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2년간 뉴욕타임스의 보수적 양심을 자처했던 데이비드 브룩스가 지면을 떠났다. 표면적으로는 새로운 매체로의 이직이지만, 그가 대표하던 철학의 위기를 고려할 때 이 퇴진은 개인적 사건을 넘어선다. 우리가 목격하는 것은 단순히 한 칼럼니스트의 은퇴가 아니라, 서구 지성사를 지탱해온 ‘공화주의(Republicanism)’라는 거대 담론의 위기이며, 그 변칙적 형태였던 ‘귀족적 도덕주의’의 필연적 몰락이다.
본래 공화주의란 단순히 왕이 없는 정치를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시민의 ‘공적 덕성(Civic Virtue)’을 통해 공동체의 자유를 지키려는 정치 철학이다. 공화주의자들에게 국가란 개인의 이익을 보호하는 서비스 센터가 아니라, 시민들이 함께 가꾸어야 할 ‘공공의 것(Res publica)’이다. 브룩스가 알렉산더 해밀턴의 국가 건설 정신과 시오도어 루스벨트의 개혁적 보수를 계승한다고 자처한 이유가 여기 있다. 그는 시장의 방임이나 개인의 무한한 자유보다는, 공동체 안에서 개인이 어떻게 도덕적 성장을 이루고 국가라는 큰 틀에 헌신할 것인가를 고민해온 전형적인 공화주의자였다.
정치 철학의 역사에서 이러한 공화주의적 해법의 핵심은 법적 강제나 시장의 효율보다, 내면의 덕성을 통해 공동체의 결속을 다지는 데 있다. 공화주의자들은 권력의 사유화와 부패를 방지하기 위해 엘리트 계층의 엄격한 자기 절제와 희생을 요구하며, 자유란 사적인 도피가 아니라 공적인 삶에 대한 적극적인 참여와 헌신을 통해 비로소 완성된다고 믿는다. 브룩스가 강조한 품격과 헌신의 서사는 바로 이러한 고전적 공화주의의 현대적 변주였다.
그러나 브룩스의 공화주의는 시작부터 위태로운 토대 위에 있었다. 그는 『천국의 보보스』에서 스스로를 ‘보보스(Bobos) 공화당원’이라 불렀는데, 여기서 ‘보보’는 부르주아적 성공과 보헤미안적 감수성을 결합한 능력주의 엘리트를 의미한다. 문제는 보보적 자유주의의 핵심이 개인의 ‘선택’과 ‘취향’에 있는 반면, 공화주의의 핵심은 ‘절제’와 ‘의무’에 있다는 점이다. 브룩스는 보보라는 능력주의적 주체 위에 공화적 덕성이라는 무거운 외투를 입히려 했으나, 이는 구조적으로 불안정한 동거였다.
브룩스의 개인사는 이 모델의 취약성을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2013년, 28년을 함께한 아내와 결별하고 젊은 어시스턴트와 재혼한 그의 선택은 단순히 사생활의 영역에 머물지 않는다. 헌신과 관계의 충실성을 설파해온 공적 인물에게 삶의 일관성은 공화적 덕성을 증명하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이다. 그는 『두 번째 산』에서 영적 전환을 고백하며 도덕적 권위의 회복을 시도했지만, 이는 결국 엘리트의 구원 서사에 그치며 공화주의가 요구하는 '자기 절제'의 설득력을 잃게 만들었다.
여기서 아놀드 하우저(Arnold Hauser)가 사용한 ‘귀족적 도덕주의(Aristocratic Moralism)’라는 개념이 등장한다. 하우저에게 이 용어는 상찬이 아니라 조롱이었다. 그는 러스킨이나 모리스 같은 19세기 도덕주의자들이 대중의 비루한 현실(현장성)과 소통하지 못한 채, 고고한 귀족적 취향과 엄숙주의로 사회를 개조하려 했던 오만을 비판했다.
귀족적 도덕주의는 공화주의가 대중성을 잃고 엘리트의 심미적 태도로 변질되었을 때 나타나는 징후다. 혈통이 아닌 덕성으로 통치한다는 그들의 믿음은, 대중의 눈에는 그저 '현장 없는 계몽'이자 '엘리트의 오만'으로 비칠 뿐이다. 브룩스가 지향했던 도덕적 훈계 역시 하우저가 경계했던 귀족적 도덕주의의 늪에 빠진 것으로 비판 받을 수 있다. 현장성과 네트워크성을 결여한 엘리트의 덕성은 대중에게 가닿지 못하고 그들만의 리그에서 울리는 공허한 메아리가 된다.
브룩스는 고별사에서 현대 사회의 가장 큰 적을 '아무것도 믿지 않는 니힐리즘(허무주의)'으로 꼽았다. 그러나 필자는 오늘날 귀족적 도덕주의를 고사시킨 진정한 위협은 허무주의보다 더 강력하고 구체적인 ‘능력주의적 엘리트주의’라고 진단한다. 과거의 엘리트가 사회적 책무라는 주어진 덕성을 전제했다면, 현대의 엘리트는 오직 성취와 효율로 자신의 정당성을 주장한다.
이러한 능력주의의 가장 현대적이고 과격한 발현이 바로 실리콘밸리의 ‘파운더 모드(Founder Mode)’다. 창업자가 기존의 관료적 경영 관행이나 사회적 절차를 무시하고 자신의 직관만으로 조직을 직접 통제하는 이 방식은, 오직 ‘결과를 내는 천재성’으로 권위를 정당화한다. 스티브 잡스, 일론 머스크, 알렉스 카프에 이르기까지, 이들은 공동체에 대한 헌신이나 도덕적 품격 대신 압도적인 기술적 성취를 엘리트의 자격으로 내세운다. 파운더 모드는 기득권의 의무를 거세한 자리에 ‘천재적 자격’만을 채워 넣은 능력주의 엘리트주의의 결정판이다. 이 오만한 능력주의는 대중을 계몽의 대상으로만 보는 지성주의의 반지성과 결합하여, 엘리트와 대중 사이의 거대한 불신을 낳았다.
브룩스는 자신의 마지막 행선지로 대학을 선택하며 인문학적 르네상스를 대안으로 제시했다. 하지만 엘리트의 위기는 상아탑 안에서 지식을 더 쌓는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진정한 해법은 대학이라는 안전한 울타리를 넘어, 실제 삶의 터전인 ‘현장성’과 '네트워크성'을 확보하는 데 있다.
리처드 호프스태터가 강조했듯, 지식인에게 필요한 것은 오만이 아니라 대중의 지혜를 인정하는 겸손(Humility)이다. 패릭 게디스나 루이스 멈퍼드가 실천했던 모델처럼, 상아탑을 벗어나 지역 공동체와 소통하는 현장성이 담보될 때만 엘리트의 도덕주의는 다시 신뢰를 얻을 수 있다. 시어도어 루스벨트가 강조했던 공공 봉사 정신 역시 관념이 아닌 현장에서의 실천적 덕성과 연결되어 있었다.
동시에 마틴 구리가 지적한 정보 환경의 변화를 수용하는 '네트워크성'이 필수적이다. 중앙집중적이고 일방향적인 훈계의 시대는 끝났다. 현대의 귀족적 도덕주의자는 오바마처럼 공익적 가치를 유지하면서도 디지털 플랫폼을 활용한 쌍방향 소통에 능숙해야 한다. 대중의 상식(Common Sense)과 조우하기 위해 엘리트는 자신의 지식에만 의존하지 않고, 현실을 체험하고 대중과 교감하는 현장으로 돌아가야 한다.
오늘날 우리가 애도해야 할 것은 브룩스 개인이 아니다. 그의 퇴장은 ‘의무를 짊어진 엘리트’라는 유형의 쇠락을 상징한다. 민주주의는 제도나 대학의 커리큘럼만으로 유지되지 않는다. 엘리트주의가 귀족주의적 오만으로 흐르지 않도록 평민주의(Populism)가 상호 견제하는 균형 속에서, 엘리트가 스스로를 절제하고 현장에서 품격을 유지할 때 비로소 관용과 신뢰는 사회로 확산된다. 비록 귀족적 도덕주의가 위선의 위험을 안고 있었다 해도, 도덕적 기준 자체가 사라진 '파운더 모드'의 야생적 능력주의 사회보다는 나았다. 바로 그 이유로 우리는 민주주의의 미래를 위해 대학이 아닌 현장성을 갖춘 지성의 복원을 강력히 요구하게 된다.
엘리트주의 vs 평민주의, JR Mo의 페이스북, 2022.5.18, https://www.facebook.com/share/p/1BravbZUh6/
한국의 올드머니는 다 어디로 갔는가, 골목길 경제학자의 브런치, 2022.11.25, https://brunch.co.kr/@riglobalization/511
지성주의의 반지성, 골목길 경제학자의 브런치, 2025.1.21, https://brunch.co.kr/@riglobalization/1479
선비의 종말?, 골목길 경제학자의 브런치, 2025.3.1, https://brunch.co.kr/@riglobalization/13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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