 경험을 통해 그동안 몰랐던 사실들을 깨닫는다. 아무리 상황이 끔찍하게 느껴지더라도 현실은 머릿속에 그렸던 것만큼 나쁘지는 않다는 것을,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라 두려움이라는 감정 자체가 삶을 옭아맨다는 것을, 타인이 나에게 입힌 상처가 아니라 오직 나의 힘으로 이뤄낸 것들이 나의 인생을 결정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오프라 윈프리, 세상을 설득하기 위한 글을 쓰기 시작하다


그리고 이렇게 얻은 깨달음이야말로 그녀가 세상 사람들을 설득하기 위한 글쓰기에 나서는 계기가 됐다. 평생 자신을 옭아매던 두려움과 공포, 슬픔으로부터 해방됐던 경험이 그녀가 글을 쓰도록 만들었다.    

  

볼티모어 지역 방송사의 이름 없는 기자였던 시절 가난 때문에 혹독한 겨울을 보내던 젊은 어머니와 그녀의 아이들을 취재한 뒤 그들을 백화점으로 데리고 가 겨울 코트를 한 벌씩 사줬던 그녀에게 남을 돕는다는 건 무엇보다도 기쁜 일이었다.


그리고 그녀는 자신의 경험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절망과 좌절, 공포와 두려움으로부터 구해낼 수 있을지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그녀는 글을 썼다. 결코 두려움의 노예로 살아선 안 된다고, 남이 나를 일으켜 세워줄 거라 생각하고 계속 쓰러져 있어선 안 된다고, 다시 일어나 원하는 것을 위해 달리라고 세상 사람들에게 말하기 위해 글을 썼다.

  

최고의 리더들은 사람들을 설득하기 위해 최고의 근거를 든다. 그리고 그들에게 최고의 근거는 바로 자신의 걸어온 삶의 모습이다. 오프라 윈프라 역시 마찬가지다. 그녀가 걸어온 인생을 보며 수많은 사람들이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용기를 얻을 수 있었다.

  


1997년 그녀의 첫 책인 <오프라 윈프리의 특별한 지혜>가 출간된 이후 그녀는 14년 동안 매달 칼럼을 통해 독자들과 만났다. ‘내가 확실히 아는 것들’이란 제목처럼 그녀가 살면서 깨달은 지혜와 교훈들을 그녀만의 따뜻하고 잔잔한 문체로 사람들에게 전하는 칼럼들이었다.


누군가에게 강요하지 않고 자신의 생각을 받아들이게 하기 위해서는 이 정도의 꾸준함과 시간이 필요하다는 걸 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 그녀가 이 기간 동안 글을 쓰며 사람들에게 꼭 전달하고 싶었던 ‘멋진 진실’은 다음 문장들에 담겨있다.

  


“용기란 우리가 목표에 이르렀는가로 가늠되지 않는다. 숱하게 실패를 했더라도 그에 아랑곳없이 다시 두 발을 딛고 일어서기로 했는지가 용기를 가늠하는 진정한 기준이다.”

  

“우리가 다시 일어나 자신이 품은 가장 멋진 꿈을 추구할 용기를 낸다면 삶의 가장 진한 보상을 받고 가장 흥미진진한 모험을 즐길 수 있게 된다는 걸 나는 확실히 알고 있다. 쉽지만은 않겠지만 말이다.”

  

“당신이 지금 어디에 있더라도 새로운 시작은 아주 가까이에 있다. 단 하나의 선택, 즉 다시 일어나겠다는 선택만 한다면 당신은 바로 새롭게 시작할 수 있다. 새로운 시작은 그렇게 당신 곁에 가까이 있다. 정말 멋진 진실이 아닌가?”

  

최고의 리더는 사람들을 설득하고 조직을 이끌기 위해서 글을 쓴다. 자신이 무엇을 하는지 사람들에게 이해시키고 그들의 지지를 얻기 위해 글을 쓴다. 그리고 더 나아가 세상을 설득하기 위해 글을 쓴다. 리더의 글이야말로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어 사람들의 마음을 얻는 최고의 수단이다.      


홍선표 작가

rickeygo@naver.com

<내게 유리한 판을 만들라>, <홍선표 기자의 써먹는 경제상식>

<리치 파머, 한국의 젊은 부자농부들>(공저) 저자


(이 글은 2021년 1월 출간 예정인 <최고의 리더는 글을 쓴다>(가제)의 원고입니다. <홍자병법>을 구독하시면 지금 이 글과 같은 고급지식을 매주 한 편 이메일로 편하게 받아보실 수 있습니다. 이메일 주소만 입력하시면 바로 구독하실 수 있습니다.)



<최고의 리더는 글을 쓴다> 시리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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