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인수 오비맥주 부회장이 말하는 영업에서 가장 조심해야 하는 순간
1980년의 여름의 어느 날, 서울의 한 주류 도매상 사무실로 양복을 갖춰 입은 25살 젊은 영업사원이 들어섭니다. 찌는듯한 날씨 탓에 영업사원의 몸은 땀으로 흠뻑 젖어있었는데요.
몇 달 전 주류회사 진로에 입사한 신입 영업사원이 처음으로 자신이 담당하게 된 도매상의 사장님께 인사를 드리는 자리였습니다.
명함을 주고받고 십여분쯤 대화가 오간 뒤 도매상 사장님은 영업사원에게 어느 대학을 나왔느냐고 묻습니다.
이 신입사원과 같이 공채로 뽑힌 회사 동기는 모두 80명이었는데요. 그중에서 고졸 사원은 12명에 불과했습니다. 나머지 68명은 모두 대학교를 졸업하고 회사에 입사했죠.
40년도 더 전이긴 했지만 그 당시에도 진로 같은 큰 회사에 사무‧영업직으로 입사한 젊은 직원들 중에는 이처럼 대졸자 비율이 훨씬 더 높았는데요.
도매사 사장님이 그 이전까지 만나왔던 진로의 젊은 영업사원들도 대부분 대학 졸업자들이었기에 사장님 입장에서는 부담없이 편하게 물어본 질문이었습니다.
이에 신입 영업사원은 조금의 머뭇거림도 없이 ‘상고(상업고등학교) 출신’이라고 대답합니다. 당황한 건 오히려 도매상 사장님이었습니다.
괜한 질문을 했다고 생각한 사장님은 분위기를 바꾸기 위해 이번엔 어느 상고 출신이냐고 물었습니다. 덕수상고, 선린상고 같은 명문 상고들의 이름을 대면서 ‘뜻한 바 있어서 대학을 안 가는 대신 일찍 취업을 한 게 아니냐’는 식으로 답변을 유도했죠.
그러자 영업사원은 그런 명문 상고가 아니라 이름 없는 상고를 나왔고, 그저 공부를 못해서 상고를 가게 됐다고 답합니다. 중학교 때 태권도에 푹 빠져서 지내느라 공부를 좀 멀리했다는 말과 함께요.
실제로 이 신입사원은 태권도 6단으로 군대에 입대하기 전에는 태권도 사범으로 일했을 정도의 고수였습니다.
영업사원의 대답에 도매상 사장님의 얼굴엔 너털웃음이 피어났는데요. 보통 이런 상황에선 대답을 얼버무리거나 둘러대기 마련일 텐데 자기 자신을 꾸미려 하지 않고 솔직하게 말하는 ‘돌직구 스타일’의 신입사원이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로부터 약 40년 뒤 한 대기업의 대표가 된 이 신입 영업사원은 이렇게 말하며 당시를 떠올립니다.
“영업을 하다 보면 어떻게든 둘러대 모면하고픈 순간과 많이 맞닥뜨립니다. 스스로 약점이라고 생각하는 부분, 혹은 회사의 치부와 관련되는 얘기가 나올 때 더욱 그렇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악의 없는 거짓말이라도 한 번의 거짓말은 더 큰 거짓말을 낳습니다. 이 악순환에 빠지면 시간이 흐를수록 손쓰기가 어려워집니다.”
“그래서 영업을 잘하는 사람들일수록 정면승부를 선택합니다. 진실을 회피하거나 스스로를 포장하고 싶은 욕구를 참아내고, 아프더라도 정직하게 털어놓는 방법을 택합니다.
“멀리 보면 그쪽이 훨씬 덜 상처 받는 길이라는 것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 한 대를 피하려다가 나중에 돌멩이 찜질을 당할 수도 있습니다.”
(<아웃스탠딩>에 기고한 원문글)
CEO가 돼서도 전국 각지의 현장을 누볐던 영업맨
장인수 전 오비맥주 대표는 국내 주류업계에서 전설적인 영업맨으로 불립니다. 1980년 고졸 영업사원 공채를 통해 진로에 입사한 뒤 30년간 주류 영업에 몸담았던 그는 2010년 하이트진로를 떠나 오비맥주의 영업 담당 부사장으로 자리를 옮깁니다.
그리고 그의 이직 1년여 만에 국내 맥주시장에서 그 이전 15년 동안 만년 2위에 머물렀던 오비맥주는 마침내 시장점유율 1위 자리를 되찾는 데 성공합니다.
이 같은 공로를 인정받아 장 대표는 2012년부터 2014년까지 대표이사 사장으로서 오비맥주로 이끌게 됩니다.
CEO로 일하는 동안에도 영업본부장 자리를 계속 겸직하며 전국 각지의 현장을 누비면서 직접 회사의 영업을 총괄했고요. 이후 2015년까지 부회장으로 일하며 회사를 이끌어왔습니다.
이번 글에서는 영업의 달인 장인수 대표가 말하는 3가지 영업의 비밀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장인수 대표의 책 <진심을 팝니다>를 바탕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장인수 대표가 꼽는 영업을 하면서 가장 힘든 순간이 언제인지를 말씀드리기 전에 먼저 그가 1999년에 직접 겪었던 경험담부터 먼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2000년을 얼마 앞두지 않았던 1999년 말, 일선 지점장으로 일하던 장인수 대표와 부하 직원들에게는 지역 내 주류 도매상들의 연락이 빗발쳤습니다. ‘제발 우리 회사한테 소주를 팔아달라’는 읍소가 쏟아졌는데요.
이런 부탁에 시달린 건 진로뿐 아니라 한국의 모든 소주 영업 사원들이 마찬가지였습니다. 연말이 다가올수록 도매상들의 소주 확보 전쟁은 치열해져만 갔죠.
1999년 말은 개정된 주세법이 시행되기 직전이었습니다. 법 개정으로 인해 새해부터는 소주에 붙는 세금이 크게 오르게 됐습니다. 덕분에 소주 한 박스당 공장 출고 가격도 몇 천 원씩 인상될 예정이었고요.
그렇기 때문에 개정된 주세법이 시행되기 전에, 그러니까 1999년 말까지 물량을 많이 확보하면 확보할수록 주류 도매상들은 큰 이익을 볼 수 있었습니다.
세금이 오르기 전 가격으로 사놓은 물건을 세금이 오른 이후의 가격으로 판매할 수 있었으니까요.
얼핏 보면 소주 영업사원에게 이보다 더 좋은 순간은 없을 것처럼만 보입니다. 거래처에서 먼저 찾아와 제발 우리에게 물건 좀 팔아달라고 절박하게 읍소하는 상황이었으니까요.
실제로 많은 주류업체 영업사원들이 1999년 하반기 내내 이 같은 호황의 기쁨에 취해서 지냈는데요.
아무래도 영업을 하다 보면 평소 거래처에 이런저런 부탁을 할 일이 많이 생길 수밖에 없는데요. 거래처에 따라서 이런 부탁들을 흔쾌히 잘 들어주기도 하고, 냉랭하게 거절하기도 하죠. 때로는 감정이 상하는 방식으로 거절하는 경우도 적지 않고요.
이런 일들이 계속해서 쌓이게 되면 영업사원마다, 지점마다, 회사마다 사이가 좋은 친한 도매상도 생기고 반대로 서로 감정이 좋지 않은 거래처들도 나오게 됩니다. 비즈니스 역시 사람이 하는 일이기에 사실 이런 모습은 어느 정도 어쩔 수 없는 일이기도 하죠.
그리고 1999년 말 진로뿐 아니라 다른 소주 브랜드들의 많은 영업사원들이 갑작스레 찾아온 소주 품귀난을 화끈한 보은과 달콤한 복수의 기회로 사용합니다.
평소 자신과 회사에게 우호적이었던 도매사에는 소주 물량을 몰아주고, 비우호적이었던 도매사로 가는 물량은 팍 줄여버렸던 것이죠.
사이가 좋지 못했던 거래처에 돌아가는 물량을 줄이는 건 옹졸하다고 해도, 평소 어려운 부탁을 여러 차례 들어줬던 고마운 거래처에 물량을 대거 배정해 신세를 갚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라는 생각이 드는데요.
장인수 지점장 밑에 있던 부하 직원들도 “평소 물심양면으로 우리를 도와줬던 도매사 위주로 물량을 배정해야 한다”라고 입을 모았습니다.
그가 우군을 섭섭하게 만들었던 이유
하지만 장 대표는 부하 직원들의 이 같은 의견을 받아들이지 않았는데요. 대신 평소 친하게 지냈던 거래처든, 비우호적인 관계에 있던 거래처든 상관없이 거래 규모에 따라서 소주 물량을 공평하게 배분합니다. 본인이 직접 현장에 나가 물량 배분 작업을 감독했죠.
“이런 때일수록 오히려 칼같이 공정한 배분을 해야 미래를 기약할 수 있다”는 게 장 대표의 생각이었는데요.
장인수 대표가 이렇게 그동안의 친분 관계와는 상관없이 공정하게 물량을 배분하자 일부 업체에서는 서운하다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평소 진로와 장인수가 부탁하는 일이라면 발 벗고 도왔는데 이렇게 중요할 때 우리를 따로 챙겨주지 않으니 섭섭하다.”는 말들이었죠. 당연히 할 수 있는 이야기였습니다.
그리고 당시 장인수 대표는 이렇게 서운함을 드러내는 도매상들을 한 군데씩 직접 돌아다니며 양해를 구했습니다. 다음과 같이 말하면서 말이죠.
“사장님, 주세 인상 대란이 지나고 나면 다시 소주 재고가 쌓이기 시작할 겁니다. 저희가 그동안 소원했던 도매사들과 지금 관계를 터서 유통채널을 다양하게 해놓지 않으면 물량이 다시 쌓일 때 아마도 그 물량을 다시 사장님께 떠안아 달라고 부탁해야 할 겁니다.”
“번번이 그래야 한다면 어려움이 계속 반복되지 않겠습니까?”
장인수 대표가 말하는 영업을 하면서 가장 어려웠던 순간은 바로 이렇게 수요가 급증해 공급이 따라가지 못할 때입니다. 너도 나도 찾아와 물건을 달라고 할 때, 이렇게 잘 나갈 때야말로 가장 어렵고, 위험하며, 경계해야 하는 순간이라는 말입니다.
“영업은 하루 이틀만 하고 접을 게 아닙니다. 지금 잘 나간다고 해서 일 년 후에도 여전히 성황을 이루리라는 보장은 없습니다.”
공급이 달릴 때 우월감에 휩싸여 평소에 좋은 관계를 맺어왔던 거래처에만 우선적으로 제품을 배정한다면 그 순간이야 기분이 좋겠지만 제품을 공급받지 못한 거래처와의 감정의 골은 더욱 깊어질 수밖에 없죠.
이렇게 되면 나중에 업황이 불황이 돼 공급이 넘칠 때 더욱 힘든 상황에 처할 수밖에 없고요.
우호적인 거래처들이 소화해줄 수 있는 물량에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는데, 지난번 일로 관계가 더욱 불편해진 비우호적인 거래처들이 남아도는 물량을 받아줄 거라 기대할 수는 없으니까요.
여기에서 배울 수 있는 장인수 대표의 첫 번째 영업 비결은 “영업은 하루 이틀만 하고 끝나는 일이 아니다. 제품을 찾는 고객들이 몰려들 때야말로 겸손함과 공정함을 잃어서는 안 된다. 평소의 친분 관계만을 따진다면 나중에 더 큰 곤란을 겪게 된다.”입니다.
(분량 때문에 뉴스레터에는 IT/스타트업 전문매체 <아웃스탠딩>에 기고했던 원문 글의 4분의 1 정도만 축약해 실었습니다.
그가 업계의 고질적인 병폐이던 '밀어내기'를 근절해 카스 맥주의 경쟁력을 높여나간 과정, 고객들과의 긴밀한 소통을 위해 직원들에게 금지시켰던 또 다른 한 가지가 무엇인지 궁금하신 분들은 <아웃스탠딩>에 실린 원문글을 읽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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