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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혜리영 Sep 23. 2024

출발하고 하루가 지났다.1

23년 9월 16일 론세스바예스 출발 수비리 도착


  출발하고 하루가 지났다. 피레네 산맥을 하루만에 넘었고 그 다음 마을인 주비리로 가야하는, 산티아고 순례길 둘째 날이다. 주비리 가는 길도 내리막이 심하다는 얘기를 길에서 들어서 배낭은 이틀 연속 동키로 보냈다. 론세스바예스 공립 알베르게를 나오니 아직은 캄캄한 새벽이었다. 전날 나름 일찍 나온다고 생각했던 시간이 사실은 늦은 출발이었다는 것을 깨닫고 둘째날은 서둘러 나온 것이다. 그래서 어쩌면, 제대로 길을 걷는 마음가짐을 가진 첫째날 이었다.

  해가 뜨지 않은 캄캄한 새벽, 처음 착용한 헤드랜턴을 켜고 걸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나무가 우거져서 그렇지 그리 외진 길도 아니고 긴 길도 아니었는데, 론세스바예스를 나오는 초입에 만난 시커먼 구멍 같던 그 길이 그때는 왜 그리 무섭던지. 그 앞에서 헤드랜턴을 몇 번 고쳐쓰고서야 길로 들어섰다. 그리고 알았다. 밖에서 볼 때는 어둡고 캄캄한 길이었는데, 들어와보니 아늑하고 새벽의 풀내음이 가득하고 나무들 사이로 새벽 빛이 총총 스며들어 있는 길이었다. 나는 도시내기라 나무가 많고 어두운 길을 무서워하는데, 둘째날 만난 이 짧은 길 덕분어 새벽 시작하는 어둠의 길이 새롭게 다가왔다.





  하늘이 활짝 밝았을 때 지나가는 마을을 만났다. 이곳에서 ATM기를 찾아 여분의 현금을 뽑고, 배낭과 스틱을 멘 사람들을 따라 걸었다. 첫 마을을 지나갈 때쯤 성당에서 종이 울렸다. 8시를 알리는 종이었다. 새삼 반가웠다. 평일인데, 성당에서 종을 울리다니! 이제는 서울에서는 들을 수 없는 소리이다. 그 반가운 성당 종소리에 마음이 조금 더 즐거워졌다.

  나는 여전히 내 속도대로 걸었다. 하나둘 나를 스쳐가도 내가 뒤쳐진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저 내 앞에도 사람이 있고, 내 옆에도 또 내 뒤에도 사람이 있고. 우리는 각자 자신의 사정과 자신의 걸음에 맞게 걷고 있지. 누군가 나를 스쳐가면 또 내가 누군가를 앞서 가면 ‘부엔 까미노’ 인사를 했다. 서로의 삶이 스칠 때마다, 그 길에 축복을 주었다.

  날씨는 화창하고 맑았다. 전날 피레네 산맥을 넘으며 그렇게 쏟아진 비와 짙은 안개가 무색할 정도로 맑고 화창한 조금 더운 날씨였다. 주비리로 넘어가는 길도 마을을 지나가고 나면 다시 산길이 나온다. 산길을 지나갈 때 한 무리의 사람들이 어느 나무 아래에 삼삼오오 모여 있었다. 뒤이어 오는 나를 보더니 아주머니가 무언가 건네주었다. 무화과였다. 앞선 그들이 이미 눈에 보이는 잘 익은 건 다 따서, 나는 아주머니가 건네준 것 하나와 구석에 숨어서 아직은 조금 덜 여문 것 하나, 이렇게 두 개의 무화과를 먹었다. 슴슴한 무화과도 달고 맛있었다.





  걷다가 양치기도 만났다. 또 안 입는 속옷을 두고가면 행운을 준다는 작은 스낵카도 만나고. 걷는 것이 조금씩 즐거워질 무렵이었다. 점점 산길이 짙어지고, 하늘에 구름도 짙어졌다. 그리고 또 부슬부슬 날이 궂어지기 시작했다. 나는 전날 기억 때문에 더욱 서둘러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미 땅은 질었고 걸음을 빨리 걸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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