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자병법] 동네 철공소가 벤츠, 테슬라에 납품하는 회사로 성장한 비결
전쟁이 소강 국면을 맞으며 휴전의 기대감이 높아졌던 1953년 1월 30일 밤, 임시 수도였던 부산은 거대한 붉은 화염과 숨 막히는 매캐한 연기에 도시 전체가 휩싸였습니다.
신창동 일대에 자리 잡은 국제시장에 큰 불이 나면서 불과 몇 시간 만에 수천 곳의 상가들과 그 안에 쌓여있던 제품들이 잿더미로 변해버렸죠.
삶의 터전이 순식간에 불길에 녹아드는 모습을 보는 상인들의 눈에선 굵은 눈물 방울이 흘러내렸는데요. 신라상회란 이름의 자동차 부품상을 운영하던 서른 살의 강이준도 자리에 주저앉아 불타는 가게를 멍하니 지켜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신라상회는 몇 차례에 걸쳐 일본에 밀항해 생활했던 그가 일본에서 취득한 당시로서는 희소한 자격증인 운전면허증과 해방 이후 소방서에서 차량 정비 일을 했던 경험을 바탕으로 1년 전에 창업한 회사였는데요.
따로 종업원도 두지 못하고 사장 혼자 일하는 자그마한 회사였지만 전국 곳곳을 누비며 부품들을 갖춰놓은 노력 덕분에 이제 막 거래처들을 늘려가며 안정적인 기반을 마련하려던 참이었습니다.
다음날 새벽 집에 돌아온 강이준이 부인과 아들을 움켜 안고 “우린 이제 망했다. 쫄딱 망했다”라고 울부짖은 것도 무리는 아니었죠.
그리고 이로부터 68년이 지난 2021년에도 강이준이 창업한 회사는 여전히 운영되고 있는데요. 단순히 국제시장 안의 오래된 점포로 명맥을 잇는 수준이 아니라 매년 1조 원대의 매출을 올리는 글로벌 자동차 부품 생산업체로 성장했습니다.
센트랄과 센트랄모텍이 주축이 된 센트랄그룹이 바로 신라상회에서 뻗어 나온 회사들인데요. 볼 조인트, 컨트롤 암, 스티어링 기어, 볼 스크류, 엑슬 등 각종 자동차 부품을 생산해
한국 자동차업체는 물론 벤츠, BMW, 테슬라, GM, 폭스바겐, 닛산, 볼보 등 전 세계 주요 자동차 메이커들에 납품하는 회사입니다.
1952년 따로 창고도 갖추지 못한 채 비좁은 판자 가게 틈바구니에서 시작한 자동차 부품 가게가 대장간 수준의 동네 철공소와 작은 공업사를 거쳐 이제는 전 세계 자동차 회사들에 직접 생산한 부품을 공급하는 글로벌 자동차 부품업체로 성장한 건데요.
이번 글에서는 강이준 센트랄 창업자가 사업 초기에 내렸던 판단들에 초점을 맞춰 살펴보면서 동네 철공소를 글로벌 부품회사로 키워낸 3가지 비결에 대해서 하나씩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센트랄의 성장 과정에 대해 다루고 있는 서적인 <동네 철공소, 벤츠에 납품하다>에 나와있는 내용을 바탕으로 설명드리겠습니다.
방금 말씀드렸던 것처럼 강이준 회장은 창업 1년 만에 가게와 그 안에 쌓아뒀던 모든 부품이 불타 없어지는 시련을 겪게 되는데요. 하지만 이후 불과 5년 만에 그는 부산은 물론 국내 자동차 부품업계에서 이름을 날리는 큰 도매 유통상으로 자리 잡게 됩니다.
부산을 중심으로 한 경남권은 물론 대구‧경북과 강원, 충청, 호남권의 지역 부품상들도 그와 거래를 트기 위해 신라상회를 찾아왔을 정도였죠.
5년 만에 거상(巨商)으로 이름을 날린 비결
1인 부품 브로커로 시작한 그가 화마의 상처에서 일어나 경쟁자들보다 훨씬 더 멀리 치고 나갈 수 있었던 비결은 바로 “잘못된 관행은 관행이 아니라 악습이다. 줄 돈은 빨리 정확하게 지불하라. 신용은 말이 아닌 행동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다.”입니다.
거래처에 지불해야 하는 돈을 제때, 정확하게 지급하는 건 어찌 보면 아주 당연한 일인데요. 하지만 그가 사업을 시작했던 1950년대에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 이후로 수십 년 동안에도 그렇지 않았고요.
오늘날에도 이 같은 당연한 일을 제대로 하지 않는 사업체들이 적지 않은 게 사실이죠.
당시 그가 활동하던 부산 서면 일대 자동차 부품상들 사이에선 ‘할인‧지연 결제’, 일종의 ‘대금 꺾기’ 관행이 매우 일반적인 일이었습니다.
거래처, 그중에서도 주로 힘이 약한 공급업체와 하청업체들을 대상으로 지불해야 하는 대금의 일부만을 지급하고 남은 대금의 지급은 뒤로 미루는 관행이었는데요.
(이 글은 홍선표 작가가 보내드리는 뉴스레터 <홍자병법>의 내용을 그대로 옮긴 글입니다. <홍자병법>을 구독하시면 지금 이 글과 같은 고급지식을 편하게 받아보실 수 있습니다. 이메일 주소만 입력하시면 바로 구독하실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거래처에서 100만 원어치 부품을 공급받고는 돈은 80만 원만 주는 방식이죠. 나머지 20만 원의 지급은 뒤로 미루고요.
그리고 다음번에 대금을 결제할 때도 앞서 결제하지 않은 금액과 이번에 공급받은 상품 대금을 합해 전체 금액을 모두 지불하는 게 아니라 또다시 줘야 하는 돈의 일부만을 지급했죠.
이런 식으로 계속해서 전체 거래대금 중 일부에 대한 결제를 뒤로 미루는 할인‧지연 결제 관행이 만연했고, 또 당연한 일로 여겨져 왔습니다.
강이준 회장은 당시 서면 일대 자동차 부품업계는 물론 한국 사회 전체에 만연하던 이 같은 관행을 따르길 거부합니다. ‘주기로 한 돈은 정해진 지급일에 정확하게 지급한다’는 게 그의 신조였죠.
대금 지급을 미룸으로써 얻는 운전자금 확보와 같은 경영상의 이익보다는 정해진 날짜에 정확하게 대금을 결제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신용이 훨씬 더 값지다고 생각했고 실제로도 그랬기 때문인데요.
거래 대금 전부를 제때 정확하게 지급하는 강이준의 투명한 거래 방식은 그가 빠른 시간 안에 부산 서면 자동차 부품 네트워크의 중심에 설 수 있도록 만들어줬습니다.
거래 대금의 일부를 계속해서 지급하지 않아 거래를 하면 할수록 미수금이 쌓이게 만드는 회사와 지급 금액을 제 때에 칼 같이 지급하는 회사. 거래처들이 어떤 회사를 더 선호할지는 너무나 뻔한데요.
덕분에 강이준은 다른 부품상들보다 더 저렴한 가격에 더 우수한 품질의 부품을 확보할 수 있었고, 이를 바탕으로 경쟁업체들보다 더 큰 매출과 더 높은 이익률을 올리게 됩니다.
부산을 넘어 전국 각지의 부품상들을 자신의 든든한 우군으로 만들 수 있었던 것 역시 커다란 무형의 자산이 됐고요.
지금껏 말씀드린 것처럼 자동차 부품 도매상으로서 탄탄히 입지를 다진 강이준은 1960년 9월 신라상회에서 약 200m 떨어진 자리에 작은 부품 공장인 신라철공소를 차리는데요.
센트랄그룹은 이때를 회사의 역사가 시작된 시점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유통상에 머물던 강이준 회장이 처음으로 제조업에 발은 담근 순간이기 때문이죠.
(......)
(뉴스레터 분량상 IT/스타트업 전문매체 <아웃스탠딩>에 기고했던 모든 내용을 실지 못했습니다. 강이준 회장이 고객들이 필요로하는 모든 종류의 부품을 제공하기 위해 기존의 유통업에서 벗어나 새롭게 제조업에 뛰어들어 센트랄그룹을 키워낸 과정.
그리고 현대차 포니에 부품을 납품하며 승승장구하던 시기에도 결코 안주하지 않고 사소한 프로젝트에도 전력을 다함으로써 훗날 찾아올 거대한 위기를 헤쳐나갈 수 있었던 비결에 대한 내용을 더 읽고 싶은 분들은 아래 <아웃스탠딩> 링크를 클릭해주세요.)
<아웃스탠딩> 본문 읽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