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순 아버지와 하는 첫 해외여행
아이들은 오늘 관광 파업을 선언했다. 마침 사촌 동생 B의 아이들이 고모네 집에 놀러 오는 날이라, 아이들은 동생들과 놀겠다며 가지 않겠다고 했다. 그래서 다운타운은 나와 네모남자, 그리고 아빠 셋이서만 가게 되었다.
아이들이 없으니, 씨버스를 타고 가기로 했다. 노스밴쿠버와 밴쿠버 다운타운 사이에 바다가 있어, 씨버스는 노스밴쿠버의 론스데일 역(Ronsdale Station)과 다운타운의 워터프런트 역(Waterfront Station)을 이어주는 대중교통 역할을 한다. 먼저 밴쿠버 교통카드인 컴패스(Compass)를 역 앞 자판기에서 구입했다. 밴쿠버 교통카드는 구역별로 요금이 다르니 이동할 구역을 보고 선택하면 된다. 노스밴쿠버는 2 존에 해당했다. 티켓을 사고 선착장으로 내려가니 이미 많은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었고, 곧 배가 도착했다.
배가 도착하자 사람들이 우르르 내린 후 탑승했는데, 내부 공간이 넓어 쉽게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 출퇴근 시간엔 앉기 힘들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배는 천천히 움직여 속도가 느껴지지 않지만, 점점 캐나다 플레이스가 가까워졌다. 다운타운에 도착하면 컴패스 일일권으로 버스나 경전철도 이용할 수 있다니, 배가 도시 대중교통의 일부라는 점이 신기했다. 바다를 품은 도시에서만 가능한 경험이었다.
워터프런트 역에서 나와 바로 옆의 캐나다 플레이스(Canada Place)로 향했다. 커다란 크루즈들이 승객을 태우기 위해 대기 중이었다. 캐나다 플레이스는 밴쿠버 엑스포가 개최되었던 건물로, 현재는 국회의사당으로 주로 사용된다고 한다. 범선 모양의 대형 돛이 있어 독특한 외관을 자랑하며, 밴쿠버의 상징적인 건물 중 하나로 꼽힌다. 특히 밤에 돛에 불이 들어오면 아름다운 야경을 자아낸다. 먼저 캐나다 플레이스 앞에서 사진 중독자 아빠의 사진을 잔뜩 찍어드리고, 나도 한 장 찍었다.
밴쿠버의 발상지인 개스타운에 가면 증기로 움직이는 시계가 있다. 개스타운 증기시계(Gastown Steam Clock)는 꼭 가서 봐야 할 명소로 알려져 기대를 품고 오는 경우가 많지만, 실제로는 생각보다 아담하고 작은 시계다. 그래도 올드타운의 붉은 벽돌 건물들과 잘 어우러져 있어 옛 밴쿠버의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시계는 15분마다 울리는데, 증기와 함께 힘없이 "쁘흐흐흐" 하는 소리가 나온다.
그리고 우리는 줄 서서 먹는 식당으로 유명한 잼 카페(Jam Cafe)로 갔다. 평소에는 기다리는 걸 싫어해 줄 서서 먹는 곳은 잘 가지 않지만, 캐나다까지 와서 맨날 한식만 먹는 것도 억울해 웨이팅에 합류했다. 기다리면서 배고픔을 참지 못해 미리 메뉴를 찾아보고 꼼꼼히 정독하며 주문할 음식을 골라두었다.
드디어 우리 차례가 되어 들어가니, 카페는 작은 편이었고 테이블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캐나다 가게들은 대체로 널찍한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아 과연 맛집이 맞나 잠시 의심도 들었다. 그래도 다행히 창가의 단독 테이블에 앉았고, 앉자마자 미리 정해둔 음식을 바로 주문했다.
음식은 생각보다 빨리 나왔다. 네모남자는 평범한 아침 식사를 주문했지만, 설탕으로 숙성시킨 베이컨이 매우 독특했다. 겉은 살짝 단맛이 느껴지면서 짠맛이 어우러져 약간 육포 같은 느낌도 났다. 네모남자는 “인생 베이컨”이라고 할 정도로 만족스러워했다. 함께 온 사촌동생 M이 시킨 비스킷은 겉은 바삭하고 속은 부드러워 비스킷 특유의 덩어리진 식감이 뻑뻑하지 않았다. 나의 와플 역시 겉은 바삭하고 속은 부드러워, 와플만 따로 먹어도 충분히 맛있을 것 같았다. 사이드로 나온 해시브라운은 두툼하면서도 속은 부드럽게 익었고, 겉은 완벽하게 바삭한 골드 브라운 색을 띠고 있었다.
아버지는 채소가 많은 것 드시고 싶다길래 베지볼을 시켜드렸다. 베지볼은 모든 재료가 한 볼에 담겨 소스와 함께 어우러져 부드러운 맛이었지만, 소스가 아버지 입맛에는 다소 맞지 않는 듯했다. 아버지는 괜찮고 맛있다고 하셨지만, 본인 음식을 자꾸 나에게 더 먹으라고 권했다. 그러고는 네모남자의 음식을 맛보시고는 “0 서방은 어떻게 이렇게 맛있는 메뉴를 골랐냐?”라고 물으셨다. 나는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알겠지만 모르는 척했다. 결국 식당을 나와 둘만 있을 때, 아버지는 내게만 들리게 “영 메뉴가 못 쓰겠더라”라고 덧붙이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